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 극단주의자 파면법 [2]
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 극단주의자 파면법 [2]
  • 최성재 교육문화평론가
  • 승인 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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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극단주의자 파면법>이란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사민당의 성숙: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

빌리 브란트는
빌리 브란트는

독일 사민당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시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원론적 계급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노동자만 대표하는 정당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변신하지 않고는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브란트는 직감한다. 1959년 마침내 사민당은 고데스베르크 강령(Godesberger Programm)을 통해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 거듭난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사회주의가 그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기에 진정으로 정당한 정책을 펼치려면, 사회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해야 한다.”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싸움에서 중립은 불가능

지미카터와 빌리브란트,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싸움에서 중립은 불가능"
지미카터와 빌리브란트,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싸움에서 중립은 불가능"

1960년에 사민당의 외교정책도 획기적으로 바뀐다. 알량한 민족적 자존심을 꺾고 중립 노선에서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와 한편이 되는 서구 편입을 공식화한다. 빌리 브란트도 그렇고 사민당도 그렇고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적으로 업그레이드한다. 성숙하고 발전한다.

브란트는 1957년에 베를린 시장으로 당선되는데, 그는 당시에도 변방으로 전락한 서독의 한계를 절감하고, 미국의 하늘 아래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특히 1961년 소련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면서 동서독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케네디의 미국과 흐루시초프의 소련임을 분명히 깨닫는다.

공산 전체주의 소련과 자유민주 미국 사이에 중립은 있을 수 없고, 서독이 살고 동서독이 다시 하나 되려면 미국 편에 설 수밖에 없음도 분명히 깨닫는다. 그러면 아무 것도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무엇을?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동족끼리 만나는 것이다. 민간인끼리 교류하는 것이다.

◇자유평화통일의 밑거름이 된 동서독의 민간 교류

독일 통일 이전 빌리 슈토프 당시 동독 총리를 만난 빌리 브란트의 서독 연방
독일 통일 이전 빌리 슈토프 당시 동독 총리를 만난 빌리 브란트의 서독 연방

빌리 브란트는 수상이 되기 전 베를린 시장 시절에 이미 동서 베를린 간 민간 교류의 물꼬를 텄다. 베를린 장벽에 좌절하지 않고, 그는 1963년부터 인내심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기어코 동베를린과 4가지 통과협정을 맺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서베를린 사람들이 ‘마(魔)의 산’을 넘어갈 수 있었다. 당초 3만 건 정도를 예상했지만, 1963년 크리스마스에서 1964년 새해 연휴까지만 무려 120만 명의 서베를린 시민이 동독을 방문했던 것이다. 1965년부터 기민당의 아데나워도 연방 차원에서 연금 수령자인 동독 주민이 연간 100만 명씩 각자 100마르크 받고 4주간 서독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서 베를린 사이에 행하던 것을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한 것이다. 교류하되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라는 국가 정체성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일찍이 1962년 10월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이 막 구축되던 바로 그때에 공산주의의 허장성세를 꿰뚫어 보았다. 하버드대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서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저는 공산주의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없으며, 상호공존에 대한 소련의 요구를 약세(弱勢)의 표현으로 파악합니다.”

◇당총재 23년의 대기록

▲ 브란트총리의 그림자로 불리던 권터 기욤(좌). 슈타지 첩자였던 그는 서독 보안요원들에게 체포되면서 "난 동독시민이자 동독의 장교다, 그 점을 존중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 브란트총리의 그림자로 불리던 권터 기욤(좌). 슈타지 첩자였던 그는 서독 보안요원들에게 체포되면서 "난 동독시민이자 동독의 장교다, 그 점을 존중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1974년 빌리 브란트는 수상직에서 물러난다. 자신의 비서 기욤이 동독의 간첩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1972년 <극단주의자 파면법>의 부메랑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아니지만 자신의 비서가 동독 간첩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브란트는 책임지고 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당내 입지는 탄탄했다. 사민당 안의 라이벌 헬무트 슈미트에게 수상직은 물려주었지만, 당총재는 여전히 빌리 브란트였다. 기민당의 헬무트 콜 수상 시절에도 제1 야당의 총재는 여전히 브란트였다. 최종 학력이 고졸에 지나지 않았지만 7개 외국어를 구사하고 어떤 주제든 즉석에서 연설할 수 있었던 브란트의 부단한 노력에 따른 정치적 성숙과 지도자로서 발휘한 역량 덕분이었다. 1964년에서 1987년까지 무려 23년간 사민당 총재 자리를 지켰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기민당으로 정권이 바뀐 후에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브란트가 수상직에서 물러나던 1974년부터 독일 통일 2년 후인 1992년까지 외무장관으로 활약한 자민당의 디트리히 겐셔가 있었다.

현실적이었지만 낭만적이고 이상주의자적인 면도 간직했던 브란트는 핵무기라면 무조건 반대했지만, 냉철한 겐셔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현존하는 소련의 SS-20에 대해 미국의 퍼싱2를 서독에 배치함으로써 소련이 자멸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독일 통일의 쌍두마차 겐셔와 콜은 독일 통일의 아버지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더욱 현실적으로 한 단계 발전시켰던 것이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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