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지하교회 탈북민 김은진 사모, 4대째 이어진 신앙 유산 간증

“복음 전할 수 없으니 가정 안 믿음의 씨앗 손주 세대까지 이어져”
“할머니는 모서리 부풀고 색 바랜 성경책을 정말 조심히 다루셨다”
“하나님 잘 믿어서 천당에서 온 가족이 얼굴을 보면 좋겠다 하셨다”

“가족들 보위부 끌려가 조사받기 시작...우리집 도청되던 걸 알았다”
“죽음보다 두려웠던 것, 죽어서 천당·지옥 어느 쪽으로 가느냐였다”
“北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심어주셨던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북한지하교회 탈북민 김은진 사모. /유튜브 영상 캡처
북한지하교회 탈북민 김은진 사모. /유튜브 영상 캡처

“하나님께서 언젠가 저 북한 땅의 문을 여실 것이다. 지금도 저 땅에서 죽어가는 주님을 들을 길이 없는 북한 땅의 영혼들을 살리시기 위해 한국 땅에 탈북민 3만 4천 명을 먼저 요셉처럼 불러내셨다고 믿는다. 이곳에서 잘 정착하고 훈련해서 복음을 들고 다시 올라갈 수 있는 요셉과 같은 사람으로 키워내고 훈련하고 있다고 믿는다.” 

지난 19일 오후 주안중앙교회에서 초청 간증집회를 가진 김은진 사모(뉴코리아교회)는 이같이 강조하며 “탈북민의 정착을 위한 기도와 한국에 오려고 3국에서 헤매는 탈북민을 위한 기도, 또 지금도 북한에서 눈물 흘리며 예배하는 지하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사모는 북한 지하교회에서 목숨을 걸고 4대째 신앙을 지키다가 지난 2004년에 탈북해 중국과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온 지 17년이 됐다. 그녀는 이날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또 손주 세대로 이어진 신앙의 유산과 믿음의 삶에 대한 간증을 나눴다. 

김 사모는 “북한에선 밖에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없으니 가정 안에서 믿음의 씨앗은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그다음 손주 세대로 이어져간다”며 “저희 친가와 외가는 모두 기독교 집안이다. 함경북도 라진시에서 담임목사를 하시던 증조할아버지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밤에 북한군 내무원에게 끌려가서 영 돌아오지 못하셨다. 그렇게 남은 가족들이 함경북도 온성 맨 끝자락으로 추방되었다. 그렇게 추방지에 몰린 신앙인들은 교회는 닫히고 폐쇄되었지만, 정부 몰래 모여서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저희 친가와 외가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다가 믿음 안에서 가정을 이뤘고 그렇게 믿음의 씨앗은 전수되었다”며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믿는 분들이 저희 가정에 모여 예배드렸다. 아버지가 양복점을 하니까 주변의 의심을 피해 사람들이 오갈 수 있었고, 한 번에 여럿이 모일 수 없어 지역을 나눠 번갈아 가며 모여 예배드렸다”고 했다.

또한 “예배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작업실에 밥상을 펼치고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렸다”며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가 아니다. 쥐도 새도 들을 수 없게 말씀도 소곤소곤 조용히 읽고 찬송가도 소곤소곤 조용히 불러야 했다. 저는 노는 척하며 망을 보다가 손님이 오면 먼저 뛰어 들어와서 알렸다. 그러면 얼른 흩어져서 골방에 들어갔다가 손님이 돌아가면 다시 모여서 드리는 예배였다. 저는 예배가 그렇게 드려야 되는 줄 알고 자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건너와서 드린 첫 예배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며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는데 찬양 소리가 문밖으로 울러 퍼져 나왔다. 백 명이 넘는 성도들의 얼굴에 빛이 나고 찬양팀이 손뼉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북한에 교회가 있을 때 이렇게 찬양하고 예배드렸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 좁은 골방에서 숨소리 하나 제대로 못 내면서 예배드릴 때 얼마나 이 예배가 그리웠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두만강 건너 북한에 살았는데 하루 만에 중국에서 같은 찬송가를 부르니 하나님 살아계심이 느껴지며 기쁨이 넘쳤다”고 전했다.

◇“할머니는 책 모서리가 부풀고 색이 바랜 성경책을 정말 조심히 다루셨다”

“저는 할머니를 통해 복음을 배웠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깨끗이 단장한 뒤 광주리 하나를 챙겨서 창가 밑에서 돋보기를 끼고 항상 성경을 보셨어요. 광주리엔 자투리 천, 양말, 바늘과 실을 담아놓고 손님이 오면 성경을 광주리 속에 숨기고 양말을 꿰매는 척하다가 손님이 돌아가면 다시 성경책을 꺼내서 보셨습니다. 제가 학교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오면 할머니는 제가 학교 갈 때 그 자세 그대로 계셨습니다.”

김 사모는 이날 인상적인 삶으로 믿음의 본을 보였던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간증을 들려줬다. 그녀는 “북한은 성경책이 귀하다. 할머니가 보시던 누렇게 빛바랜 성경책 한 권, 신약성경 한 권, 구약성경 한 권, 찬송가 책 하나, 중국에서 저희 집에 왕래하던 조선족 목사님이 주신 손바닥만 한 성경책 한 권, 또 외할아버지가 하얀 공책에 필사하셨던 성경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이어 “할머니는 책 모서리가 다 부풀고 누렇게 색이 바랜 성경책을 정말 조심히 다루셨다”며 “제가 조심성 없이 다루면 성경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에 성경책을 대할 때 하나님처럼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세상 지식과 이론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면 절대 안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과 깨달음으로 보고 또 보면서 믿음의 싹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하셨다”며 “나중엔 성경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찬송가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날이 오니까 성경을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두고 찬송가를 부를 수 있을 때 많이 불러두어서 마음 판에 새겨두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과를 다 마치고 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경 말씀을 읽으셨다. 그리고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저녁 식사 시간에 그날 보신 말씀을 같이 나누셨다”며 “저희가 학교 갔다 오거나 밥을 먹을 땐 번갈아 가면서 기도해 주셨다. 저녁을 먹고 나선 할머니가 찬송가와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 항상 말씀 가운데 살려고 애쓰시는 부모님의 삶을 보며 자라왔기에 선물같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믿어졌다. 그래서 당연하게 나도 크면 어른들처럼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사랑하면서 살기로 다짐도 했었다”고 했다.

김 사모는 “밖에서 저희 집안의 모든 행동을 볼 수 없도록 문을 잠그고 창문도 가리고 출입문도 담요로 가렸다. 그리고 사남매에게 할머니는 찬송가를 가르쳐주시고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셨다”며 “지금도 기억나는 게 마태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다. 이야기를 듣다가 졸면 할머니는 저희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도적같이 온다고 하셨는데, 그날을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며 이 가사가 포함된 찬송가도 가르쳐주셨다”고 했다

그녀는 “할머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참신이시고 우리 머릿속의 생각과 입술의 말까지도 다 헤아리는 분이기에 한순간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면 안 된다고 하셨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든 것을 아뢰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하셨다”며 “그러면서 너희들은 이 세상에 빛 되신 주님의 자녀들이니 기쁠 때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나 그 빛을 잃지 말고 더욱 근본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어 “그러면서 당부하셨던 말씀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잘 믿어서 천당에서 온 가족이 얼굴을 보면 좋겠다고 하셨다. 항상 눈물 흘리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하나님 잘 믿어서 부르실 때 갈 건데 너희가 하나님을 잘 믿지 않으면 우리가 못 만난다고 하셨다”며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고 너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천당에서 다 봤으면 좋겠다고 당부하셨다. 마지막엔 하나님께 이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믿음의 씨앗을 심었으니 쑥쑥 잘 자라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했다.

또한 “그렇게 기도해주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당부하신 말씀이 있다”며 “집 안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입도 벙긋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말 실수 없이 지나왔다.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입술을 지켜 오셔서 잘 지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고모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시고 끌려가서 나오지 못하셨다”

“밖에서는 못해도 집안에서만큼은 찬양하고 예배하는 이 행복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이 죽던 해, 갑자기 우리 집으로 북한군 보위부 보위지도원이 들이닥쳤습니다. 학교에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오후에 학교에 가서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반 아이들이 다 뒤편으로 가서 수군거렸어요. 제 책상엔 새끼 반동이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낮에 보위부가 와서 아버지를 끌어다가 차에 싣고 갔다며 쟤네 아버지가 반동, 간첩이라고 들으라는 듯이 수군거렸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냥 엎드려서 울기만 했어요.”

김 사모는 이날 자신이 탈북하게 된 과정도 털어놨다. 그녀는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부리나케 왔는데 할머니께서 보위부가 언제 들이닥쳐서 가택수색을 할지 모르니 성경책을 숨기자고 하셨다”며 “성경책에 습기가 안 들어가게 여러 번 비닐에 싸서 밖에 땅을 파고 묻었다. 다음날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가족들 한 사람이 보위부에 끌려가서 조사받기 시작했다. 조사를 받던 중 그동안 우리 집이 도청되던 걸 알게 되었다. 문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장군님 덕으로 살면서 어떻게 반동 짓을 할 수 있냐고 수군거렸다”고 말했다.

김 사모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두렵지 않은데 밤이 되면 두려웠다”며 “북한에선 보위부에서 가족 중 한 명을 끌고 가면 남은 가족들은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실어다가 산골짜기에 떨어뜨린다고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언제 실려 갈지 모르니 채비해야 한다며 보따리를 싸놓았다. 어른들이 짐을 쌀 때 우리는 집에 도청이 된 걸 아니까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때 할머니께서 저희 손을 붙잡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런 고통을 주려고 말씀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이 세상 떠날 때 기쁨과 슬픔, 아픔이 없는 영원한 곳에서 다 같이 모여 살자고 말씀을 전했다고 하셨다”며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고 다 기록되어 있고 우리가 가는 길이 이런 길이니 너무 울지 말라고 하시며 아버지는 좋은 데 가서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또한 “아버지가 끌려가시고 할머니는 죽도 잘 못 삼키다가 앓아누우셨다”며 “어느 날 할머니는 성경책이 발각되면 너희에게 큰 피해가 갈 수 있으니 태워 없애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태우셨고, 저희는 안타까워서 많이 울었다. 할머니는 성경책은 태워지고 없어져도 괜찮다며 하나님은 성경책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너희 마음 가운데 심겨 있고, 지금까지 할머니를 통해 듣고 배운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가슴속 깊이 간직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할머니는 저희의 손을 잡고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고모는 함흥으로 돌아가자마자 보위부에 끌려갔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하면 벌금만 내고 풀어줄 수 있다고 했는데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시고 그 자리에서 끌려가서 나오지 못하셨다”며 “고모의 가족들은 나올 수 없는 곳으로 추방되었고, 우리 가족도 네 면이 산으로 막힌 곳으로 추방되었다”고 했다.

김 사모는 “당시 고난의 행군이라고 해서 북한에 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며 “그런데 우리는 산에서 나무를 베서 땔감을 하고, 밭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서 먹고 짐승도 길러서 살 수 있었다. 또 산속이어서 큰 소리로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 보위부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보낸 추방지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살리시려고 예배하신 피난처였고 안식처였다”고 했다.

이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천당, 지옥 어느 쪽으로 가느냐의 문제였다”며 “천당으로 가기 위해선 하나님을 꽉 붙들고 살아야 하는데, 핍박과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놔 버릴까 봐, 성경책이 없고 말씀을 볼 수 없어서 하나님을 잊고 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할머니와 약속한 천당에 못 갈까 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이고 두려움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찬송가는 다 천당에 관한 찬송가였다”며 “북한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심어주셨던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그 나라에 대한 마음, 믿음이었다. 그런 광야 같은 북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셔서 생명의 지장 없이 살았다. 그 추방지에서 눈물 흘리면서 찬송가를 불렀다”고 했다.

끝으로 “그런 가운데 조선족 목사님께 탈북을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며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탈북을 결정하고 중국으로 들어오게 됐다. 중국에 들어오는 길도 하나님께서 중국 목사님을 통해 안전하게 안내하셨다. 두만강을 건너 목사님 차로 바로 연길로 들어와서 3개월을 지내다가 몽골을 통해서 한국으로 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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