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빌려- 원통에서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1936~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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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시집 ‘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시인이 민요를 채집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닐 때 쓴 시편들 모음이다. 시인은 외롭고 소외된 것들에 천착한다. 초기작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시에 관한 이러한 견지는 변함이 없다.

‘원통에서’ 라는 부제를 달지 않아도 가독성은 지장 없다. 부제가 제목을 대신해도 괜찮았을 터. 아마도 민요채집 기행 때였던 만큼 지명(地名)이 중요했으리라. 원통의 행정관할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다. 지명 유래가 재미있는데,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한다. 첩첩산골 마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대처로 떠나보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잘 드러난다. 어쨌거나 내설악 백담사를 거쳐 대청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원통을 들러야 한다. 시인이 설악산 대청봉에서 본 세상과 속초와 원통 저자거리에서 겪은 세상은 대조적이다.

산정에서 본 세상은 ‘떨어져 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시인은 ‘원통’에서 세상의 모순을 보았다. 위에 있을 때는 거만했고 아래에 있을 때는 짜부라졌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編)에 이런 구절이 있다. 是故大知觀於遠近, 故小而不寡, 大而不多. 큰 앎을 지닌 사람은 멀고 가까운 곳을 관찰하니, 작다고 과소평가하지 않고, 크다고 대단하다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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