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진흥원 '함벽당 간찰' '모당일기' 분석

'결혼', 집안 관계망 구축에 중요 역할...유학자는 '주자가례' 준수하려 노력

영남의 한 양반가의 편지-일기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사.
영남의 한 양반가의 편지-일기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사.

조선시대 대표적 공식 기록물은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다. 방대하고 상세하지만 대부분 조정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어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파악하긴 어렵다. 당대 사람들이 진솔함이 드러난 편지나 일기가 평범한 생활상 연구엔 더 좋은 자료다. 한국국학진흥원이 펴낸(은행나무 출판) ‘함벽당 간찰’과 ‘모당일기’는 각각 안동 양반가인 함벽당(涵碧堂)의 편지 834점, 대구에 거주한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의 모당일기를 분석한 책이다.

함벽당은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에 있는 집의 이름 즉 당호(堂號)다. 그 시절 양반의 본명인 관명(官名)은 관리가 되거나 묘비에 기록될 때 아니면 잘 쓰이지 않았다. 字와 아호(雅號)를 흔히 혼동하는데 원래의 쓰임과 유래가 다르다. 양반들은 보통 자(字)로 서로를 호명했고 사는 거처의 이름을 따 아무개 선생 또는 거사(居士)로 불렀다. 신사임당 또한 ‘사임당’에 거처하는 ‘신씨 부인’이란 의미다.

지금의 함벽당은 1862년(철종 13) 때 개보수됐다. 창건자는 명종 때 무인(武人) 절충장군(折衝將軍) 강희철(康希哲)공. 그는 관직 은퇴 후 함경당이라 명명한 이곳에서 유유지적했다. 그 뒤 도촌(道村) 살던 옥봉(玉峯) 권위(權暐, 1552-1630)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다시 그 지역에 대대로 살아온 함벽당 류경시(柳敬時, 1666-1747)의 소유가 된다.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 류씨들이 살았다.

이 함벽당에 약 250년간 집안사람들끼리 주고받은 다양한 주제의 편지들이 전해진다. 함벽당 간찰(簡札, 편지)은 관혼상제 통지, 농사일과 노비 관련, 독서와 공부, 관직을 받거나 승진한 얘기, 전염병과 자연재해 대처 등으로 분류된다. 조선 후기 ‘간찰’은 집안의 대소사부터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일까지 여러 사안을 전달하는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 생계 곤란을 호소하는 등 삶의 생생한 측면을 전하기도 한다.

학자·전문가에 따르면 함벽당 간찰은 집안의 관계망 구축에 결혼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전주 류씨 함벽당은 안동 권씨와 혼인한 후 안동 서부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게 된다. 18세기 후반 이후 함벽당 선생의 네트워크가 영남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영남 남인의 일반적 경향이라는 분석이다.

‘모당일기’는 손처눌이 1600년 1월 8일부터 1630년 1월 무렵까지 쓴 글 모음이다. 그는 17세기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경북 성주 출신인 한강(寒岡) 정구의 학맥을 이었다고 평가된다. ‘모당일기’를 통해, 당시 양반들이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 주자)가 정리한 가정의 의례 범절 ‘주자가례’를 준수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일기엔 기제사(忌祭祀, 죽은 날을 기리는 제사)와 생신제(生辰祭,망자의 생일 제사) 관련 기록이 있는데, 조부모·부모는 물론 외조모·장인·장모 기제사도 등장한다. 부계중심 원리가 정착하는 과도기였던 것이있다. 손처눌의 30년 삶은 대부분 정형화된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사당 참배와 기제사 등의 의례와 유교(성리학) 경전읽기는 정기적으로 중요하게 실행됐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보편적인 일상 패턴이었다.

한편, 한국사 연구가 조선시대에 집중되는 경향은 아쉬운 일이라는 측면을 일깨워준다. 제사상 차림의 원칙인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현대 한국 일반 가정의 제사문화는 정확한 역사적 근거가 없는 관습이다. 조선을 거치며 우리나라에만 남은 이 풍습을 인류 문화유산으로 평가할 여지는 있다. 다만 21세기에 ‘후(後)조선’을 추구하는 듯한 흐름이 우려를 부른다. 대한민국 화폐엔 조선시대 인물들 뿐이며,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로 보는 시각 또한 근년 강화됐다. 대한민국이 출발부터 잘못됐다면 대체 어떤 나라여야 했다는 말인가. 수천년 인류 역사의 결론, 자유민주주의 기반의 공화국 외에 또 어떤 국가모델을 추구해야 할까. 어디에도 없는 국가상인지, 아니면 한반도 북쪽에 ’공화국‘이라 주장하는 세습왕조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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