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이승만 일생 시기 구분

성장기 21년보다 10년이나 더 긴 기간 하와이에 머물러

이승만의 일생 시기 구분.
이승만의 일생 시기 구분.

 

류석춘
류석춘

1875년 태어나 1965년 돌아간 이승만의 90 평생은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기를 구분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특정한 사건이 위치한 시대적 배경은 물론 그 사건과 배경에 대한 이승만의 대응을 교차시켜 시기를 구분해 보고자 한다. 주어진 여건에 대한 이승만의 적극적인 선택을 강조한 구분이다. 그림과 같이 거칠게 11단계로 나눌 수 있다.

①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시기다. 1875년 3월 태어나 1896년 4월 즉 21살이 될 때까지다. 황해도 평산에서 몰락한 왕손 집안으로 태어난 이승만은 두 살이 되어 서울 남대문 밖 도동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해 서당 교육을 받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16살이던 1891년에는 박씨 부인과 결혼도 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6년 4월 신학문을 배우려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② 배재학당에서 선교사들을 만나 신학문을 익힌 시기다. 1896년 4월부터 1899년 1월까지 즉 21살부터 24살까지의 3년간이다. 배재학당에서 선교사들을 만나 신학문을 배웠으며,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문 창간을 주도했다. 오늘날 거리집회에 해당하는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서 국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인기를 끌었다. 결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단 죄로 1989년 1월 투옥되었다.

③ 감옥에서 개종하고 뒷날을 준비하던 시기다.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즉 24살부터 29살까지 만 5년 7개월의 기간이다. 감옥 생활을 하며 이승만은 후에 책으로 출판할 ‘청일전기’ ‘독립정신’ 등의 원고를 한글로 완성했다. 옥중에서 또한 ‘제국신문’ ‘신학월보’ 등에 활발히 기고도 했다.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아름다운 한시(漢詩)도 여러 수 남겼다.

④ 미국에서 유학한 시기다. 1904년 8월부터 1910년 7월까지 즉 29살부터 35살까지 6년간이다. 감옥을 나온 이승만은 당시 실력자 민영환 등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출국했다. T 루즈벨트 대통령 여름 별장을 찾아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근거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나 ‘외교적 거절’에 만족해야 했다. 미리 받아둔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활용해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톤’ 대학에 진학해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⑤ 독립운동의 공간으로 하와이를 선택해 정착하는 시기다. 1910년 7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즉 35살부터 45살까지의 10년이다. 유학을 마친 즉시 조선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기독청년회 (YMCA) 일을 맡았으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 3월 다시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그 사이 박씨 부인과 이혼했다. 도미한 이승만은 뉴저지 지사가 된 은사 위드로 윌슨의 자택을 방문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미국 각지를 돌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13년 2월 하와이에 정착했다. ‘한인기숙학교’를 세운 후 ‘한인중앙학원’ ‘한인여자학원’ ‘한인기독학원’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교육을 확장했다. 1913년 ‘태평양잡지’를 창간했고, 1917년에는 ‘청일전기’와 ‘독립정신’(2판)을 현지에서 출판했다.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한 박용만과 충돌했다.

⑥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한 시절이다. 1920년 11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즉 45살부터 46살까지의 반년이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일본의 검거를 피해 시체를 옮기는 화물선 관 속에 숨어 호놀룰루를 출발해 상해로 밀항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좌우대립은 물론 자금 확보와 용처 등에 관한 갈등으로 5개월 만에 ‘고별교서’를 발표하고 하와이로 돌아갔다.

⑦ 하와이로 복귀해 다시 독립운동에 매진한 시기다. 1921년 5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즉 46살부터 64살까지의 18년이다. 하와이로 복귀하자마자 지지세력인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고, 외싱톤 DC 군축회의에 참석해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1923년 ‘태평양잡지’에 공산주의의 옳고 그름을 논한 ‘공산당의 당부당’을 발표했다. 1925년 상해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탄핵했지만, 임시정부와 관계를 복원한 이승만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해 "만주의 한인들" (Koreans in Manchuria) 이란 소책자를 배포하면서 독립을 호소했다. 제네바에서 만난 프란체스카와 1934년 10월 뉴욕에서 재혼하고 하와이로 귀환했다.

⑧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상하고 독립운동의 공간을 워싱톤 DC 로 옮긴 시기다. 1939년 3월부터 1945년 10월 즉 64살부터 70살까지 6년이다. 워싱톤 DC 로 이주해 집필한 책 Japan Inside Out 을 1941년 여름 출판하면서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해 명성을 얻었다.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회’와 한길수가 이끄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그리고 충칭의 김구 임시정부가 이끄는 ‘주미외교위원부’가 1942년 2월 뉴욕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1942년 6월부터 ‘미국의소리’ 방송에 출연해 동포들의 대일투쟁을 고무했고, 같은 해 9월부터는 CIA 전신인 OSS 와 협의해 국내 진공에 대비한 군부대를 창설하고 교육에 들어갔으나 일본의 급작스런 항복으로 무위에 그쳤다. 임시정부 승인 요청 그리고 얄타밀약설 제기 등으로 미 국무부와 대립했다.

⑨ 해방된 조국에서 미군정과 싸워 이긴 기간이다. 1945년 10월 환국부터 1948년 8월 건국까지의 시기로, 나이로는 70살부터 73살까지의 기간이다. 환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 남노당 박헌영과 대립했다. 또한 미군정이 지원한 좌우합작 노선의 여운형·김규식과 갈등하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노선을 확실히 했다.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안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정치적 승리의 기회를 확보하고 UN의 지원을 받아내 대한민국 건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⑩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으로 재임한 기간이다. 1948년 8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즉 73살부터 85살까지다. 친일청산, 농지개혁 등 건국에 필요한 과업을 수행하다 6.25 기습남침을 당했다. 미국 등 UN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지켰고 휴전의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관철시켰다. 교육기회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으며 전후복구를 통해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측근이 주도한 3.15 부정선거에 책임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⑪ 말년의 황혼기다. 1960년 4월부터 1965년 7월까지 즉 85살부터 90살까지의 기간이다. 하야 후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던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임종을 맞았다. 시신으로 고국에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승만의 일생을 이렇게 구분하고 보면 하와이가 이승만에게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었나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이승만은 1913년 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26년 그리고 1960년 하야부터 1965년 임종까지 5년, 도합 31년을 하와이에 머물렀다. 성장기 21년보다 10년이나 더 긴 기간이다. 이승만 동상이 하와이에 서 있는 이유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마당에 있는 이승만 동상.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마당에 있는 이승만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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