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6.25를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또 다른 당사자인 중국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즉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이자 피해자인 대한민국은 이 전쟁을 부르는 이름이 없다. 그냥 6·25가 이 전쟁을 가리키는 정식 호칭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와 학계, 시민사회가 6·25의 성격에 합의하지 못해 생긴 현상이다. 어쩌면 이 전쟁의 성격을 규정해야 할 필요성 자체를 못 느낀 탓일 수도 있다. 여기에는 건국과 산업화의 주역인 우파의 책임이 가장 크다. 우리나라 우파 특유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능력이 여기서도 표출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6·25는 잊어버린 전쟁이 되고 있다. 이 전쟁이 왜 발생했는지, 어떤 경과를 거쳐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런 무관심의 결과가 이 중대한 사건 발발 70년이 넘도록 정식 호칭조차 없는 현실을 만들었다. 고희를 넘긴 노인이 주민번호만 있고 정식 성명이 없는 셈이다.

필자는 6·25를 ‘대한민국 건국전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모든 요소가 6·25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전쟁의 의미는 중차대하다. 6·25를 알지 못하면 대한민국 현대사도, 대한민국 정체성도 이해할 수 없다.

새로운 국가체제의 수립은 어떤 형태건 전쟁을 거치게 되어 있다. 기존 체제를 척결하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낡은 질서와의 전쟁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새로 건설되는 국가의 산파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이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탄생(Birth of Nation)은 6·25를 통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의 새로운 정체성이 농지개혁 이후 등장한 자영농들이다. 자영농과 대립하는 낡은 질서의 상징이 지주계급이다. 농지개혁과 함께 6·25는 지주계급을 철저히 청산하고 자영농이 대한민국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6·25는 또 일제시대와 해방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대한민국 곳곳에 남아있던 전근대적 신분질서를 완전히 해체했다. 6·25가 없었다면 이런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데 얼마나 긴 세월과 진통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1970년대까지도 우리나라 일부 벽지에서는 양반 마을과 상민 마을이 나뉜 신분질서가 작용하고 있었다.

근대국민국가는 자생적인 질서를 기반으로 한 게마인샤프트보다 가치판단 위주의 선택적 질서를 기반으로 한 게젤샤프트의 성격이 강하다. 대한민국은 6·25 이전까지 게마인샤프트 공동체였다. 6·25를 계기로 한반도 거주민들은 이념적 선택에 따라 남북으로 나뉘었다. 게젤샤프트로 진화한 것이다. 고향을 떠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북한 출신들은 근대인으로 변신,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주축이 됐다.

19세기 이후 한반도 역사의 키워드를 딱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근대화’이다. 한일합방 이후 근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이후 근대화를 둘러싼 더 큰 갈등이 이어졌다. 그것은 영·미 해양세력 방식의 근대화인가 아니면 소련·중국 등 대륙세력 방식의 근대화인가 하는 갈등이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냐, 사회주의 전체주의냐 하는 대립이기도 했다.

6·25는 한민족 내부의 이런 대립 갈등이 전면화한 사건이다. 다만 전면적인 대결에도 불구하고 승부는 나지 않았고 그 갈등은 이후 체제경쟁의 단계로 넘어갔다. 그것이 남북분단이다. 6·25는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미완의 건국전쟁이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자유민주주의 시장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 근대화의 최종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역사적 사명을 안고 있다. 그것이 역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래서 6.25는 건국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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