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임시정부에 보내는 격려문
미국에 보내는 '독립지원'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결의문
일본의 지성인에게 보내는 서한문
미대통령·파리강화회의 청원서
AP 통신 등 미국 언론, 폭발적 반응
‘한국친우회’ 결성으로까지 연결

류석춘
류석춘

3·1운동이 벌어진 사실은 상당한 시차를 두고 미국의 이승만에게 알려졌다. 상해에 있던 현순의 전보가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에게 도착한 것은 39일이었다. 안창호는 다음 날 서재필에게 전보를 쳤다. 310일 이승만은 일기에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안창호가 보낸 전보를 서재필이 가지고 옴이라 적었다 (국역 이승만 일기p. 91).

이승만은 고무되었다. 비록 파리 강화회의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서재필에게 제안해 추진하고 있던 한인대회 개최를 서둘렀다. 1919213이승만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독립기념관까지 퍼레이드를 하자고 제안함. 서재필과 내가 서명한 회람을 돌림. 1차 한인대회 (The First Korean Congress) 에 관한 보고서 참조”.

1차 한인대회 (The First Korean Congress) 19194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주에 있는 한인 대표 150여 명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할 국가의 기본 틀과 방향을 제시한 대회다. 이 회의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 헌법 제정의 산파 역할을 한 대륙회의 (The Continental Congress) 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사실에 착안해, 한국도 미국의 건국과정과 유사한 방식으로 새로운 국가건설에 착수했음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행사였다.

서재필이 제안한 ‘Korean Independence League’ (한국독립연맹) 라는 단체 이름을 적은 현수막을 들고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하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참가자들의 선두 모습. 이 용어는 톰킨스의 제안에 따라 “League of Friends of Korea” (한국친우회) 로 바뀌었다.
서재필이 제안한 ‘Korean Independence League’ (한국독립연맹) 라는 단체 이름을 적은 현수막을 들고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하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참가자들의 선두 모습. 이 용어는 톰킨스의 제안에 따라 “League of Friends of Korea” (한국친우회) 로 바뀌었다.

50대 중반의 서재필이 의장을 맡았다. 40대 중반의 이승만, 이대위, 민찬호, 윤병구 등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에 더해 김노디(21), 유일한(24), 조병욱(25), 임병직(26), 정한경(29) 20대 청년·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3일간의 일정을 소화하며 회의에서 채택한 각종 결의안과 메시지는 모두 5종류였다. 각기 대상을 달리했지만, 내용은 서로 보완적이었다.

1) [317일 출범한 노령] 임시정부에 보내는 격려문 (message): 미주 교포들은 민주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기독교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지지.

2) 미국에 보내는 호소문 (Appeal to America): 1882년 조미조약을 인용하며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나설 것을 요청하고 미국과 한국은 자유, 민주주의, 기독교라는 가치를 공유함을 강조.

3)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이라는 결의문 (resolution) 채택: 새 나라는 미국 민주주의를 본받아 피통치자의 동의에 기초해야 하고, 정부는 입법부와 행정부로 구성되어 상호 견제하고,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여 조약을 맺으며, 신앙의 자유를 비롯하여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나라가 되어야 함.

4) 일본의 지성인에게 보내는 서한문 (message): 일본이 유럽식 군국주의를 포기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면, 한국은 동북아의 우호적 완충국이 되어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게 됨을 설명.

5)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petition) 채택: 임시정부를 2천만 우리 민족의 의지를 대변하는 정부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우리의 꿈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 천명.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는 세계인과 함께하는 모임이었다.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의 기독교 각 교파 지도자들이 대거 합류했다 (박명수,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의 의미국민일보, 2022 4 14). 성공회 사제 톰킨스 (Floyd W Tomkins: 필라델피아 홀리 트리니티 교회 담임목사), 장로교 목사 매카트니 (Clarences E. McCartney: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 정통 장로교인), 천주교 신부 딘 (James J. Dean: 빌라노바 대학 총장이자 수학과 교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도 동참했다. 오랫동안 독립된 나라를 갖기를 원했던 유대인 신문기자 베네딕트 (George Benedict) 는 이 대회 성공의 숨은 공로자로서, 유대인 회중교회 지도자 (Rabbi) 버코비츠 (Henry Berkowitz) 의 참여를 이끌었다. 오벌린 대학 교수 밀러 (Herbert A. Miller: 하버드 대학 사회학 박사, 1918년 필라델피아에서 체코의 독립을 위한 엇비슷한 행사를 마사릭과 함께 주도) 도 힘을 보탰다. 또한 볼세비키와 싸운 러시아 선교사 출신 샤트 (Alfred J. G. Schadt) 교수도 참여해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를 마치고 미국 독립기념관을 방문해 ‘대륙회의’를 재현한 공간에서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좌정한 이승만. 이승만 뒤의 서 있는 사람 가운데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윤병구, 두 번째가 정한경, 세 번째가 김노디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를 마치고 미국 독립기념관을 방문해 ‘대륙회의’를 재현한 공간에서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좌정한 이승만. 이승만 뒤의 서 있는 사람 가운데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윤병구, 두 번째가 정한경, 세 번째가 김노디다.

대회의 마지막 순서는 회의장 (The Little Theater) 에서부터 독립기념관 (Independence Hall) 까지 6블록에 걸친 행진이었다. 행진을 마친 일행은 독립기념관에 들어가 대륙회의 모습을 재현한 장소에서 관계자의 양해를 얻어 워싱턴이 영국을 상대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자리에 이승만을 앉도록 했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상대로 한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미국 언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에서 재현된 3·1운동인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는 AP 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됐다. 미국 언론에만 최소 수백 개의 기사가 실렸다 (Fields, 2019: 61). 3·1운동에 대한 일본 당국의 가혹한 탄압이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에 알려지면서 한국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이 상황에서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는 한국인들이 독립해서 자치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우호적인 여론이 비등하면서 한국 독립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미국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호소할 조직으로 서재필이 제안한 ‘Korean Independence League’ (한국독립연맹) 구상은 한인대회에 참여한 톰킨스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이름을 ‘League of Friends of Korea’ (한국친우회) 라 바꾸고 필라델피아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장로교 및 감리교 교회와 기업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회장에 취임한 톰킨스의 노력으로 지회가 워싱턴, 뉴욕, 시카고 등에 생기더니 급기야는 미국 전역으로 지회가 확대됐다. 1921년이 되어서는 연회비 3불을 내고 Korea Review 라는 한국친우회 잡지를 구독하는 회원이 25천 명이나 되었다 (Fields, 2019: 68-69).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를 거치며 미주의 한인들 사이에는 독립의 기운이 하늘을 찔렀다. 우호적인 미국 언론의 보도는 외국인들의 동참과 후원으로 이어졌다.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등은 미국 곳곳에 초청받아 연설하고 또 한국의 독립에 관한 서적을 출판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언론에 보도되면서 여론을 주도했다. 교회와 학교 등이 주된 무대였다.

3·1운동은 해외에서 독립의 꿈을 키우는 임시정부를 우후죽순으로 만들어 냈다. 317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를 시작으로, 411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23한성정부가 잇따랐다. 이승만과 서재필이 주도한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는 바로 이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뜻깊은 대회였다. 그로부터 대략 100년이 조금 지난 20224월 이 대회를 소재로 한 다큐멘타리 뮤지컬 ‘1919 필라델피아공연이 흥행에 성공한 사실 또한 뜻깊은 일이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