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오징어게임은 가라! 오백나한 납신다…호주도 열광한 ‘볼매’ 얼굴." 대형포털에서 만난 기사다. 볼매란 ‘볼수록 매력있다’는 뜻인데, 그 기사는 호주 시드니에서 열렸던 고려시대 나한상 전시회가 대박났다는 소식이다. "나한전은 올해 가장 아름다운 전시"라며 수십 만 호주 관람객들이 경탄했다는데, 그런 분석이 설레발이나 국뽕이 아니라는 걸 나는 직감한다. 꼭 3년 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눈으로 봤던 기억 때문이다. 착각 마시라. 오백나한상을 당신은 교과서에선 본 적이 없다. 첫 출현했던 게 불과 21년 전이니까.

나한상 88점은 2001년 5월 강원도 영월의 현지인이 발견했다. 뒤이은 발굴조사 중 창령사(蒼嶺寺)라는 기와가 나오면서 폐사터가 고려 12세기 절이라는 것도 확인됐고, 그래서 창령사 오백나한상으로 불린다. 조선조 유생에 의해 땅에 묻혔다가 900년 전의 모습을 드러낸 것인데, 그런데 왜 그렇게 보는 이를 빠져들게 할까? 내 눈에 창령사 오백나한상은 고려미술이 구현해낸 고졸(古拙)함의 위대한 승리다. 어눌한 표정과 미소가 너무도 천진하면서도 아름다워서 바라보는 순간 우릴 무장해제시킨다.

그걸 빚어낸 고려 석공들이야말로 어린아이 같은 그림으로 유명한 현대미술의 스타 장 미셸 바스키야(1960~1988)급이다. 아니 고려 석공은 바스키야가 가진 억지스러움마저 없으니 더욱 천의무봉이다. 보고 있자면 영혼까지 치유된다는 두 점의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고대 동북아 정신세계의 큰 봉우리라면, 고려 나한상은 질박한 인간미가 압권이다. 둘 사이에 우열은 없다. 호주가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통할텐데, 내 얘긴 지금부터가 핵심이다. 창령사 오백나한상은 공허한 찬탄에 그쳐선 안된다.

"21세기 우린 900년 전에 비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 질문이 포인트이다. 미술사란 결국 ‘눈에 보이는 정신사’이기 때문인데, 나는 궁금하다. 지금 우리가 나한상을 조성했던 고려시대인과 같은 민족일까? 혹시 그새 우린 잇속 차리기에만 밝은 헛똑똑이로 전락한 건 아닐까? 아는 건 많지만 깊이와 성찰을 잃어버린 바보 말이다. 자, 이쯤에서 ‘창령사 오백나한상’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시길 바란다. 나한상이란 큰 거울에 우릴 비춰보면서 우리의 안타까운 상실과 위대한 성취가 과연 무엇인지를 찬찬히 점검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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