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 극단주의자 파면법 [1]
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 극단주의자 파면법 [1]
  • 최성재 교육문화평론가
  • 승인 2018.12.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빌리 브란트 독일 전 총리. 사진=위키백과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사진=위키백과

 『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극단주의자 파면법>이란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1969년 사회민주당(SPD) 출신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앞서 20년간 집권했던 기독민주당(CDU)의 할슈타인 정책(Hallstein Doctrine)을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바꾼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status quo) 동서독 두 개의 국가를 대외적으로 인정하되(각자 UN 가입), 동서독 간에는 특별한 방식을 띠게 된 이중적 정책이었다. 당연히 제1 야당 기민당은 ‘동방정책을 반통일 정책이요, 영구분단 모략’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1972년 1월 브란트는 <극단주의자 파면법>에 손을 들어준다. 이것은 당시 서독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준다. 다름 아닌 젊은이의 우상 브란트가 급진 좌파를 모든 공직에서 추방하겠다고 했으니, 그 충격의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법은 브란트에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빨갱이 꼬리표를 떼는 데 도움이 된다. 기민당은 마침내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구하되, 동독에 협상의 주도권을 넘기지 않을 것임을, 동독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않을 것임을 믿게 된다. ‘막 퍼 주지’ 않을 것임을 믿게 된다.

전 서독총리 빌리 브란트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동서독의 화해(라프로시망 rapprochement) 분위기 속에서도, 끝내 서독이 동독 슈타지(Stasi)의 집요한 공작에 넘어가지 않고 자유평화통일의 합창을 부를 수 있었던 데는 이 <극단주의자 파면법> 외에도 두 개의 법률이 추가로 위력을 발휘했다.

하나는 1956년 헌법재판소에서 극우(나치)와 극좌(공산당) 정당에 대해서 모두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달리 국수주의당, 떼법당, 반국가 정당이 발을 못 붙이게 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68년의 <긴급조치법>이다. 이 법은 재난 발생 시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모든 구제 수단을 집결하는 법적 근거일 뿐 아니라 ‘민주적 헌정 질서’를 내부적으로 위협하는 위험을 차단하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기민당 정부의 <공산당 위헌 결정>과 <긴급조치법>, 사민당의 <극단주의자 파면법>은 서독이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냉정하게 실용적으로 동독과 교류하면서 야금야금 동독을 뿌리에서 흔들어, 선의(善意)로 악의(惡意)를 이기는 3중의 보호막이 된다.

◇빌리 브란트의 정치적 성숙

바바라 클렘이 1973년 5월 찍은,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와 소련 국가원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첫 정상회담 장면. 화면 중심에 브란트가 있고 브레즈네프와 수행원, 통역들이 좌우에 서거나 앉아 사담을 나누고 있다
바바라 클렘이 1973년 5월 찍은,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와 소련 국가원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첫 정상회담 장면. 화면 중심에 브란트가 있고 브레즈네프와 수행원, 통역들이 좌우에 서거나 앉아 사담을 나누고 있다

빌리 브란트는 1913년 사생아 어머니에게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빌리 브란트는 가명이다. 1931년 실업고등학교(레알슐레 Realschule)를 졸업하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3년 외국으로, 주로 노르웨이로 12년간 떠돌아다니던 중에 쓰던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에른스트 칼 프람인데, 프람은 외할아버지의 성을 딴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성인이 되어 알았지만, 프람은 외할아버지도 아니다. 하여간 아버지 역할을 한 외할아버지 루드비히 프람은 8살 빌리 브란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다.

외할아버지가 근무하던 공장은 당시 파업 중이었는데, 어떤 감독관이 배가 고파 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에른스트에게 빵을 두 개 주었다. 에른스트는 한달음에 그 빵을 집에 들고 와서 자랑스럽게 외할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외할아버지는 크게 노했다.

“당장 그 빵을 돌려주어라! 선물이라구? 파업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어떤 선물도 받지 않는 거야. 우리는 적들로부터 매수당해서는 안 돼! 우리 노동자는 적선으로 달래는 거지가 아니란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하지 ‘선물’을 원하는 게 아니란다. 그 빵은 다시 갖다 줘라, 당장!”

빌리 브란트는 고등학교 때 태생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자연스럽게 사민당에 입당한다. 후에 나치가 사민당을 탄압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사민당의 격렬한 노선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브란트는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민당을 탈당하여 사회주의노동당(SAP)에 입당한다.

그러나 1937년 스페인 내전에 노르웨이 신문의 통신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의 공산당이 스탈린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음을 보고 공산당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다. 급진 사회주의자에서 온건 사회주의자로 완전히 돌아서는 데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맹이 결정적이었다. 1939년 극우와 극좌가 손을 잡는 것을 보고, 두 악마의 검은 계약을 간파하고 다시 사민당의 품안으로 들어간다. 

jayooilbo@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