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김일성, 날조된 경력 진상과 ‘ㅌ·ㄷ’ 실체
소년 김일성, 날조된 경력 진상과 ‘ㅌ·ㄷ’ 실체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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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혈통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2]
김일성(본명 김성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떠받치는 가장 큰 이데올로기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사’이다. 물론 이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덩어리이다. 북한은 소년기 김일성(본명 김성주)의 경력부터 날조하고 있다.

북한이 1952년 김일성의 경력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발표한 <김일성 장군 약전>에 따르면 김일성은 14세 때인 1926년 만주의 길림에 있는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 그 해에 중국 공산당의 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일성은 1926년에 육문중학교에 입학한 사실이 없다. 설혹 입학했다하더라도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이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결성되었지만 그 조직이 만주에까지 미친 것은 1928년 11월 이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1968년에 나온 책을 보면 육문중학교 입학과 공산당 청년 조직 가입 일자가 1926년이 아니라 1927년으로 변경되었다.

◇27년 中共 상부조직 없던 만주서 김일성이 共靑조직 만들 수 없어

길림육문중학교 당시 김성주
길림육문중학교 당시 김성주

또 김일성은 공산당 청년 조직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이를 조직했다고 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공산당의 조직 원칙은 하향식이다. 상부 조직이 없으면 조직할 수 없다. 1927년은 아직도 중국 공산당의 만주 지역 상부 조직이 없었던 때다. 때문에 김일성이 길림에서 혹은 육문중학교에서 공산 청년 단체를 조직했다는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다.

1968년에 나온 책을 보면 김일성은 1926년 남만주의 화전에 있는 한인들의 민족주의 교육 기관인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거기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조직했다고 한다. 또 화성의숙의 교육 내용이 케케묵은 민족주의 교육이어서 김일성은 곧 그만두고 새 길을 찾아 무송의 집으로 돌아가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거짓말이다.

1926년에 김일성이 화전의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은 사실이다. 화전은 우리 민족주의 독립 운동 단체인 정의부의 소재지였다. 이 정의부에서 화성의숙을 설립해 경영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아들 김일성을 화성의숙에 보냈다. 얼마 안 가 김일성이 이 학교를 그만 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민족주의 교육이 싫어서였다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이다. 이는 레닌이 16세 때에 종교에 회의를 느껴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흉내 낸 것이다. 김일성이 이 학교를 그만둔 진짜 이유는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김형직은 공산주의를 아주 싫어하는 반공주의자였다. 한의사였던 그는 공산주의자에게는 약을 지어주는 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김형직은 원한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사망했던 것이다. 1926년 초여름으로 김형직의 나이 32세 때였다. 그래서 소년 김일성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무송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은 실제로 14살이던 1926년에 무엇을 했을까? 이 시기에 소년 김일성에게는 부끄러운 기록이 두 개 있다. 무송에 와 있던 김일성은 마골이란 공산 폭력도당의 소년대원이 되었다. 당시 만주의 한인 사회에는 공산주의 운동이 차츰 성해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동포 사회에서 조금 여유가 있는 한인 집이면 무조건 자본가 계급이고 반동분자라며 인명을 살상하고 금품을 강탈하곤 했다. 물론 중국인 집도 털었다.

◇14살 김일성, 마적떼 마골의 소년대원

주마골이 이 공산 폭력도당의 두목이었다. 이들의 폭력 활동은 마적 떼와 같았다. 마골의 행패가 만주 동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민족주의 독립 운동 단체인 정의부에 알려졌다. 정의부는 이종락 소대장 휘하의 무장 부대를 보내 마골 일당을 토벌했다.

이때 이종락은 어린 김일성을 붙잡았다. 이종락은 공산주의자의 테러에 죽은 김형직의 아들이 몹쓸 공산 폭력단에 끌려다니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김일성을 봉천으로 데려다가 평단중학교에 입학시켜주었다. 그러나 마골 일당의 악행에 젖어 있던 소년 김일성은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그래서 얼마 안가서 퇴학당했다.

북한은 이런 김일성의 부끄러운 경력을 감추려고 이 시기 여러 가지 청소년 단체를 김일성이 조직했다고 왜곡 선전하고 있다. 1981년 나온 <조선전사>에서는 이 시기 소년 김일성이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이 현대사의 시작이라고 거창하게 주장하고 있다.

일명 김성주가 조직했다는 '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과정을 보여주는 그림

1980년대 한국의 386그룹들은 이 날조의 역사 ‘ㅌ·ㄷ’를 그대로 믿고 이것을 롤 모델로 학생 운동을 조직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한국의 정치권과 교육계, 역사학계에 ‘ㅌ·ㄷ’를 그대로 믿는 사람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1968년에 나온 책에 김일성은,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결성했고 다음해에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고 또 ‘공산주의 청년단’을 조직했다고 쓰여 있다. 1971년에 나온 책에서는 ‘공산주의 청년단’이 아니고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이었다고 바뀐다.

또 1981년에 나온 <조선전사>에는 1926년의 단체 조직이 하나 더 늘어 무송에서 ‘백산청년동맹’을 조직했다고 썼다. 그 결과가 김일성의 항일 무장 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 결성으로 이어지고 이 조선인민혁명군이 수많은 항일 유격 투쟁을 벌여 1945년 8월 조선 해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1926년 ‘ㅌ·ㄷ’의 조직이 현대사의 시작이요 조선 해방의 새벽종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역사가 해방 후 30여 년 동안 한 번도 언급되지 않다가 왜 1981년 <조선전사>에 이르러 처음 나왔을까? 자꾸 거짓말을 꾸미다보니 점점 더 크고 멋있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북한의 선전 수법인 것이다.

◇ ‘ㅌ·ㄷ’, 신화에나 나올법한 소설 같은 줄거리

이 시기 김성주의 어머니였던 강반석이 아버지 김형직의 유산인 두 자루의 권총을 김성주에게 주면서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을 적극 도왔다는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이제 ‘ㅌ·ㄷ’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북한에서는 1926년 10월 17일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그날 14세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반일 민족 해방 투쟁을 벌이기 위해 ‘ㅌ·ㄷ’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면서 해마다 10월이 되면 ‘ㅌ·ㄷ 결성 몇 돌’ ‘수령님의 천재성’ 운운하면서 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 ‘ㅌ·ㄷ’야말로 완전히 날조된 역사다. 이는 북한이 만들어낸 자체 간행물과 역사 기록물을 연대별로 점검해봐도 알 수 있다.

김일성의 ‘ㅌ·ㄷ’ 이야기는 신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소설 같은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1926년 김일성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시대별로 어떻게 그 내용이 변해 왔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6년에 간행된 <우리의 태양>과 <영웅 김일성 장군>에서는 1926년도에 김일성이 ‘ㅌ·ㄷ’를 결성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또 1949년에 간행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ㅌ·ㄷ’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육문중학교에 재학했으며 중국 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라고만 되어 있었다.

1952년에 <김일성 장군 약전>을 내놓을 때도 아직 ‘ㅌ·ㄷ’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단지 ‘중국 공산청년회 가입’에서 ‘중국’이란 말을 빼고 그냥 ‘공산주의 청년단’으로 바꾸어 놓았다. 1958년판 <조선 민족 해방 투쟁사>에 와서는 ‘공산주의 청년단’이란 명칭이 ‘공산 청년 동맹’으로, 육문중학 재학이 입학으로 바뀐다.

1961년 간행 <조선 근대 혁명 운동사>에 와서는 “화성의숙에 입학했다가 곧바로 자퇴하여 육문중학교에 입학,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했다”라고 바뀐다. 1968년 판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와서는 ‘화성의숙에 입학’으로만 고친 후 육문중학교 입학은 한 해 늦추어 1927년으로 바꾼다. 이 책에 와서야 비로소 ‘ㅌ·ㄷ’를 조직했다는 말이 최초로 나온다. 즉 화성의숙에서 ‘ㅌ·ㄷ’를 조직했고 곧바로 중퇴한 뒤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고 덧붙였다.

1971년 판 <력사 사전>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수록된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단지 여름에 화성의숙에 들어갔고 가을에 ‘ㅌ·ㄷ’를 조직했다고 썼다. 1973년 판 <정치 사전>에는 그 날짜까지 규정했다. “1926년 6월에 아버님이신 김형직 선생께서 서거하신 후 화성의숙에 입학, 10월 17일에 ‘ㅌ·ㄷ’를 조직, 화성의숙을 중퇴한 뒤 12월 15일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라고 쓴 것이다.

북한은 왜 이렇게까지 말을 바꾸어야 했을까. 그 이유는, 김일성의 가족사를 민족의 역사로 자리매김한 1981년 판 <조선전사>에서 현대사의 시발점을 소위 김일성의 ‘ㅌ·ㄷ’ 결성일이라는 1926년 10월 17일로 잡기 위해서이다.

◇1945년 평양에 돌아온 33세 김일성, ‘ㅌ·ㄷ’ 언급도 안해

광복후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이 개선문에서 연설하고 있다.
광복후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이 개선문에서 연설하고 있다.

김일성이 1945년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 33세였다. 북한의 말대로 ‘ㅌ·ㄷ’가 그렇게 중요하고 위대한 사건이었다면 30대의 김일성이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북한은 조선노동당의 뿌리를 ‘ㅌ·ㄷ’ 결성에 둔다고 공언하고 있다.

1973년 판 <정치 사전> 1146쪽을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 활동의 개시, 이는 조선 인민의 진정한 혁명 력사의 첫불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ㅌ·ㄷ’의 결성을 현대사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면 ‘중국공산청년회가 ‘공산주의 청년단’으로 다시 ‘공산청년동맹’으로 되었다가 ‘ㅌ·ㄷ’로 명칭이 바뀐 사유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ㅌ·ㄷ’와 ‘중국공산청년회’를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또 조선 노동당의 뿌리는 ‘중국공산청년회’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입만 열면 주체 역사를 외치고 있다. 그러니 자신들의 뿌리가 중국공산청년회에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양 발행 <조선전사> 16권 69쪽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ㅌ·ㄷ’를 조직 지도하신 데 대한 자료’라는 설명이 붙은 글이 있다. 여기에는 최형우가 쓴 <해외 조선 혁명 운동 소사>란 책의 28쪽에 나오는 ‘9. ㅌ·ㄷ와 김일성’ 부분이 복사되어 실려 있다. 또 같은 것이 김일성 회고록 1권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집필자인 최형우는 1930년 전후 길림성 양덕현 오가자에서 김일성과 함께 이종락 밑에 있었던 사람으로 삼성학교 교원이며 김일성의 연장자였다. 최형우는 6.25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전쟁이 끝나고 최형우를 처형한 지도 30년이 지난 1980년대에 최형우가 쓴 <해외 조선 혁명 운동 소사>의 인용을 <조선전사>와 <김일성 회고록>에 올렸을까. 1990년대 들어와서는 최형우의 유가족을 불러서 환대했다는 기록이 로동신문에 나온다.

◇최형우의 <해외 조선 혁명 운동 소사> 연대 잘못 기록

최형우가 1945년에 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표지, 최형우는 이 책을 처음에는 김일성을 미화하기 위해 썼으나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 관련 내용을 더 부풀리다 보니 초기 이 저작내용과 맞지 않게 되었다. 결국 북한당국은 이 어긋남을 없애기 위해 최형우를 처형했다.
최형우가 1945년에 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표지, 최형우는 이 책을 처음에는 김일성을 미화하기 위해 썼으나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 관련 내용을 더 부풀리다 보니 초기 이 저작내용과 맞지 않게 되었다. 결국 북한당국은 이 어긋남을 없애기 위해 최형우를 처형했다.

그러나 최형우의 <해외 조선 혁명 운동 소사>를 읽어보면 연대가 잘못 기록된 곳이 한 두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최형우가 오로지 자신의 기억과 주관적인 견문만을 바탕으로 기록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종락 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김성주(김일성)에게 ‘一星’이란 아호까지 지어준 최형우는 바로 그 소년 김성주가 북한의 실력자로 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최형우는 <해외 조선 혁명 운동 소사>를 쓸 시기인 1945년 무렵, 북한에 자신이 알던 김일성이 금의환양해서 등장하자 ‘ㅌ·ㄷ’와 김일성을 좀 과장해 높이 평가하는 글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ㅌ·ㄷ’ 운동이란 중국 공산당 지도 아래 벌어진 민중 운동을 일컫는 보통명사였지 김일성 독점의 고유명사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ㅌ·ㄷ’ 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오가자 일대에서 벌인 ‘ㅌ·ㄷ’ 운동은 중국의 공식 기록에 오를만한 것도 못되는, 만주의 일개 벽촌에서 벌어진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의 일개 혁명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최형우가 쓴 책 중에는 북한이 꾸며 만든 공식 기록과 전혀 상반되는 기록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최형우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기록과 어긋나는 기록을 하나 예로 들면 <김일성 회고록>은 이종락을 김일성의 부하로 묘사하고 있는데 최형우의 책에서는 이종락이 김성주의 상사로 되어 있다.

북한은 김일성에게 투옥 경력도 만들어 붙였다. 그런데 김일성의 투옥 시기는 왔다갔다 한다. 해방 후 초기에는 1929년에 두 달 동안 만주의 길림 감옥에 투옥됐다고 했다. 그러나 1952년 처음으로 김일성의 경력을 공식 발표할 때는 1927년에 투옥되어 1928년에 석방됐다고 했다. 그 후 또 바뀌어 1929년 가을에 투옥되었다가 1930년 봄에 나왔다고 했다. 진짜 김일성이 투옥 경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시기가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다.

김일성의 공산당적도 갈팡질팡한다. 1952년 최초의 공식 발표 때는 1929년에 육문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만특별구의 공산주의 청년단 서기가 되었다가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육문중학교는 졸업하지 못하고 1931년에 중국 공산당 동만특별구의 공산주의 청년단 비서가 되었다가 그 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것으로 바뀌었다.

◇중국 공산당 입당 기록 아예 지워

그러나 1968년부터는 공산주의 청년당 서기니 비서니 중국 공산당 입당이니 하는 것이 다 사라졌다. 18세의 김일성은 1930년 여름에 조선 공산당 창건 방침을 제시하고 이래로 오로지 조선 공산당의 조직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된다. 공산주의 운동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1국 1당’의 원칙이 있다. 전자는 전 세계의 노동 계급은 단결하여 민족과 국가의 이익에 앞서 전 세계 노동 계급의 공통 이익을 위해 세계 공산주의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혁명의 참모부는 하나여야 하므로 각국의 공산당은 하나만 있어야 하며 타국의 공산주의자라도 한 나라에 오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그 나라의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중국 만주에 살았으니 중국 공산당이나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바꾸었다.

물론 북한이 1968년 나온 책에 이렇게 쓰게 된 데는 그들의 생존과 관련된 절박한 사연이 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이 영토 분쟁을 하고 있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의지할 데를 잃고 스스로 힘으로 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북한은 이러저런 이유로 김일성의 경력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독자적으로 일한 것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소년 김일성의 경력은 사실과 관계없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집단 창작 소설’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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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

The young Kim Il-sung, the reality of fabricated careers and "ㅌ.ㄷ"

Young-Jae Choe Journalist

Kim Il-Sung (born Kim Song-Ju)

The largest ideology that supports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is Kim Il-sung's history of anti-Japanese armed struggle. This obviously is a fabrication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North Korea fabricates the career of Kim Il-sung (born Kim Song-ju) since early life.

Accroding to "General Kim Il-sung's Short Biography" which was the first time North Korea officially introduced Kim Il-sung's career, Kim Il-sung entered Yuwen Middle School in Jilin, Manchuria, in 1926 when he was 14, and that year, he joined the Chinese Communist Youth Union. However, it is not true that Kim Il-sung entered Yuwen Middle School in 1926. Even if he did enter the school, he could not join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because the Chinese Communist Party was organized in July of 1921 in Shanghai but was expanded to Manchuria not until November of 1928. In a book published in 1968, the dates of his entrance to Yuwen Middle School and his joining of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have been changed from 1926 to 1927.

Kim Song-Ju

Moreover, it was said that Kim Il-sung organized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rather than just joining it. This is also false. The communist party has a top-down organizational principal. If there is no upper part, nothing can be organized. 1927 was when the Chinese communists' upper system did not exist in Manchuria yet. Therefore, the statement that Kim Il-sung organized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in Jilin or Yuwen Middle School is not valid.

In a book published in 1968, Kim Il-sung entered Hwasungeuisuk, a Korean nationalist educational institution in Hwajeon, Southern Manchuria, in 1926 and organized the Down-With-Imperialism Union (DIU or "ㅌ.ㄷ") there. According to the book, Hwasungeuisuk had an old-fashioned nationalist education system, so Kim Il-sung soon dropped out and also organized the New Day Youth Union after returning home in Musong, searching for a new life. Both stories about the DIU and the New Day Youth Union have been fabricated.

The fact that Kim Il-sung entered Hwasungeuisuk in Hwajeon in 1926 is true. Hwajeon was where Jeonguibu, a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 was located. Jeonguibu founded and was managing Hwasungeuisuk. Because Kim Hyung-jik was a nationalist, he sent his son, Kim Il-sung, to Hwasungeuisuk. The statement that Kim Il-sung immediately dropped out is also true. However, the true reason of the dropout was not his dissatisfaction at the nationalist education system. This mimicked Lenin not going to church because he had doubts about religions at the age of 16. The true reason Kim Il-sung dropped out was his father Kim Hyung-jik's death.

Kim Hyung-jik was an anti-communist who detested communism. Kim Hyung-jik, as a Korean medicine doctor, even rejected to write a prescription to a communist. This caused his death in June 1926 due to communists' terror. This was when he was 32 years old, during the early summer of 1926. Therefore, the young Kim Il-sung had no other choice but to drop out of Hwasungeuisuk and return to Musong.

What would Kim Il-sung actually have done in 1926 when he was 14? He has two embarrassing records from this time. When he was in Musong, he became a youth member of a communist violent gang named Magul. The communist movement was gradually expanding in the Korean society of Manchuria at the time. Communists robbed money and valuables from somewhat wealthy Korean households and even killed or wonded them, saying they all are capitalist classes and reactionary.

Jumagul was the boss of this communist violent gang. Their violent activities were just like an enraged horse-lord marauder's. Magul's violence became known to Jeonguibu, a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 that was in charge of peace and order of the Korean society in Manchuria. Jeonguibu sent an armed unit under the platoon leader Lee Jong-rak, and suppressed a group of Magul members. At the time, Lee Jong-rak grabbed the young Kim Il-sung, and sympathized with the son of Kim Hyung-jik who was killed from communists' terror being dragged by a bad communist violent gang. Lee Jong-rak took Kim Il-sung to Bongcheon and let him enter Pyongdan Middle School. However, Kim Il-sung was expelled from school before long, because he could not go in for his studies as he was tainted with violent activities of Magul.

North Korea propagandizes that Kim Il-sung has organized various youth organizations during this period to cover such embarrassing acts of his. "Joseon's Warriors" published in 1981 grandly described the Down-With-Imperialism Union (DIU), which the young Kim Il-sung of the time organized, as the beginning of the modern history. The 386 generation of Korea during the 1980's believed in the fabricated history of the DIU and organized student movements based on it. Unfortunately, there are still many Korean people in the fields of politics, education and academic history who believe in the DIU just as North Korea propagandized.

According to a book published in 1968, Kim Il-sung organized the New Day Youth Union in Musong, and the Anti-Imperialism Youth Union as well as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A book published in 1971 changes the name of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to "The Joseon Communist Youth Union." Additionally, in "Joseon's Warriors" published in 1981, there is an additional association called the Baeksan Youth Union which Kim Il-sung formed in 1926. It states that this union resulted in the organization of the North Korean People's Revolutionary Armed Forces which was Kim Il-sung's anti-Japanese armed struggle forces. It also says, as a result, the North Korean People's Revolutionary Armed Forces caused the independence of Joseon in August, 1945, through numerous anti-Japanese guerilla struggles, and thus, the DIU from 1926 is the starting point of the modern history and the origin of the independence of Joseon.

Then, why has such significant history never been mentioned during the first 30 years after the liberation, but suddenly appeared in "Joseon's Warriors" from 1981? North Korea used their propaganda trick of repeatedly coming up with greater and more impressive lies as more things get fabricated.

Now, let's study more about the DIU.

North Korea considers October 17, 1926 the starting point of the modern history. They say, on this day, the 14-year-old Kim Il-sung formed a secret association called the DIU to struggle for the national independence. Every October, North Korea throws festivals to celebrate the anniversary of the DIU and the Dear Leader's genius. The DIU is a complete fabrication of the history, and it can be shown by simply checking North Korea's self-published publications and their historical records in chronological order.

Kim Il-sung's DIU story consists of fictional elements that are similar to elements of myths. It is necessary to review how the records on Kim Il-sung's achievements in 1926 have changed through each period. "Our Sun" and "The Hero, General Kim Il-Sung" published in 1946 never mentioned Kim Il-sung's formation of the DIU. “History of Joseon National Independence Armed Struggle" published in 1949, did not mention the DIU, either. It only said, "He went to Yuwen Middle School and joined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When publishing "General Kim Il-sung's Short Biography" in 1952, they didn't mention the DIU yet. It just removed "Chinese" from "joined the Chines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and changed to "joined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The 1958 edition of “History of Joseon National Independence Armed Struggle" switched the name of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to "the Communist Youth Union," and also changed "attended Yuwen Middle School" to "entered Yuwen Middle School." "History of Joseon's Modern Revolution Movement" published in 1961 rechanged it to "entered Hwasungeuisuk and soon dropped out, then entered Yuwen Middle School, and joined the Communist Youth Union." The 1968 edition of "The Nation's Sun General Kim Il-Sung" changed it to "entered Hwasungeuisuk" and the entry year to Yuwen Middle School was postponed for 1 year to 1927. This book finally mentioned his formation of the DIU, and it added that he formed the DIU in Hwasungeuisuk and after his instant dropout, organized the New Day Youth Union in Musong.

The 1971 edition of "History Dictionary" is very similar to "The Nation's Sun General Kim Il-Sung." It only included that he entered Hwasungeuisuk in the summer and organized the DIU in the fall. The 1973 edition of "Politics Dictionary" even provided specific dates: "After his father Kim Hyung-jik died in June 1926, Kim Il-sung entered Hwasungeuisuk, organized the DIU on October 17, and then formed the New Day Youth Union on December 15 after leaving Hwasungeuisuk."

Why did North Korea have to repeatedly make these many changes? The reason is, in the 1981 edition of "Joseon's Warriors," which established Kim Il-sung's family background as the national history, the beginning of the modern history, the so-called date of Kim Il-sung's DIU organization, must be October 17, 1926.

When Kim Il-sung returned to Pyongyang, he was 33 years old. If the DIU was such an important and significant event, as North Korea claimed, how could he not remember it during his thirties? North Korea declares Joseon Labor Party has a root in the organization of the DIU. On page 1146 of the 1973 edition of "Politics Dictionary," it says "The start of our great leader Kim Il-sung's revolutionary acts was the origin of North Korea's revolutionary history." If the formation of the DIU is considered the starting point of the modern history, the reasons for repeatedly changing the name of "the Chines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to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to "the Communist Youth Union" to finally "the DIU" must be explained.

If that isn't possible, the DIU equates to the Chinese Communist Association. In result, the root of the Joseon Labor Party must be the Chinese Communist Association. North Korea always mentions and emphasizes "independent history." It would be difficult for them to acknowledge that their root comes from the Chinese Communist Association.

On page 69 of chapter 16 from "Joseon's Warriors" published in Pyongyang, it includes an explanation: "information about our great leader Kim Il-Sung's formation of the DIU and his guidance." Here, "9. DIU and Kim Il-sung" on page 28 from "The Short History of International Joseon Revolutionary Movement" by Choi Hyoung-woo has been included.

Choi Hyoung-woo, the author of this book, was an instructor at Samsung School and Kim Il-sung's senior who was under Lee Jong-rak with Kim Il-sung at Ogaja, Yangdukhyun in Jilin Province around the year of 1930. Choi Hyung-woo was arrested and executed by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that occupied Seoul during the Korean War.

Then, why was "The Short History of International Joseon Revolutionary Movement" written by Choi Hyung-woo quoted in "Joseon's Warriors" and "Kim Il-sung's Memoir" in the 1980's when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end of the war and Choi Hyung-woo's execution? Since the 1990's, Rodong Newspaper has reported that Hyung-woo's bereaved family was invited and they received hospitable treatment. Choi Hyung-woo's "The Short History of International Joseon Revolutionary Movement" includes quite a few incorrect dates, because it was solely based on his own memories and personal experiences.

When Choi Hyung-woo lived with Kim Il-sung, he made a pen name for Kim Il-sung: "一星" (means One Star, pronounced Il-sung). He would have never imagined Kim Il-sung to become a powerful figure of North Korea at the time. Therefore, he overrated Kim Il-sung in his writing. At the time, the DIU movement was a common term used for popular movements against the Chinese communist leadership, not a proper term solely for Kim Il-sung. Kim Il-sung was simply a member who participated in the DIU movement. The DIU movement that happened around Ogaja was just a revolutionary game played by the curious youth, which China would not even consider making an official record of.

Choi Hyung-woo's book contains quite a few parts that conflict with North Korea's fabricated official records. This led to Choi Hyung-woo's death. An example to show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is, Choi Hyung-woo's book states that Lee Jong-rak was Kim Song-ju's boss (Kim Il-sung was born Kim Sung-ju), while "Kim Il-sung's Memoir" describes Lee Jong-rak as a man under Kim Il-sung's command.

North Korea even made up Kim Il-sung's imprisonment experience. The time of his imprisonment changes continuously. Right after the independence, they said he was imprisoned for two months in Jilin, Manchuria in 1929. However, while making an official introduction of Kim Il-sung's career for the first time in 1952, they claimed he was imprisoned in 1927 and was released from prison in 1928. Later, they changed the record again and said he was imprisoned in the fall of 1929 and was released in the spring of 1930.

If Kim Il-sung had actually been imprisoned, there would be no need to continuously change the dates.

Kim Il-sung’s communist party register also repeats confusion.The primary official announcement in 1952 argued that he became the clerk of the Dongman Special District Communist Youth Association after graduating from Yuwen Middle School in 1929 and then entere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1931. However, the record was changed that he could not graduate from Yuwen Middle School but became the clerk of the Dongman Special District Communist Youth Association in 1931 and then entere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the same year.

Nevertheless, since 1968, all the records about him working as the clerk of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and entering the Chinese Communist Party have disappeared. It was argued that the 18-year-old Kim Il-sungproposed a policy for establishing the Joseon Communist Partyin the summer of 1930 and solely fought for the Joseon Communist Party since then.

Nonetheless, this does not make any sense. The communist movement has principles of“Proletarian internationalism”and “1 country 1 party.”The former argues that the global labor class must unite and go forward with the global communist movement for the universal benefit of the global labor class. The latter states that each country must have only one communist party and that a foreign communist shall join the country’s communist party according to the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principle, as there must be one general staff of revolution. Therefore, because Kim Il-sung lived in Manchuria, China, he surely had to join the Chinese Communist Party of the Communist Youth Association. However, North Korea fabricated that Kim Il-sung doesn’t have any kind of relationship with the Chinese Communist Party.

Certainly, there is a desperate reason related to their survival that North Korea had such argument in the book published in 1968. At the time, China and the Soviet Union were going through a territorial dispute, thus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became chaotic. North Korea had nowhere to depend on between China and the Soviet Union, and had to pull oneself up. North Korea completely fabricated Kim Il-sung’s career that he independently worked for Joseon’s communist revolutionrather than working for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Manchuria, China, for various reasons. Like above, little Kim Il-sung’s career from the late 1920’s to the early 1930’s is no better than a “communal novel”fabricated according to political needs irrespective of th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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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판

少年・金日成、捏造された経歴の真相と「ㅌ·ㄷ」の実態

崔寧宰 記者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を支える最大のイデオロギーは「金日成・抗日武装闘争」だ。もちろん、これも最初から最後まで捏造だらけである。北朝鮮は、少年期の金日成(本名・金聖柱)の経歴からして捏造している。

 

北朝鮮が1952年、金日成の経歴について初めて公式発表した『金日成将軍略伝』によれば、金日成は1926年、14歳の時に満州の吉林にある毓文(ユンムン)中学校に入学し、同年、中国共産党の共産主義青年同盟に加入したという。ところが、金日成が1926年に毓文中学校に入学したという事実は存在しない。

万一、入学していたとしても共産主義青年団に加入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その理由は、中国共産党が上海で結成されたのは1921年7月だが、その組織が満州まで拡大するのは1928年11月以降のことだったからである。そのせいか、1968年出版の本を見ると、毓文中学校入学と共産党青年組織に加入した日付が、1926年ではなく1927年に変更されている。

 

また、金日成は共産党青年組織に「加入した」のではなく、これを「組織した」と書いた。これも嘘である。共産党の組織原則はトップダウン型だ。上部組織がなければ、組織することができない。1927年の時点では、まだ中国共産党の満州地域における上部組織は存在しなかった。そのため、金日成が吉林で、もしくは毓文中学校で共産青年団体を組織したという話は成立し得ない。

 

1968年に出版された本を見ると、金日成は1926年、南満州の樺甸(ファジョン)にある朝鮮人の民族教育機関である華成(ファソン)義塾に入学し、ここで「打倒帝国主義同盟(ㅌ·ㄷ)」を組織したという。また華成義塾の教育内容が古臭い民族主義教育だったため、金日成はすぐにこの塾を辞めて新しい道を模索し、撫松(ムソン)の実家に戻って「セナル(新しい日)少年同盟」を組織したというのだが、この二つとも、すべて事実ではない。

1926年に金日成が樺甸の華成義塾に入学したのは事実だ。樺甸は、朝鮮民族主義の独立運動団体である正議府の所在地であった。この正義府が華成義塾を設立し、運営していた。金日成の父・金亨稷(キム・ヒョンジク)は民族主義者であったため、息子である金日成を華成義塾に送った。入学後まもなく金日成がこの学校を辞めたのも事実だ。

しかしその理由が、「民族主義教育が気に入らなかったから」というのは創作されたストーリーである。これは、レーニンが16歳の時に宗教に懐疑心を持ち、教会に通わなくなったという内容を真似たものだ。金日成がこの学校を辞めた本当の理由は、父・金亨稷が死亡したためである。

金亨稷は、共産主義を非常に嫌悪する反共産主義者だった。韓医者であった彼は、共産主義者には薬を処方することも拒絶したという。そのため、彼は恨みを抱いた共産主義者たちのテロにより死亡した。1926年の初夏、金亨稷が32歳の時のことであった。それが理由で金日成は華成義塾を中退し、撫松に戻らざるを得なかった。

 

金日成は実際には、1926年、14歳の年に何をしていたのだろうか?この時期の少年・金日成には恥ずべき記録が二つほどある。撫松に戻っていた金日成は馬骨(マゴル)という共産暴力徒党の少年隊員になった。当時、満州の朝鮮人社会では、共産主義運動がしだいに盛んになってきていた。共産主義者たちは、朝鮮人社会において少しでも余裕がある者に対して、資本家階級、反動分子であるとして殺戮を犯し、金品を強奪した。もちろん中国人の家も襲撃した。

 

朱馬骨(チュ・マゴル)が、この共産暴力徒党の頭目であった。彼らの暴力的な活動は馬賊同様だった。馬骨の蛮行が、満州の朝鮮人社会の安全と秩序に対して責任を持つ民族主義独立運動団体である、正議府の知られるところとなった。正議府は、李鍾洛(イ・ジョンラク)小隊長の指揮の下、武装部隊を送って馬骨の一団を討伐した。

この時、李鍾洛は幼い金日成を捕まえる。李鍾洛は、共産主義者のテロに死した金亨稷の息子が暴力団に引きずり回されるのをかわいそうに思い、金日成を奉天に連れて行き、平旦(ピョンタン)中学校に入学させてやった。しかし、馬骨一団の悪行がすっかり身に染み付いていた少年・金日成は、学業に専念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そのため、まもなく退学となってしまう。

 北朝鮮は、このような金日成の恥ずべき経歴を隠す意図で、当時、金日成がいくつかの青少年団体を組織したと歪曲したプロパガンダをしている。1981年に出版された『朝鮮戦史』では、この時期に少年・金日成が組織した「打倒帝国主義同盟(ㅌ·ㄷ)」が現代史のスタートだと、ご大層な主張している。

1980年代、韓国のいわゆる386世代は、この捏造の歴史「ㅌ·ㄷ」をそのごとく信じ、これをロールモデルとして学生運動を組織した。残念なのは、いまだに韓国の政界と教育界、歴史学界に「ㅌ·ㄷ」を正しいと信じている人々が存在しているという事実だ。

1968年に出版された本に、金日成は撫松で「セナル(新しい日)少年同盟」を結成し、翌年に毓文中学校に入学して「反帝青年同盟」を、さらには「共産主義青年団」を組織したと書かれている。1971年出版の本には、「共産主義青年団」ではなく、「朝鮮共産主義青年同盟」であったと変更した。また1981年出版の『朝鮮戦史』には、1926年の団体組織がもう一つ増えて、撫松で「白山(ペクサン)青年同盟」を組織したと書いた。

その結果が、金日成の抗日武装部隊である朝鮮人民革命軍の結成につながり、この朝鮮人民革命軍が数多くの抗日パルチザン闘争を展開し、1945年8月の朝鮮解放をもたらしたというのだ。そのため、1926年の「ㅌ·ㄷ」組織が現代史の出発点であり、朝鮮解放の夜明けを告げる鐘だというのである。

 

ところで、このような重大な歴史について、解放後、30年以上もの間、一度も言及されることがなかったにも関わらず、なぜ1981年の『朝鮮戦史』の時になって初めて登場させたのだろうか? 嘘を頻繁につき続けることで、次第に壮大な嘘をつくようになる。これが北朝鮮のプロパガンダの手法だ。

 さて、「ㅌ·ㄷ」についてもう少し詳しく見てみよう。

 北朝鮮では、1926年10月17日を現代史の基点と定めている。その日、14歳の金日成が、満州で反日民族解放闘争を展開するため、「ㅌ·ㄷ」という秘密結社を組織したとして、毎年10月になると「ㅌ·ㄷ結成何周年記念」、「首領様の天才性」云々と言いながら行事を行っている。しかし、この「ㅌ·ㄷ」こそ完全に捏造された歴史だ。このことは、北朝鮮が発行した刊行物と歴史記録物を年代別に点検してみても分かる。

 金日成の「ㅌ·ㄷ」に関する話は、神話の中でこそ見出すことができる、小説のような筋書きで構成されている。まず、1926年の金日成の行跡に関する記録が、時代別にどのように変化してきたかを見ていく必要がある。1946年に刊行された『我々の太陽』と『英雄・金日成将軍』では、1926年に金日成が「ㅌ·ㄷ」を結成したことに関する言及は、いっさいなかった。また、1949年に刊行された『朝鮮民族解放闘争史』でも、「ㅌ·ㄷ」についての言及はまったくない。ただ、「毓文中学校に在学し、中国共産青年会に加入した」とだけなっている。

 

1952年に『金日成将軍略伝』を出版した時も、まだ「ㅌ·ㄷ」に対する言及はなかった。ただ、「中国共産青年会加入」から「中国」という言葉を抜き、「共産主義青年団」に変えている。1958年版の『朝鮮民族解放闘争史』にいたっては「共産主義青年団」という名称が、「共産青年同盟」に、毓文中学校在学が入学に変わった。

1961年刊行の『朝鮮近代革命運動史』では、「華成義塾に入学したが、すぐに中退して毓文中学校に入学、共産青年同盟に加入した」という具合に変えた。

1968年版の『民族の太陽・金日成将軍』になると、「華成義塾に入学」だけになり、毓文中学校への入学は1年遅らせて1927年に変更している。この本になって初めて「ㅌ·ㄷ」を組織したという言葉が登場する。すなわち、華成義塾で「ㅌ·ㄷ」を組織した後すぐに中退し、撫松で「セナル(新しい日)少年同盟」を組織したと付け加えた。

1971年版の『歴史辞典』は、『民族の太陽・金日成将軍』に収録されている内容とほぼ同じ内容だ。ただ、夏に華成義塾に入学し、秋に「ㅌ·ㄷ」を組織したと書いた。1973年版の『政治辞典』では、その日付まで規定している。「1926年6月に父親である金亨稷先生が逝去された後、華成義塾に入学、10月17日に『ㅌ·ㄷ』を組織、華成義塾中退後の12月15日に、撫松で『セナル(新しい日)少年同盟』を組織した」と書いたのだ。

北朝鮮は、なぜここまでする必要があったのか。その理由は、金日成の家族史を民族の歴史だと位置付けた1981年版『朝鮮戦史』で、現代史の出発点を、いわゆる金日成の「ㅌ·ㄷ」結成日だという、1926年10月17日にするためである。

金日成は、1945年に平壌に戻ってきた時、33歳であった。北朝鮮の言葉どおり、「ㅌ·ㄷ」がそれほどまで重要な事件であったならば、三十代の金日成がなぜそのことを記憶してなかったのだろうか?北朝鮮は、朝鮮労働党のルーツは「ㅌ·ㄷ」結成だと公言している。1973年版の『政治辞典』1146頁を見ると、「偉大なる首領、金日成同志の革命活動の開始、これは朝鮮人民の真なる革命歴史の最初の灯火だ」と書かれている。

「ㅌ·ㄷ」の結成を現代史の出発点とするならば、「中国共産青年会」から「共産主義青年団」に、さらに「共産青年同盟」となった後、「ㅌ·ㄷ」に名称が変わった理由について説明せねばならない。それができないのなら、「ㅌ·ㄷ」と「中国共産青年会」を同一視するほかない。また、朝鮮労働党のルーツは「中国共産青年会」にならざるを得ない。北朝鮮は、口を開きさえすれば主体歴史を叫んでいる。従って、自分たちのルーツが「中国共産青年会」にあるという事実は認めがたいと思われる。

 

平壌で発行した『朝鮮戦史』の第16巻、69頁に「偉大なる首領、金日成同志が『ㅌ·ㄷ』を組織、指導された内容についての資料」という説明付きの文章がある。ここには、崔衡宇(チェ・ヒョンウ) が書いた『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という本の28頁にある、「9.ㅌ·ㄷと金日成」の一部分がそのまま掲載されている。また、同じ内容が『金日成回顧録』の第1巻にも掲載されている。

この本の執筆者である崔衡宇は、1930年前後に吉林省陽徳(ヤンドク)県五家子(オガジャ)で、金日成と共に李鍾洛の下にいた人物で、三成(サムソン)学校の教員であり、金日成より年上だった。崔衡宇は6.25動乱の時に、ソウルを占領した北朝鮮当局に逮捕され、処刑される。

ところでなぜ、戦争終了の年から数えても、また崔衡宇が処刑された年から数えても30年という歳月が経過した1980年代になって、崔衡宇が書いた『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からの引用を『朝鮮戦史』と『金日成回顧録』に掲載したのだろうか。

1990年代に入ってからは崔衡宇の遺族を招待し、盛大に歓迎したという記録が『労働新聞』に載っている。崔衡宇の『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を読んでみると、年代が誤って記録されたものが一つや二つではないことが分かる。それは、崔衡宇が、ひたすら自分の記憶と主観的な見聞だけを基に記録した内容であるからだ。

李鍾洛の下で共に生活しながら、金聖柱(金日成)に「一星(イルソン)」という雅号までつけてくれた崔衡宇は、まさかその金聖柱という少年が北朝鮮の実力者として登場するなどとは夢にも思わなかったことだろう。そのために、「ㅌ·ㄷ」と金日成について、少々過大評価し過ぎる文章を書いたのだ。

当時の「ㅌ·ㄷ」運動というのは中国共産党の指導下で展開されていた民衆運動を称する普通名詞であって、金日成独自の固有名詞ではなかった。金日成は「ㅌ·ㄷ」運動参加者の一人に過ぎない。彼らが五家子一帯で展開した「ㅌ·ㄷ」運動は、中国の公式記録に登場するほどのものでもなく、ただ満州の僻村で繰り広げられた、好奇心旺盛な若者たちの一介の革命遊びに過ぎなかった。

崔衡宇が書いた本の中には、北朝鮮がつくり上げた公式記録とはまったく相反する記録が少なくなかった。そのことが崔衡宇を死に追いやったのだ。北朝鮮の記録と異なる記録を一つ例に挙げるならば、『金日成回顧録』では、李鍾洛を金日成の部下だと描写しているのに対して、崔衡宇の本では李鍾洛が金日成の上司となっている。

 

北朝鮮は、金日成の投獄経歴もつくり上げ、追加した。しかし、金日成の投獄時期は一定していない。解放後、初期の頃には1929年に2ヶ月間、満州・吉林の監獄に投獄されたとしていた。ところが、1952年に初めて金日成の経歴を公式発表する時には、1927年に投獄され、1928年に釈放されたとしている。その後、再び変更して、1929年の秋に投獄され、1930年の春に出獄したといった。実際に金日成に投獄経歴があるのならば、投獄時期がこのように右往左往するはずがない。

 

金日成の共産党籍も、やはり右往左往する。1952年に最初の公式発表をした時は、1929年に毓文中学校を卒業し、東満特別区の共産主義青年団の書記になった後、1931年に中国共産党に入党したとある。しかしその後は、毓文中学校を卒業できず、1931年に中国共産党、東満特別区の共産主義青年団の秘書になり、同年、中国共産党に入党したという具合に変わった。

しかし1968年からは、「共産主義青年団書記」、「中国共産党に入党した」といった記録はすべて消えた。18歳の金日成は、1930年の夏に朝鮮共産党創党の方針を示し、以来、ひたすら朝鮮共産党の組織のために闘ってきたというのである。

  

しかしこの主張は、まったく話にならない。共産主義運動には「プロレタリア国際主義」と「一国一党」の原則がある。前者は、全世界の労働階級は、団結して、民族と国家の利益に先立ち、全世界の労働階級の共通利益のために世界共産主義運動に前進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ものだ。

後者は、革命の参謀部は一ヶ所でなければならないため、各国の共産党は一党のみとし、他国の共産主義者であっても、別の国に来れば、プロレタリア国際主義の原則に従って、その国の共産党に加入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原則である。従って、金日成は中国の満州に居住していたのだから、中国共産党か、もしくは共産主義青年団に加入するのが当然だ。しかし北朝鮮では、金日成が中国共産党や共産党青年団とは何の関係もないと書いた。

もちろん、北朝鮮が1968年に出版された本にこのように書いた背景には、彼らの生存に関わる切迫した事情がある。当時、中国とソ連の間で領土紛争が起こっており、プロレタリア国際主義に混乱が生じたのだ。北朝鮮は、中国とソ連の狭間でどちらに頼ることもできず、自立するしかない状況にあった。

北朝鮮はこういった事情により、金日成の経歴を、満州において中国共産党のために活動したのではなく、朝鮮の共産主義革命のために独自的に活動したというふうに完全に変えておいた。このように、1920年代後半から1930年代初期の少年・金日成の経歴は、事実とは無関係に、ただ政治的必要性によって書き上げられた「集団創作小説」と変わりないのである。

訳注:「打倒」の韓国語表記は타도(タド)となり、このハングル2文字の一部ずつを取って組織名としたもの。

訳注:韓国における世代を指す名称。広義的には1990年代に30代で、1980年代に大学生で学生運動に参加し、1960年代の生まれを指している。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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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원 2019-01-14 13:45:23
사스가 조작날조왜곡구라로 유명한 북괴뢰김씨돼지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