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과 최은희의 북한 탈출 [1]
신상옥과 최은희의 북한 탈출 [1]
  • 마이클 리
  • 승인 2018.1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IA 요원 마이클 리의 현대사 재조명
신상옥과 최은희
신상옥과 최은희

-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그들의 탈출기) -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와 나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기이한 인연으로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납북경위와 북한에서의 행적 그리고 성공적인 탈출에 대하여 글을 썼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종종 발견된다. 내가 지금부터 기록하는 내용은 그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 목격한 사실, 그리고 객관적 분석에 근거한 서술이다. (그리고 기밀 보안유지 때문에 그들의 탈출을 공작 지휘한 나의 역할은 공개할 수 없다.)

신상옥 감독의 본명은 신태익이고 함경북도 청진 태생으로 (1926.10.18-2006.4.11)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계의 거장이었다. 성격이 고지식하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 가장 천재적인 예술 감각을 구사한 인물이었다.

심훈의 장편소설을 각색하여 1961년에 개봉한 영화 <상록수>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으로 제작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고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박대통령과 신감독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했으나 견해 차이에 있어서는 서로 양보를 못하는 고집불통의 적수이기도 했다.

◇전태일 영화제작으로 틀어진 박정희와 신상옥

1962년 5월 16일 저녁, [제9회 아시아 영화제] 폐막행사가 개최된 서울 시민회관. 박정희(1917-1979)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행사에 참석,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제작자인 신상옥(1926-2006) 감독에게 금상 트로피를 직접 수여했다. 신상옥 감독은 부인 최은희(1926-)씨와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최씨는 남편이 트로피를 받기 전에 박 의장에게 아름다운 자태로 절을 올렸다. 이 사진은 ‘The Korea Information Service’(대한공론사: 1953년 8월에 창립된 해외홍보기관으로 영자 신문 및 해외홍보용 간행물 등을 발행하다가 1978년 9월에 폐간)가 발간한 영문 계간지 [Korea Photo News](1962년 여름호)에 등장한다.
1962년 5월 16일 저녁, [제9회 아시아 영화제] 폐막행사가 개최된 서울 시민회관. 박정희(1917-1979)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행사에 참석,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제작자인 신상옥(1926-2006) 감독에게 금상 트로피를 직접 수여했다. 신상옥 감독은 부인 최은희(1926-)씨와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최씨는 남편이 트로피를 받기 전에 박 의장에게 아름다운 자태로 절을 올렸다. 이 사진은 ‘The Korea Information Service’(대한공론사: 1953년 8월에 창립된 해외홍보기관으로 영자 신문 및 해외홍보용 간행물 등을 발행하다가 1978년 9월에 폐간)가 발간한 영문 계간지 [Korea Photo News](1962년 여름호)에 등장한다.

박대통령과 신감독 사이를 불편하게 만든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그것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에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평화시장 봉재공장 재봉사로 일하고 있던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사건이었다. 그는 혹사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분노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22살의 새파란 나이에 목숨을 던졌다.

박대통령은 그 당시에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을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후복구도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나라 경제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었다. 사회 구석구석에 비리와 부조리가 지병처럼 도사리고 있을 때인데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노동쟁의와 노사분규의 촉매제가 되었다.

전태일 분신을 다룬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전태일 분신을 다룬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그런데 이 사건을 주제로 신감독이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불난 집 앞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격이 되었고 박대통령은 신감독을 설득하고 영화제작을 만류하려 하였으나 두 분이 팽팽하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드디어 박대통령은 신감독의 영화제작 영업 감찰을 박탈하고 말았다.

그 무렵 신감독은 신인 여배우 오수미와 1973년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아들 <상균>과 딸 <승리>를 낳았으며 불임체질의 최은희 여사와는 1976년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신감독은 국내에서 영화제작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최여사는 안양 예술고등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은행 빚은 누적되고 고전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슬럼프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북한의 김정일이 들었다. 김정일은 영화광으로서 수천 개의 영화필름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최고 영화인으로 알려진 신상옥과 최은희를 북으로 납치해갈 생각을 품게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김정일의 야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사연이 있다. 1972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을 드나들며 남북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을 때 북에서는 1972년 5월에 부수상 박성철이 김일성 밀사로 서울에 왔다. 그가 돌아갈 때 중앙정보부는 흑백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필름을 선물로 주었다.

◇김정일,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보고 납치 결심

소설을 원작으로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 한 '사랑손님과 어머니'. 구글이미지
소설을 원작으로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 한 '사랑손님과 어머니'. 구글이미지

그가 평양에 돌아간 후에 김정일이 이 영화필름을 보고 신상옥과 최은희를 북으로 데려오라고 대외연락부 부부장 임호군에게 지시하였다. 북한의 영화는 노동당의 선전선동을 위한 도구로 제작되기 때문에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또 예술영화를 제작할만한 사회적 정신구조나 인재가 없는 상황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같은 애틋하고 순결하며 전통적으로 한국적인 순수애정영화를 본 김정일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그 당시 노동당의 선전선동담당 비서였다.

최은희의 본명은 최경순이고 (1926.11.20-2018.4.16)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7년에 영화 <새로운 맹세>를 통하여 영화배우로 데뷔 했다. 6.25사변 때에는 북으로 납치되어 청천강 부근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고초를 겪었다.

1954년에 영화감독 신상옥과 결혼하고 1960년대 1970년대 영화계 황금기에 독보적인 인기를 끄는 배우로 활약하였다. 그가 출연한 작품 ‘성춘향’,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벙어리 삼룡이’에서 보여준 그의 한국적 미모와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홍콩의 대남공작원 이상희

김정일과 최은희 나란히 걷고 있다. 구글사진

그러나 그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불행의 그림자가 그를 덮치기 시작하였다. 1976년에 신감독과 이혼을 하고 안양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1978년 정월 연초에 홍콩에서 <이상희>라는 교포가 (당시 52세) 최은희를 방문하였다. 그때 최여사를 포함하여 한국사람 그 누구도 이상희가 북한이 홍콩에 심어놓은 대남 공작원 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상희는 최여사에게 접근하여, 홍콩의 유력한 재벌가가 운영하는 홍콩영화사가 <양귀비>라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최여사와 합작하기를 원하며 일이 잘되면 홍콩영화사가 운영하는 현지 예술학교와 최여사가 운영하는 안양 예술고등학교가 자매결연을 하게 된다고 진언했다.

이 말을 들은 최여사는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서 살길을 열어주신다고 믿고 아무 의심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상희를 따라 1월 11일에 홍콩에 도착하여 <푸라마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자기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재벌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희의 말에 의하면 그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출타중인데 2-3일내로 돌아온다고 했다.

<2편에 계속>

jayooilbo@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