【CIA 증언】실미도 비극③.. 김신조부대 충격, "김일성 참수부대 만들라"
【CIA 증언】실미도 비극③.. 김신조부대 충격, "김일성 참수부대 만들라"
  • 마이클 리
  • 승인 2018.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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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4개월 동안 혹독훈련,, 교육기간 31명중 7명 사망

 

마이클 리 전 CIA 대북담당관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의 제6기지 소속 31인조 특공대가, 즉 김신조 특공대가, 청와대 기습작전에 실패한 후,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이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긴급소집하고, 우리도 그와 유사한 특수부대의 창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그에 모두 동의하고 1968년 4월 4일부로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었다.

실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속한 무인도다. 이 부대는 서울 오류동에 있는 공군 2325부대의 209파견대 교육대라는 공식 단대호를 갖고 있었으며 자체 내에서는 창설일자를 따서 684부대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이 부대의 운영과 재정, 훈련과 임무, 보안관리 등은 전적으로 중앙정보부 지시에 따랐다.

인천 무인도 실미도 전경
인천 무인도 실미도 전경

31명의 대원들은 전국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신체 강인한 사형수들과 무기수들 중에서 선발했다. 특수임무를 성공하면 모든 과거의 범죄기록을 말소하고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평생 편히 살 수 있게 정부가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충성맹세를 했다.

어느 조직에서는 그 31명이 모두 사형수와 무기수가 아니라 깡패, 소매치기, 시중잡배, 서커스 단원 출신이라고 하고 영화 <실미도>가 저들을 사형수, 무기수로 표현한 것은 명예훼손이라며 유가족들을 충동하여 법원에 고소하였으나 그 문제가 대법원까지 올라가 대법원은 영화제작사의 승소로 종결을 지었다.

◇31명 전원이 사형수 및 무기수

저들이 사형수 무기수 이었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생존자의 진술과 후일에 발표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증언과 그 당시 김종필 극무총리의 증언이 일치한다.

3년 4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31명중 7명이 사망하는데 그 사망원인을 분석하면, 1명은 훈련 중 익사, 2명은 탈영으로 즉결처분, 1명은 하극상으로 처형, 그리고 3명은 무의도 강간사건으로 처형된 것으로 되어있다.

훈련 중에는 전시상황으로 인식하고 교육대장에게 생사여탈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나머지 24명은 기간요원 24명과 함께 지옥생활을 계속하는데 날이 갈수록 훈련은 고되고 급식의 질은 떨어지고 임무수행을 위한 공작명령은 언제 떨어질지 감감하고 그 부대를 용도폐기 한다는 말이 돌고 있을 때 저들은 극도로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의 이후락 부장은 평양을 드나들며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화해무드를 조성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1972년 7월 4일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래서 정부 측에서도 실미도 부대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그 부대를 폐쇄하면 대원들을 어떤 식으로 해산해야 하는지 확실한 대안이 없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영화 <실미도>에서는 정부가 그 부대를 폐쇄하고 대원들을 극비리에 처결할 계획이었다고 암시하였는데,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실책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남북화해무드 조성을 위해서 그랬다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나라의 부름에 응하고 충성하여 더러운 과거를 씻고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하여 지옥훈련을 감수한 저들에게 너무나 무책임하였다.

실미도 부대를 용도변경이나 목적변경으로 계속 유지를 했거나,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정부의 시행착오이지 저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 비참한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저들에게 믿을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국가를 위해 계속 충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어야 했다.

◇새벽 6시에 기간요원 12명 사살 뒤 실미도 이탈,

그때의 극한상황을 이제 와서 쉽게 판단하거나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24명의 훈련대원들이 반란을 결심하고, 1971년 8월 23일 새벽6시에 기간요원 12명을 사살한 후 실미도를 이탈했다. 교전 중에 기간요원 6명은 도피하다가 바다에서 익사했고 나머지 6명은 죽음을 면했다.

그때 사망한 기간요원들은 전사자로 취급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유족들에게는 적정한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실미도 내에서 교전 중에 대원 2명도 사살되었고, 잔여 22명은 그날 12시 20분경 송도해안 독배부리에 상륙했다.

이들은 33사단 102연대 6중대 관할지역을 통과한 후 시내버스 한 대를 납치하여 이동하다가 버스 뒷바퀴에 펑크가 나서 오후 1시경 태화운수 소속 시외버스 5-1681호를 납치하여 갈아타고 서울을 향하여 돌진했다.

어떤 기록에는 상륙 직후 출동한 육군병력과 교전하여 대원 4명이 또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반란군 버스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저항이 있었고 민간인 13명, 경찰 2명, 군인 2명의 부상자와, 민간인 6명과 경찰관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이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15분경이었다. 내가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자폭한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니와 그때 생존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영등포 적십자병원에 가서 만났던 그 생존자 외에도 3-4명의 생존자가 더 있었는데 군사재판을 거쳐 1972년 3월 10일에 처형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보았다.

◇대방동서 총격전 없이 전원 버스서 자폭

공군 측에서 살아남은 기간요원 6명은 전역할 때 철저한 보안교육을 받고 향후 30년간 실미도 사건에 대하여 함구할 것을 지시받았다고 한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대원들이 버스 안에서 <붉은 깃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제작진의 실수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저들이 출동한 군경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때 저들이 버스 안에서 자폭했을 때 주변에는 교통정리와 주민들과 행인들의 접근을 단속하는 경찰관 몇 명과 우연히 그곳에 나타난 소속불상의 육군소령 한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경찰이나 군인들이 출동하여 저들을 저지한 사실이 없다. 군인들이 출동한 것은 저들이 자폭한 후 한참 후의 일이다. 아! 이 사건 역시 민족분단으로 몸부림친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mlee-cia@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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