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3·1운동 이승만 기획설

'3·1운동 기획설'을 뒷받침하는 문헌들
1949 서정주『우남 이승만 전』
1985 『인촌 김성수, 사상과 일화』
1996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2015 전광훈 『이승만의 분노』
2019 이상규 "삼일운동, 기독교 참여와..."
2022 오정환 『세번의 혁명과 이승만』

류석춘
류석춘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장차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둠으로써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 시켜달라고 청원하는 문서에 이승만이 정한경과 함께 서명한 날짜는 1919225, 그리고 그 문서를 윌슨에게 전한 날짜는 33일이다. 그런데 이 두 날짜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191931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이다.

3·1운동이 일어난 과정과 이유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대략 다음과 같이 알려져 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약 한 달 전인 28일 동경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고, 그 사실이 국내로 알려지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국내외 민족지도자들 특히 천도교·기독교·불교 민족대표 33인이 121일 세상을 떠난 이왕가(李王家) 고종의 장례식 예정일 (33) 직전인 31일 거사한 운동이라고.

그러나 최근 새로운 해석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유영익 교수가 단초를 제시하고, 전광훈 목사 그리고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등이 적극 동조하고 있는 ‘3·1운동 이승만 기획설이다. 유영익 교수가 1996년 출판한 이승만의 삶과 꿈134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이승만은 1차대전이 끝나면 강화회의에서] 윌슨을 앞세워 한국 독립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의 복안을 191810월경 하와이를 방문한 여운홍 [여운형의 동생] 과 미국인 선교사 평북 선천의 미동병원 원장 샤록스 (Alfred M. Sharrocks, 謝樂秀) 등을 통해 국내의 민족지도자들, 예컨대 송진우·함태영·양전백 등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이 적당한 시기에 자기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대중운동을 국내에서 펼쳐줄 것을 기대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명단과 종교구성. 출처: 기독신문 2019. 5. 3.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명단과 종교구성. 출처: 기독신문 2019. 5. 3.

유영익은 이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독립을 향한 집념: 고하 송진우 전기(동아일보사, 1990) 인촌 김성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사, 1985) 두 책을 제시했다. 동시에 유영익은 ‘3·1동지회부회장 허경신이 1986‘3.167주년 기념식에서 한 축사및 하와이로 이민 온 부모의 삶과 꿈을 그린 Margaret K. Pai 가 쓴 영문 책 The Dreams of Two Yi-min [이민], (1989, University of Hawaii Press) 도 함께 제시했다.

이 문헌들을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최시중이 편저해 1985년 동아일보사가 출판한 인촌에 관한 책을 대표적으로 살펴보자. 이 책의 123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18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 이승만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 주기 바란다.’”

따옴표까지 붙은 이 기록은 전광훈 목사가 퓨리탄 출판사에서 2015년 출판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분노86쪽에서도 반복된다. 인보길이 뉴데일리에 쓴 이승만의 밀서가 3.1운동 일으켰다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 (2019 2 24).

가장 최근 이승만 기획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올해 출판된 오정환 PD세 번의 혁명과 이승만(타임라인, 2022) 이다. 오정환은 책 179쪽에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유학생들 가운데 여러 명이 이승만의 활동에 영향을 받았다고 증언했다고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증거로 전영택, 김도연, 백관수, 최승만의 회고를 들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일본 경찰의 정보보고 기록도 제시한다 (180).

“19181130일 자 일본 경찰 정보보고는 이승만의 파리 강화회의 참석 비용으로 황해도의 어떤 부자가 3만 원을 보냈다는 소문이 있다고 적었다. 191925일 자 평안남도 경찰 정보보고에도 재외 한인 및 재외 유학생 등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하는데 그 중심인물이 이승만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고 적었다.”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이승만의 위상이 국내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다른 한편 기독교 역사학자 이상규 교수는 2019년 논문 삼일운동에서 기독교의 참여와 기여에 대한 고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http://www.newspower.co.kr/48784). “중국에서의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신한청년단의 조직, 국내의 서울과 평양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 일본에서의 2.8 독립선언 등은 기독교인 중심이었고, 천도교와의 합작이나 민족대표 33, 혹은 48인의 구성에서도 기독교는 인적 구성에서 50%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 삼일운동의 거사 및 전국적 전개과정에서도 기독교회와 선교학교는 만세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감당했다.” 당시 국내외 기독교 네트워크 역할에서 이승만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역시 이승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과 대동소이한 위임통치를 청원한 신한청년당 대표단과 현지인들. 앞줄 오른쪽 끝이 김규식, 왼쪽 끝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뒷줄 왼쪽에서 둘째가 이관용, 셋째가 조소앙이다. 출처: 웨슬리안타임즈 (https://www.kmcdaily.com/news/articleView.html?idxno=1653)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과 대동소이한 위임통치를 청원한 신한청년당 대표단과 현지인들. 앞줄 오른쪽 끝이 김규식, 왼쪽 끝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뒷줄 왼쪽에서 둘째가 이관용, 셋째가 조소앙이다. 출처: 웨슬리안타임즈 (https://www.kmcdaily.com/news/articleView.html?idxno=1653)

3·1운동에서 이승만의 역할을 강조하는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49년 서정주가 화산문화기획에서 출판한 우남 이승만 전()이다 (212-213 ). “국내와 국외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윌슨의 성명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가 대전 후 강화회의에서 이 문제를 올리게 될 때, 세계의 약소민족은 모조리 일어설 것이라고 예언한 후, 한국도 지금부터 이에 호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서정주는 이어간다. “그는 이 지시를 서면으로도 보내고, 밀사를 통해서도 보내고, 전신으로도 보내어, 뜻있는 모든 동지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중국과 일본에 있는 동지들에게 민족 총궐기의 기회가 왔으니 속히 대비하라는 지시를 보내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정식으로 파견하기 위하여 미국 정부에 교섭을 시작하였다.”

윌슨이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제정치 흐름을 꿰뚫어 보던 이승만이 그 기회를 그냥 지나칠 까닭도 없다. 그러나 패전국을 상대로 민족자결을 하는 것보다, 승전국을 상대로 민족자결을 하는 것이 천배 만배 어려운 일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한편으로는 국제정치 역학을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밑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두 요구가 맞물려야 승전국을 상대로 한 민족자결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9년 서정주가 쓴 전기에서부터 2022년 오정환이 쓴 책까지 모두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만은 아래로부터의 독립 요구가 191933일 위임통치를 청원하기 전 혹은 후 특정한 시점에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그는 아래로부터의 독립 요구가 필요함을 동포들에게 줄기차게 호소했을 뿐이다. 그와 같은 생각 때문에 파리행 여권발급이 어려워진 사실을 확인한 직후인 213일 이승만은 미주판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개최를 서재필에게 서둘러 제안했다.

그런 이승만을 두고 신채호는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라 비난했다. 3·1운동이 발발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아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는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이유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에게 완패한 박용만이 1917년 상해로 떠나 신채호 등과 어울리며 대동단결선언을 했으나 결국은 실패하면서 생긴 후유증일 뿐이다. 가히 우리민족끼리주사파 원조가 되고도 남을만한 일이다. 이승만은 삼일운동이 벌어진 사실을 9일이나 지난 310일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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