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한국전쟁 아픔 간직한 부산

1950년 8월부터 1000여 일간 임시수도
비탈길 판잣집 곳곳 치열했던 삶의 흔적
우물물 길어서 오르던 가파른 ‘168계단’
‘초량 이바구길’따라 가슴 아픈 이야기들
알록달록 감천문화마을은 대표 관광지로
미군 통조림 넘치던 부산 최대 부평시장
영도다리 건너 깡깡이 예술마을서 인생샷

영도 포구.
영도 포구.

부산이 안보관광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들은 부산을 해운대와 광안리를 품은 바다의 도시, 돼지국밥과 밀면, 싱싱한 수산물 등 맛있는 먹을거리로 기억한다. 하지만 부산은 한국전쟁의 역사와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보 관광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2달 뒤 부산은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부산이 남한의 최후 방어선이 되면서 전국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 부산의 인구는 40만 명이었지만,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인구는 100만 명까지 늘어났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기간을 제외한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1,000여 일간 임시수도였다.

피란민들이 만든 달동네

피란민들이 몰려들다 보니 당연히 살 곳이 모자랐다. 게다가 부산은 산이 많은 도시다. 오갈 곳 없는 피란민들은 부산항과 부산역에서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 판잣집을 짓고 달동네를 형성했다. 이때 산복도로가 함께 만들어졌다. 지금 부산의 산복도로는 대개 이 시기에 닦인 것이다. 피란민들은 비탈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복도로를 따라 집을 지었고 이 집을 터전 삼아 삶을 이어갔다. 낮에는 부두나 역에서 일하고 해가 지면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동구 초량동은 부산항과 부산역에서 가깝다. 차로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피란민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 지금도 그 시절 피란민의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데, 바로 ‘168 계단’이다. 168개의 계단이 있어 이렇게 불린다.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까마득한 그 높이에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그 끝을 볼 수 있다. 1950년대, 이 가파른 계단을 마을 여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다고 한다. 계단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 항구에서 일했고 밤이면 피곤한 몸을 이끌며 이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이야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고단하고 험난하기만 한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수십 년을 거주한 동네 주민도 두세 번은 쉬어야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이 계단 옆에 다행히 2016년 모노레일이 생겼다.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 서면 부산역과 부산항, 북항대교와 영도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내려다보인다.

168계단.
168계단.

168계단을 중심으로 ‘초량 이바구길’이 만들어져 있다. 부산역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바로 시작한다. ‘이바구’는 이야기란 뜻의 부산 사투리. 겨우 1.5~2km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150km보다 더 긴 부산 사람들의 곡진한 생과 그들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 가슴 먹먹해지는 바다 풍경은 덤이다. 1922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병인 백제병원 건물, 부산 최초의 창고로 쓰였던 남선창고터,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인 초량교회 등이 초량 이바구길에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감천문화마을 역시 피난민들이 만든 계단식 마을이다. 1950년대 피난민의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작해 지금의 산자락 빼곡하게 들어선 계단식 마을이 만들어졌다.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지어진 파스텔톤의 집들과 미로 같은 골목길이 ‘한국의 마추픽추’라고 불린다. 마을에 입주한 예술가들의 공방에서 다양한 공예 체험도 가능하다.

감천문화마을의 압권은 다채로운 색감의 지붕과 벽이다. 감색, 레몬색, 푸른색, 오렌지색, 갈색, 초록색 등 색색으로 칠해놓은 집의 벽들은 온갖 빛깔의 지붕과 어울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스의 미로와도 같은 골목 분위기를 풍긴다. 벽마다 그려진 문과 창문은 또 어떤지. 크고 작은 창문이 어우러져 있고, 알루미늄으로 만든 창문과 약간 기울어진 나무 창문이 보기 좋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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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대표하는 시장도 한국 전쟁을 거치며 커졌다. 부산은 시장을 테마로 해 여행 코스를 잡아도 될 정도로 시장이 많다. 170여 개의 재래시장이 있다. 부평시장은 부산 최대의 시장이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부평시장에는 통조림을 비롯한 미군들의 군수 물자가 흘러들어 왔고 그래서 일명 ‘깡통시장’으로 불렸다. 그러다 1965년 한일 수교가 맺어지면서 일제 워크맨을 비롯한 전자 제품, 코끼리밥통, 화장품, 양주 등이 부평시장으로 밀려들었다. 당시에는 서울에 사는 연예인들도 물건을 사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부평시장에서 다리만 넘으면 영도다. 영도하면 떠오르는 영도 다리는 일제가 1934년 군수물자 동원 목적으로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륙교이자 일엽식(一葉式) 도개교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만남의 광장으로 애용됐다.

부산 서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부평시장.
부산 서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부평시장.

지금은 깡깡이 예술마을로 불리는 대평동 옛 도선장 주변 동네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조선 산업이 시작된 곳이다. 또한 바다를 배경으로 남포동 방면의 육지를 바라보고 있는 지형이어서 1970년대에는 수리 조선업 메카로 자리 잡게 됐다. 배를 수리하려면 배 아래쪽에 붙은 조개와 이물질을 제거하고 녹을 벗겨내야 하는데, 온종일 이 작업을 하는 망치 소리가 동네에 가득했다고 해 깡깡이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도 조선 업체 12개가 운영 중이다.

2000년대 조선업이 쇠퇴하면서 쇠락하던 마을은 2015년 문화예술형 도시 재생 프로젝트와 함께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예인선을 개조해 꾸민 선박 체험관, 옛 영도 도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항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깡깡이 유람선’, 방문객들이 시계, 장식품 등을 조립해 볼 수 있는 ‘깡깡이 마을 공작소’ 등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

깡깡이마을 곳곳에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33개 예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마을 초입에 자리한 안내 센터에서 배포하는 리플릿에 예술작품 위치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이들 작품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깡깡이마을 역사를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된다. 구름 모양 가로등과 총천연색 벽화 등은 ‘인생샷’ 배경으로 손색이 없다.

지금은 부산에서 가장 ‘핫’한 여행지로 꼽히는 흰여울문화마을은 과거 한국전쟁 이후 갈 곳 없던 피난민들이 가파른 절벽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예전에 봉래산 산기슭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내렸는데, 물살이 빨리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해 도로를 ‘흰여울길’이라고 불렀고 마을 이름도 이 도로 이름을 따라 붙였다고 한다.

곧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부산으로 피서를 떠날 것이다. 우리가 찾은 부산 여행지에 이런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부산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 여행정보 ]

밀면.
밀면.

부산에서 가장 먼저 맛봐야 할 음식이 밀면과 돼지국밥이다. 돼지국밥은 돼지고기를 삶은 뽀얀국물에 야들야들한 돼지고기를 뜸뿍 넣고 양념에 무친 부추를 넣어 먹는다. 해운대 양산국밥(051-703-3544) 추천. 밀면은 부산식 냉면이다. 전쟁 직후 이북 출신 피난민들이 메밀과 녹말이 없어 밀가루로 만들어 먹던 면요리가 밀면의 시작이다. 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은 면발과 감칠맛 나는 육수가 특징이다. 부산역 앞 황산밀면(051-469-6918)이 맛있다. 깡깡이 예술마을에 자리한 복성만두(051-412-9468)는 50년 노포. 직접 만든 군만두와 만두백반이 유명하다. 만두백반은 서울에서 보기 힘든 음식. 만둣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 초량 옹골찬(051-462-7002)은 ‘낙곱새’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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