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지난주 코미디언 송해를 떠나보냈다. 고인에 대한 따듯한 기억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뭔가가 허전했고, 영화감독 신상옥(1926~2006)을 떠올렸다. 둘은 한 살 차이 동년배이고 이북이 고향이다. 단 요즘 누구도 신상옥을 말하지 않으며, 영화판에선 거의 금기다. 지난주 감독 박찬욱을 언급하며 좌파-돈파가 결합한 좌익상업주의 영화판을 비판했지만, 내가 신상옥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다. 그야말로 문제적 인물인데 까칠한 성격에 창작의 자유를 목숨처럼 여겼고, 그래서 알고 보면 강남 좌파의 원조 격이다.

검열의 칼을 든 1970년대 박정희 정권과 갈등했던 것도 그 배경이다. 영화감독협회장 시절 "이 판에서 뭔 예술?"하고 투덜댔다가 미운털이 박혀 영화사 간판까지 내려야 했다. 그 무렵 서독 방문 때 ‘붉은 작곡가’ 윤이상을 만나 박정희 욕을 그렇게 신나게 퍼부었다. 둘 사이 대화를 듣던 배우 신성일의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고 그가 자기 책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털어놨을 정도다. 그러던 그가 78년 돌연 납치된다. 이후 정치범수용소를 거쳐 북한 영화를 만들며 활동했지만 본래 그는 정치적으론 회색이었다.

"모험적 좌익도 싫지만, 모랄 없는 우익도 싫다"던 사람이 그였는데, 서방세계 탈출 뒤 완전 돌아섰다. 그 과정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2001)이다. 젠체하는 리버럴리즘에서 진지한 반공주의로 돌아서는 과정이 너무도 진솔하고 드라마틱하다. 북한의 실체 그리고 김정일의 위선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고 그러면서 책임있는 지식인으로 대변신한 것이다. 신상옥의 사상적 각성이란 20세기 동서냉전사 최고 수준이라는 게 내 판단인데, 만년의 그는 자유우파 불굴의 전사였다.

일테면 신상옥 책의 백미는 대통령 김대중 비판이다. "당신은 김정일 통일놀이의 남쪽 파트너"란 맹공격이 지금 읽어도 짜릿하다. 2000년 6.15 선언을 전후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대한민국에 대한 뜨거운 충정도 가슴을 친다. 그런 이유로 좌파 영화계가 그를 좋아할 리 없지만, 신상옥을 건너뛴 채 좌익판으로 돌아선 한국영화는 내 눈엔 엉터리다. 그래서 박찬욱에게 신상옥 연구를 권유한다. 그를 소재로 영화도 만들라. 그렇다. 공부 않는 리버럴리스트의 무리가 문제인데, 그런 위선자들에게 신상옥은 탁월한 좌파 탈출의 백신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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