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희
김인희

지난 주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은 2022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마지막 허들인 ‘원서전쟁’만 잘 넘으면 대학생으로서의 새 삶이 시작된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나 또한 수험생이던 시절이 있었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나오던 날, 후련한 감정도 들었지만 안타까운 감정도 들었다. 초·중·고교를 합쳐 12년 이상 공부한 시간을 단 하루의 시험으로 평가받아야 하고 그것이 대입을 위한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목만 있고 실체는 없었던 수시입시제도가 2002학년도부터 대폭 확대됐을 때, 필자는 입시 통로의 다양성과 유연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수시제도가 도입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수시입시는 또다른 입시지옥을 낳고 있다. 애초에 의도했던 입시의 다양성과 유연성은 껍데기만 남아있다. 그렇다고 공정성이 확보됐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질풍노도의 고교시절, 1~2학년 때 방황했던 학생은 3학년이 돼서 공부에 매진해봤자 수시도전의 기회가 사실상 없다. 학교생활기록부는 한번 입력되면 절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1학년때부터 ‘될 만한 학생만’ 밀어주는 식이다. 3학년이 돼서 자신이 수시입시로는 대학 진학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의욕마저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검정고시를 택했거나,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들은 아예 학교생활기록부가 없기 때문에 수시 입시 기회 자체가 차단된다.

입시방법의 다양화를 통해 사교육을 줄이겠다는 취지도 완전히 실패했다. 교과과목 위주로 성행하는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비교과활동 비중을 높였더니 교과과목 사교육은 그대로면서 비교과활동을 전문적으로 컨설팅하는 사교육시장이 추가로 생기는 효과만 불러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시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아이들의 고교진학을 앞두고 농어촌지역으로 전입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도시 학교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보다, 상대적으로 학력수준이 낮은 시골의 학교에서 비교우위를 갖는 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주말이 되면 대치동 학원가로 ‘원정 수강’을 하러 온다. 과거 수시가 없던 시절보다도 꼼수와 사교육이 늘면 늘었지 절대 줄지 않았다.

수시입시로 대학에 합격하면 정시입시에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문제다. 기회의 공정성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 학생이 여러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강제로 제한하는 입시제도가 어떻게 공정하다 할 수 있겠는가. 수시 입학생을 줄이고 정시 입학생을 늘리더라도 선택의 기회는 충분히 열어줘야 한다.

단 한번의 수능 응시로 대학 입결이 결정되는 것이 너무 큰 부담이라면 수능 시행 초기처럼 매년 수능 응시기회를 두 번씩 주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대안이다. 이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25년 넘는 수능 출제와 채점 경험으로 ‘표준점수’ 산출에 충분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난이도 조정만 적절하게 된다면 한 번의 시험으로 좌절하는 수험생보다 또 한번의 기회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수험생이 더욱 많아진다. 교육정책은 피교육자에게 좌절이 아닌 희망을 줘야 한다.

내년부터는 고교학점제마저 도입된다. 학생의 교육선택권 자율화라고는 하지만 상대평가 체제인 수능과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고교학점제에 수시에 수능까지 서로 다른 세 방향의 정책을 모두 감당하라는 것은 고교생들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교육정책을 누더기로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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