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3·1운동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3·21 노령 임시정부 가장 먼저 선포
4·11 상해 임시정부 출범
4·23 한성 임시정부 출범
미국의 이승만 ‘대통령’으로 활동
8·25 이승만 ‘구미위원부’ 설치
상해 이동휘, 자금 문제로 사퇴

류석춘
류석춘

1차대전의 종결을 둘러싼 국제질서의 재편은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해 내외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승전국 대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에 고무된 독립운동 세력은 세계 각처에 우후죽순으로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모두 8개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그 중 다음 3개가 중심이었다.

3월 21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가 가장 먼저 ‘노령(露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대통령 손병희·부통령 박영효·국무총리 이승만·내무 안창호·군무 이동휘 등을 추대했다. 4월 11일 선포한 ‘상해(上海)’ 임시정부는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 이승만·외무 김규식·내무 안창호·군무 이동휘 등을 선출했다. 4월 23일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는 13도 대표가 비밀리에 인천에 모여 집정관 총재 이승만·국무총리 이동휘·외무 박용만·내무 이동녕 등을 선출했다.

임시정부 통합과정 (출처: 서울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 1. 4)

이승만은 3개 임시정부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노령에서는 서열 3위였지만, 상해와 한성에서는 각각 서열 1위였다. 다른 누구도 3개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과 같은 위상을 얻지 못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각각의 임시정부에서 자신이 차지한 위상을 일정한 시차를 두고 각각 전달받았다.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한 이승만은 주어진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먼저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내고 스스로를 ‘대한공화국’ (Republic of Korea) ‘대통령’ (President) 이라 부르며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본거지 하와이에 연락해서 태평양잡지사로 하여금 『대한독립혈전기』라는 책을 발간하게 하고, 그 첫머리에 ‘대한민주국 대통령 이승만’ 사진과 ‘대통령 선언서’를 싣도록 했다 (유영익, 1996, p. 146). 다른 한편 그는 상해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과 연락해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인가를 받은 후, 신한민보를 통해 자신이 상해 임시정부의 우두머리임을 보도하도록 했다 (오정환, 2022, p. 192).

다른 한편 이승만은 6월 14일 미·영·불(佛)·이(伊) 등 열강 정부와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문서를 보내 한국에 ‘완벽한 민주정부’가 탄생했고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실을 통고했다. 일본 천황 앞으로도 6월 18일 같은 사실을 알리며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했다. 7월 17일에는 워싱턴에 새 사무실을 내고 ‘대한공화국’ ‘공사관’ (legation) 간판을 걸었다 (『국역 이승만 일기』 p.94). 8월 25일 이승만은 이 기관의 이름을 임시정부 산하의 구미위원부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라 바꾸고 외교 및 선전 활동은 물론 국채 발행 등 독립자금을 거두는 창구로도 활용했다. 책임자로 김규식을 임명했다

미국에서 이승만의 독보적 활동이 전개될 당시, 상해는 세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독립을 향한 열정으로 곳곳에 임시정부를 만들긴 했지만, 분열된 상태로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1919년 4월 미국에서 건너가 5월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가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러 가지 걸림돌과 마주쳤다.

첫째는 다름 아닌 3·1운동 직전 이승만이 윌슨에게 제출했던 ‘위임통치청원’ 문제였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황당한 비난이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은 안창호도 동의해 준 일이었다. 더구나 이 문제로 가장 난리를 친 신채호는 김규식을 통해 거의 같은 청원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위임통치 문제는 하와이에서 이승만에 완패한 박용만의 ‘뒤끝 작렬’일 뿐이었다. 총대를 멘 신채호는 박용만의 대리인이었다.

둘째는 이승만이 ‘대통령’ (President) 이란 직함을 사용하는 문제였다. 내각제를 채택한 4월의 상해 임시정부 수반은 ‘국무총리’ (Prime Minister) 였는데, 이승만이 미국에서 대통령이란 명칭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문제를 어쩔 것이냐 하는 쟁점이었다. 다행히 임시정부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혼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자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셋째는 내각 구성 문제였다. 격론 끝에 ‘상해’ 및 ‘노령’ 임시정부가 13도 대표가 실제로 모여 인선을 한 국내의 ‘한성’ 임시정부 내각 안을 수용하자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정부수반의 명칭도 개정한 임시정부 헌법에 따라 ‘집정관 총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기로 합의하면서 통합은 급물살을 탔다.

마침내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등으로 내각이 구성됐다.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동거하는 불안한 통합이었다. 박용만과 신채호는 끝내 참여를 거부했다. 한성정부 승인에 반대한 노령의 문창범도 이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역사에서 매우 큰 위상을 갖는다. 주권재민을 강조한 3·1정신을 계승하였으며, 노령(이동휘)·한성(이승만)·상해(안창호) 세 임시정부를 통합해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최고의 단체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바로 이 단체의 최고지도자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날개를 단 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바로 상해로 가지 않았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상해 임시정부의 위상을 미국에서 홍보하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집중적으로 기울였다.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까지 이승만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연하고 모금했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직후 만든 ‘한국친우회’ 지회를 미국 전역에 설치하기 위해 학교와 교회는 물론 상공인들 모임인 로터리 클럽 등을 주 무대로 삼았다. 언론의 주목도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갈등과 부작용 또한 없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자금을 확보하는 구미위원부 활동이 기존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 애국금 모금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갈등 끝에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손을 들어 주었다. 1920년 3월 임시정부는 국민회의 애국금 모집을 폐지하고, 구미위원부의 독립공채 모금만을 승인했다. 돈을 받는 창구는 바뀌었지만, 돈을 내는 미국 동포의 부담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이 주효했다. 이승만이 돈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김규식을 임명한 것도 앞날을 내다본 판단이었다. 상해의 경우가 타산지석이었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시절의 이승만.

이즈음 상해에서는 독립운동 자금 때문에 엄청난 풍파가 일었다. 한인사회당을 이끌던 통합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가 레닌의 휘하에 있는 국제공산당의 독립지원 자금을 두 번이나 횡령했다는 구설수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1차는 독립운동하는 공산진영 내부의 상하이파(한인사회당)와 이르쿠츠크파(전로한인공산당) 간에 벌어진 400만 루블 쟁탈전 후유증이었다. 2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40만 루블을 가져오는 심부름을 한 한영권과 김립이 돈을 횡령한 후유증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동휘는 결국 1921년 1월 국무총리직을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 6월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활동을 마무리하고 상해로 부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하와이로 돌아가는 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승만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있었고 (이원순, 1989, 『세기를 넘어서: 海史 李元淳 自傳』 신태양사, p. 164), 미국은 이승만에게 여권 발급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승만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다름 아닌 2002년 12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 ‘두 얼굴의 이승만’에 등장하는 ‘이승만의 Mann Act 위반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음모였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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