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寸鐵)이란 이런 것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서정춘(1941~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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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寸鐵)’이란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를 가리키는데 독립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다. 보통은 사자성어 촌철살인(寸鐵殺人)을 쓴다. 짧은 쇠붙이로 사람을 죽일 수 있듯, 한 마디 말로 남을 감동하게 하거나 허점을 찌를 수 있다는 뜻이다. 퇴고를 거듭하다가 살인(殺人)을 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차라리 제목을 ‘빨랫줄’로 했으면 어땠을까. 물론 빨랫줄은 촌철이다, 라는 은유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시집 ‘물방울은 즐겁다’에 실려 있다. 서정춘 시인은 평생 물방울만 그리다 작고한 김창렬 화백처럼 물방울에 천착한다. 이 작품에도 그런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비가 와서 걸리면 / 떨어질까 말까 / 물방울은 즐겁다’. 빨랫줄에 걸린 빗방울에서 떨어질락말락 줄 위에서 재주부리는 광대가 연상되는 바, 실수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광대는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구경꾼들을 긴장시킨다.

다시 제목에 집중해보자. 촌철 같은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빨랫줄은 간결함의 상징이다. 하늘아래 / 이쪽과 저쪽에서 / 당겨주는 힘 /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 바람이 옷 벗는 소리 / 한 줄 뿐이다. 빨랫줄이 나눈 이쪽과 저쪽의 하늘에 관해 할 말은 무궁무진할 터인데, 가령, 삶과 죽음, 좌와 우,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 그러나 서정춘 시인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로 요약할 뿐이다. 그것은 이념이나 사상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순수만을 추구하겠는 것. 그렇듯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호흡으로 언어를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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