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백건우와 윤정희 납치미수 (2)
북한의 백건우와 윤정희 납치미수 (2)
  • 마이클 리
  • 승인 2018.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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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왼쪽) 윤정희(오른쪽)
백건우 (왼쪽) 윤정희(오른쪽)

그들이 택시를 타고 찾아간 집은 조용한 주택가 한복판에 제법 큰 3층집이었다. 연주회를 한다면 방문객들도 많이 오고 그들이 타고 온 차들도 마당에 주차되어 있어야 하겠는데 주위가 너무 조용하였다. 수상하다고 느낀 백건우는 아내와 딸을 택시 안에 남겨두고, 박인경과 함께 나와 주변을 살피다가 박인경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2층에 만찬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백건우가 따라 들어가 보니 1층은 방문이 모두 잠겨있고 창문도 커튼이 내려진 상태였으며, 2층에는 갑부가 마련하는 만찬이라고 믿기 어렵게 과일접시 하나와 빈 접시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3층에서 자기를 초청한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남자 한사람이 나타났다.

그 순간 백건우는 그가 북한공작원임을 직감하고 쏜살같이 택시로 달려갔다. 그 동양인은 “wait, wait" 를 연발하며 따라오고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거의 택시의 문손잡이를 잡을 정도로 접근하였다. 백건우는 그 택시를 타고 급히 그곳에서 빠져나와 <자그레브>에 있는 미국영사관으로 달려갔다. 그자가 바로 북한공작원 <허묵>이었다.

◇자그레브 미국영사관으로 도주

그때가 1977년 7월 31일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미국영사관의 문은 닫혀있었고, 도서관이 아직 열려있어 백건우 가족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때마침 잔무정리를 위해 남아있었던 미국외교관 한사람이 백건우 가족을 만나 사정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즉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임시로 묵고 있는 호텔로 안내한 후 자정 무렵에 4층 416호실로 옮겼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누가 416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백건우는 당황하여 그 미국외교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미국외교관은 그가 묵고 있던 3층에서 4층으로 올라왔을 때 거기에는 동양인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416호실 앞에 서있는 것을 목격 하였다. 그중 한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며칠 전 오스트리아 건국기념일 리셉션에서 보았던 북한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허묵>이었다.

그는 즉시 백건우에게 전화하여, 지금 북한사람들이 문밖에 와 있으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북한사람들이 사라진 후에 그는 다시 나와서 백건우 일행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안내하고 파리 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여 저들이 탑승하고 이륙하는 것까지 확인하였다.

이 납치공작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방화자>의 옷차림이 백건우 일행에게 불길한 신호를 보낸 것이며, 다음은 박인경이 <자그레브> 현장에서 그 집안에 들어갔을 때 사용해야할 암호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박인경의 암호 착오

박인경이 “왔어요”하면 잠복하고 있던 북한공작원들이 뛰어나와 백건우와 윤정희를 덮치도록 사전조직이 되어 있었는데, 박인경이 엉뚱하게 “다들 어디 갔나”라고 하는 바람에 잠복공작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암호가 이상하자 <허묵>이 혼자 나타났고 백건우가 도주했다. 그 다음날 그들이 호텔 앞에서 다시 한 번 납치를 시도했으나 미국외교관의 기지로 백건우 일행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납치미수사건 후 26년이 지난 2003년에는 북한이 이 납치공작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그레브>가 유고슬라비아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신생국가 <크로아티아>의 수도다. 이 문서는 현재 <크로아티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행정위원인 <도부리보예 비디치>가 북한대사 <정광순>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해 질문하자 <정광순> 대사가 해명한 내용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 납치시도 사건은 현지주재 북한 외교관들과는 아무상관이 없으며 평양에서 직파한 공작 팀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17년 후인 1994년 1월부터 박인경 (1926년생)은 아무런 제재 없이 한국을 드나들고 있었다. 박인경은 2000년부터 2005년 9월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이응노 미술관>을 운영했고 대전광역시는 2007년에 <이응노 미술관>을 개관하고 박인경을 명예관장으로 추대하였다.

◇北하수인 박인경·윤이상에게 미술관·기념관을 지어준 한국정부

일부 언론에서 박인경의 이적행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한국정부는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정부는 참으로 허술하기가 그지없다. 화백 이응노와 그의 처 박인경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적행위를 범했다.

1958년에 프랑스 파리로 간 그들은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고,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때 파리주재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들의 가택을 수색했는데 특수단파수신 라디오와 북한간첩 난수표와 자살용청산가리가 발견되었으며 세포조직명단에는 이응노와 윤이상이 중요멤버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이들에게 대전에는 이응노 미술관을 지어주고 통영에는 윤이상 기념관을 지어주었는데 이 일을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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