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8일 TV조선 '강적들'에 출연한 박지원 전 국정원장(왼쪽)과 조선일보 13일자 사설 및 양지회 광고.
6월 18일 TV조선 '강적들'에 출연한 박지원 전 국정원장(왼쪽)과 조선일보 13일자 사설 및 양지회 광고.

지난 5월 7일 박지원 당시 국정원장이 조선일보와 회견에서 퇴임 이후 TV조선 시사예능 프로그램 ‘강적들’ 출연을 예고했다. 그는 "어린이날에 직원들 가족을 만났더니 TV조선 ‘강적들’ 얘기를 많이 하더라. 거기부터 나가서 마이크 권력을 장악하겠다(웃음)"고 답했다.

현직 국정원장이 언론에다 "권력 장악"하며 정치활동을 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어떻게 특정 방송의 특정 프로그램을 꼭 집어서 말할 수 있는가? 거저 희망이 아니라 이미 출연 얘기가 끝난 것으로 들릴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허투루가 아니었다. 그 예고는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그는 실제 18일 밤 ‘강적들’에 출연했다. 그 프로그램은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정치현안 등을 논쟁하는 곳이다.

TV조선은 이전에 출연 경력도 있으니 말 잘하는 그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출연 경위는 방송계의 의혹으로 기록될 만하다. 정치계와 방송계 안팎에는 TV조선의 유력 인물과 박 전 원장이 오래 전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언론과 권력의 유착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박 전 원장의 이른 정치활동에 TV조선이 멍석을 깔아준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TV조선의 출연자 선정 기준이다. 누구든 표현의 자유가 있다. 시사프로그램에 나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방송국이 출연자를 고를 때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적절한 인물인지 판단해야 한다.

박 전 원장은 지난 10일 라디오 방송에서 "국정원이 정·재계 인사들의 X파일을 보관하고 있다…"고 정치권 등을 협박했다. "부적절하다"는 여권과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다. TV조선과 한몸인 조선일보도 13일 "업무상 취득 정보로 정치희화화 시키는 전 국정원장"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오죽하면 국정원이 ‘전직 원장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보도자료를 냈겠냐"며 강하게 나무랐다. 국정원 전직모임 양지회가 성명에서 "박지원은 애당초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을 맡기에 부적격한 인물이다. 국가정보기관을 정략적으로 악용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 성명은 바로 조선일보의 15일 1면 하단 광고에 실렸다. 본인도 "지금 몰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라고 다른 방송에서 밝혔다.

이런 말썽을 일으킨 지 겨우 일주일 지난 ‘부적절한’ 그를 방송에 불러내 정치문제를 떠들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말썽이 없었다 해도 국가기밀을 책임졌던 국정원장을 물러난 지 겨우 한 달여 만에 정치 프로그램에 불러내는 것은 더 부적절하다. 본인이 나오고 싶다고 매달려도 상식을 지키는 매체라면 거부했어야 했다.

박 전 원장은 오랜 정치생활 동안 숱한 말실수를 했다. 늘 그래 왔듯이 김정은 체제 등을 옹호하거나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정치장난을 할 발언을 일삼을 가능성이 높다. TV조선은 실수나 아슬아슬한 발언들이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관심을 끌기엔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이다. 품질과 상관없이 문제를 일부러 만들어 구설수에 오르도록 해 소비자들 관심을 끄는 마케팅 기법이다. 방송들은 내용 상관없이 시청률만 올리면 그만이라는 선정주의 때문에 활용한다.

조선일보 13일 사설은 이미 "정치를 희화화하는 박 전 원장"의 "자기 정치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을 우려했었다: "퇴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여러 방송에서 이런저런 내용을 흥밋거리처럼 말하자…자기 정치하는 것이 아니냐…일부에서는 ‘노이즈 마케팅’ 수준이라고 까지 비판한다. 얼마나 가벼운 언행으로 비쳤으면…"

그러나 다름 아닌 TV조선이 조선일보의 지적을 아예 무시했다. 오히려 앞장서서 박 전 원장의 정치를 돕고 ‘구설수 장사’를 했다. 내부 충돌이다. 조선일보가 부끄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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