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③ 여성해방과 복음 

여자들은 해 져서 남자들이 집에 들어온 뒤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던 조선
칠거지악(七去之惡)·조혼·약탈혼·축첩 등 온갖 악습에 고통받던 여인들

축첩제도에 ‘메스’ 들이댄 선교사들...대부흥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회개한 죄목
선교사들의 헌신과 돌봄으로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의사·과학자 김점동 탄생하다

민족 여성 지도자 김세지의 증언 “조선 여자의 해방은 그리스도교로부터 시작”
“여성차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 기독교 자리잡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편집자주]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다.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자유일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새문안교회 여성 기독면려회원들(1934년 5월 13일 촬영). 기독면려회는 기독 청년의 신앙생활과 사회활동의 증진을 목적으로 조직됐다. /새문안교회 역사관
새문안교회 여성 기독면려회원들(1934년 5월 13일 촬영). 기독면려회는 기독 청년의 신앙생활과 사회활동의 증진을 목적으로 조직됐다. /새문안교회 역사관

복음의 빛이 이 땅에 비치기 전, 조선은 그야말로 어둠이었다. 집집마다 가난 또는 전염병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어느 정도 잘 사는 집은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으로 가정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국내 정치의 불안과 주변 열강의 침략이 맞물리며 불안한 사회 분위기는 가뜩이나 약자인 여성들을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이런 조사 사회가 선교사들에 의해 새롭게 바뀌고 변화된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은 조선 여성들의 권리를 되찾아 줬다.

◇여자들은 해가 져서 남자들이 집에 들어온 뒤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던 조선

1886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애니 엘러스 벙커는 인천 제물포에서 나귀를 타고 서울에 들어가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앞뒤로 몸을 흔들며 곡을 하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집은 나지막하고 짚으로 지붕을 올렸으며 돌로 사방을 둘렀다. 개천에서는 악취가 나고 좁디좁은 길은 여기저기 흙덩어리로 덮여 있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곡소리가 나는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콜레라 때문이지요. 마시는 물을 조심하세요!’ 문득 움막 같은 집에서 옹기에 담긴 물을 받아 마신 일이 떠올랐다!‘

1887년 조선 땅을 밟은 프랭클린 올링거는 “지구상 가장 오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개화되지 않은 땅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1890년에 한국에 온 로제타 셔우드 홀은 당시 서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25세 때 조선에 올 무렵의 로제타 셔우드 홀.
25세 때 조선에 올 무렵의 로제타 셔우드 홀.

“그들은 모두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그림처럼 보였다. 우리는 남자들만 볼 수 있었다. 여자들은 해가 져서 남자들이 집에 들어온 뒤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진기한 풍속이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에 처해서 죽어가던 조선 사람들을 보며 선교사들의 마음속엔 강한 사명감이 샘솟았다. 1897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마티 잉골드는 서울에 첫발을 내딛던 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제 상륙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짐을 들려고 다투던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을 잔뜩 움츠려 있었다. 이토록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이런 삶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 이곳에 와서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말하며 이 백성을 축복하고 구원하게 하신 것에 감사드렸다.”

◇칠거지악(七去之惡)·조혼·약탈혼·축첩 등 온갖 악습에 고통받던 조선의 여인들

조선의 여성들은 분명 비천한 신분의 백정과는 달랐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야 했다. 여자아이들은 학교 들어갈 무렵의 나이가 되면 집안에서 격리된 채 지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열 살이 조금 넘을 무렵이면 결혼을 하는 ‘조혼’ 풍습이 있었다.

결혼 후에도 여성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살면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악법에 시달리며 남성 중심의 그릇된 결혼제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칠거지악이란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의 허물을 가리킨다. 즉 시부모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여자는 남자와 한상에서 먹는 게 금지되었기에 반드시 남편이나 시댁 식구가 밥상을 물린 다음에 그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이렇게 힘겨운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도 남편이 죽으면 무려 3년간이나 상복을 입고 남편을 기려야 했다. 게다가 과부가 된 여성은 남자의 도둑질 대상이었다. 밤에 몰래 침입해서 데리고 가면, 그 길로 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보쌈’이라고 하는 약탈혼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TV조선 드라마 '조선생존기' 중 ‘보쌈’ 관련 장면. /TV조선 영상 캡처
TV조선 드라마 '조선생존기' 중 ‘보쌈’ 관련 장면. /TV조선 영상 캡처

여성은 또한 남편이나 시부모를 평생 봉양하는 게 도리였던 만큼 온갖 가사가 따라붙었다. 세탁기, 냉장고, 식기세척기 같은 것들이 있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중노동이 바로 당시의 가사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는 당시 조선 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국 여성들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을 자매로 여기는 나조차도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슬픔, 절망, 고된 일, 질병, 무정함, 무시, 수치심이 이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얼굴을 굳게 하고 주름지게 했습니다. 스물다섯 살 된 여성에게서도 아름다움 비슷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심지어 서른 나이의 여성이 마치 50세 할머니처럼 보였고, 보통 40세 정도가 되면 치아가 빠졌다고도 한다. 무엇이 조선 여성들을 이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물론 당시 평균 수명이 40~50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남성도 예외일 수는 없다. 가난으로 인한 부족한 영양에 온갖 질병의 창궐, 막중한 농사일과 가사에 억압된 사회 분위기까지 그들의 생명을 훨씬 단축시켰을 것이다. 그 중 특히 조선 여성들의 옥죄었던 것은 ‘조혼’과 ‘축첩’ 제도였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지 여자들은 그나마 이름이 있었지만, 여성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반 가정집 여자들은 이름 대신 ‘OO네 셋째 딸’, ‘감나무집 큰딸’ 등으로 불렸다. 결혼을 하면 출신 동네를 붙여 ‘OO댁’ 이렇게 부르는게 곧 이름이었다. 

조선시대 조혼 모습.

조혼의 경우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제도다. 당시 여자를 그야말로 빨리 결혼해서 일을 시키거나 애를 낳아 기르는 도구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조혼제도는 선교사들이 이화학당 같은 여학교를 세웠을 때 큰 난관에 부딪힌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겨우 부모를 설득해 데려와도 1~2년 지나면 결혼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게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첩은 일종의 재산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도덕의 잣대로 첩제도를 평가하는 이는 없었다. 관리(공무원)은 물론 교사, 학생마저도 첩을 두고 있을 정도였다. ‘첩=재산’이란 인식은 첩이 한 명이 아니라 서너 명에서 6~7명까지 거닐었다는 이야기다. 첩을 많이 갖는 것은 곧 능력 있는 남자의 상징이었다. 

◇축첩에 ‘메스’ 들이댄 선교사들...대부흥운동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회개한 죄목

조선의 축첩제도에 대해 가장 먼서 메스를 들이댄 사람들은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1895년 감리교 연례회의(총회)에서 오랜 논의 끝에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축첩을 하고 있는 예비신자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다. 

반면 당시 장로교측은 좀 더 이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기로 하고 처리를 미뤘다. 사실상 거대한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감리교회인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에서 1906년 발간한 ‘가정 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으로 천리(天理)까지 잘못 알았도다. 그러한즉 여인을 낮게 대접하는 것이 사회상이나 가정 상에 아무 폐단도 없는가? 폐단이 많이 있으니 잠깐 그 폐단을 말씀하오리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줄 아는 풍속으로 인하여 생긴 폐단을 말씀하려면 이로 다 셀 수 없으나 그중에서 제일 큰 폐단을 말하면 두서너 가지 있으니 아래 기록한 것과 같도다.

첫째는, 첩 두는 폐단이니 당초에 하늘과 땅이 마련되고 만물이 생긴 중에 사람은 제일 신령한 영혼을 타서 한 사나이와 한 여인이 부부 됨이 천리에 합당하니, 여인이 두 남편을 두는 것도 옳지 않고 사나이가 두 계집을 두는 것도 옳지 아니하거늘,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으로 여인이 남편을 두셋을 두면 큰 변으로 알고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어도 개가도 못하게 하되, 사나이는 장가든 후에 의례히 첩 두기를 시작하여 칠팔 명씩 첩을 두는 사람이 흔히 있고, 지금 세상에는 첩을 두지 아니한 사람은 몇 명이 없어 첩을 아니 두는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라 하여 못생긴 사람으로 돌리니 첩을 두는 까닭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불화하여 그 집이 망하고야 말고, 첩의 소생으로 난 자식은 입명이라 지목하여 선천과 후천을 가리는 폐단이 우리나라에 어떠하였느뇨?”

아마 그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의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글이 아닐까 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세상, 또 그러한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세상, 그것이 바로 100년, 120년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식의 초례 장면. /한국관광공사
한국의 전통 혼례식의 초례 장면. /한국관광공사

축첩은 이듬해 원산, 평양 일대로 번진 대부흥운동에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회개한 죄목이기도 했다. 그만큼 만연해 있었다. 또한 당시 여성은 교육받을 권리도 없었다.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 혼삿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 집안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들은 귀동냥으로 글을 익히든지 아니면 남장을 하고 서당을 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선교사들의 헌신과 돌봄,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의사·과학자 김점동을 탄생시키다

이런 암흑 같은 조선 사회에서 드디어 몇몇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김정동이다. 김정동은 이화학당 출신으로 ‘최초의 여의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 박유산의 성과 세례명 ‘에스더’ 때문에 ‘박에스더’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984년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불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유학한 뒤, 1900년 10월 조선에 귀국해 의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잡지 ‘신학월보’ 창간호인 1900년 12월 호에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귀국 기사가 실려 있다. 

“부인 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산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대한에 환국하였다. (중략) 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대한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해외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김점동의 모습. /이화역사관
해외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김점동의 모습. /이화역사관

최초의 여의사인 그녀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김점동은 1877년 서울에서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은 아펠젤러를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의 사택 근처였다. 이 때문에 김홍택은 선교사들에게 고용돼 일찍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여학생들을 위해 1885년에 설립된 이화학당 얘기를 듣고 자신의 네 딸 중 비교적 총기가 있던 셋째 딸 김점동을 입학시켰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주로 버려진 아이,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열 살 난 김점동은 이화학당의 네 번째 입학생으로 들어왔다. 당시 이화학당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뜨개질과 옷 만드는 일 등 주로 가사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만연해 있었다. 서양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딸이나, 딸을 보낸 부모나 불안하고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김정동도 어느날 스크랜턴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저 여자가 드디어 나를 삶아 먹으려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당시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김점동은 열다섯 살이던 1891년에 세례를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세례명 ‘에스더’로 평생 불렸다. 그녀는 열일곱 살에 로제타 홀이 남편 윌리엄 홀의 조수로 있던 아홉 살 연상의 박유산과 결혼을 한 후 로제타 홀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86년 10월 불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졸업을 불과 몇 주 앞두고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고 있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커다란 아픔을 겪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1900년 6월 의대 졸업장을 받는다. 

그녀가 귀국한 뒤 1903년 셔우드 홀이 죽은 그녀의 남편을 기념해 평양에 기홀병원을 세우자 김점동은 그리고 자리를 옮겨 헌신적을 환자들을 돌본다. 그녀는 평양을 기반으로 틈만 나면 황해도, 평안도 벽촌으로 진료를 다녔다. 10개우러 동안 무려 3000명 이상의 환자들을 돌봤다고 하니 얼마나 헌신적으로 의사로서 직분을 다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김점동(박에스더)의 진료기록에 대한 자료. /역사채널e 영상 캡처
김점동(박에스더)의 진료기록에 대한 자료. /역사채널e 영상 캡처

그녀의 인술(仁術)과 수술을 통한 치료가 입소문이 나면서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김점동은 인공관을 이용해 방광 질병을 치료하는 등 의료기술 보급에도 앞장섰다. 고종은 1909년 4월, 그런 김점동의 헌신적인 노력을 치하하며 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 때문에 폐결핵에 걸린 김점동은 1910년 4월 13일, 불과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국립과천과학관 중앙홀 입구에 있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엔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로 큰 업적을 남긴 33인의 위인이 새겨져 있다. 그 중 단 한명의 여성이 바로 ‘김점동’이다. 거기에는 김점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점동은 무료진료를 베풀고 맹아학교와 간호학교 설립에 기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여성 과학자이다. 그는 미국 선교사이자 여의사인 셔우드의 통역을 맡아 진료를 돕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귀국해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과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여성 환자를 대상으로 활발한 진료 활동을 펼쳤으며, 황해도와 평안도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진료 활동도 했다. 김점동은 한국인으로서 초창기 서양의 과학적 의학을 제대로 공부한 선구자였으며, 특히 여성으로서 그런 일을 해낸 여결이었다.”

◇민족 여성 지도자 김세지의 증언 “조선 여자의 해방은 그리스도교로부터 시작”

김점동이 여자 의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김세지는 사회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여성이다. 그녀가 속했던 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북장로교 여신도와 감리교 여신도가 중심이 돼 평양에서 조직한 단체다. 당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국내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회원이 100명이 넘었고, 전도부인(전도사)을 비롯해 상당수 여성 기독교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그 단체에서 재무부 부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던 여인이 바로 김세지다. 그녀는 당시 여성들의 사회참여의 표상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65년 10월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에서 딸만 넷 있는 집안에 막내로 태어나 16세에 정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5년을 홀로 지내다가 1888년에 김종겸과 재혼을 한다. 그리고 1896년 감리교 선교사 노블에게 세례를 받고 그때부터 ‘셰디(Sadie)’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3년 뒤엔 전도부인으로 채용돼 전국을 돌며 전도 활동을 벌인다. 

전도부인 시절 김세지.
전도부인 시절 김세지.

그녀가 복음을 받아들인 배경을 보면 당시 시대상과 여성상을 엿볼 수 있다. 관료 출신의 김종겸은 당시 재산도 많고 학식을 겸비한 선비였는데, 사상도 개화되어 있었다. 윌리엄 홀이 평양에 문을 연 예수교학교에 전처소생의 두 딸을 입학시켰을 정도였다. 그는 일찍이 홀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접한 친척의 권유을 받았지만 “관청에 출입하는 사람이 종교를 가질 수 있겠는가”며 거절했었다. 

그러자 그 친척은 김종겸의 부인에게 전도하면서 “만일 나의 말한 대로 예수 씨를 믿으면 집안이 평안할 것이요, 남편은 주색잡기를 버리고 살림을 힘써 하여 내외간 화순하게 되리이다”라고 말했고, 김세지는 이에 선뜻 교회에 따라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 김종겸은 당시 남자들이 그랬듯 외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가 교회에 다녀오면 구타하고 감금했다. 

그러나 김세지는 굴하지 않고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마침내 남편 김종겸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되자 ‘야소’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김세지는 1896년 10월 노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세례명 ‘셰듸’. 기록에 따르면 김세지는 그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이름은 그의 부인이 지어 준 것인데 오랫동안 이름이 없이 살던 나는 주의 은혜를 힘입어 세례 받던 날로부터 여자 된 권리 중에 한 가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 보면 조선 여자의 해방은 우리 그리스도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전도부인이 된 김세지는 헌신적으로 가정을 심방하고, 초상집을 찾아가 직접 시체를 염해주며 전도했다. 그 중에서도 과부나 기생, 무당, 고아 등 주로 여성들을 찾아다녔다. 선교사 보고에 따르면 김세지는 매년 2천~3천 회의 가정 방문을 했고, 매년 30여 명의 새신자를 전도했다.

무엇보다 여성운동사나 민족사적으로 김세지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보여준 여성조직 활동 때문이다. 그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교회 내 여성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내 노블 부인의 승낙을 얻어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1903년에 보호여회를 조직한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여선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여성에 의한 전도와 선교도 목적이었지만, 여성의 자기 개발과 각종 구제 활동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거둔 회비로 전도부인을 파견하거나 만주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김세지는 또 1916년엔 교회 내 과부들을 위한 ‘과부회’ 조직도 만든다. 과부의 자립과 구제를 위한 것이었다. 보호여회나 과부회는 여성이 주체적, 자급적, 자립적인 존재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활동으로 김세지는 당시 평양의 교계 여성 지도자로서 뿐 아니라 일반 여성 지도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녀가 3·1운동 직후 결성된 애국부인회 조직에 임원으로 참여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대한애국부인회 여선교회 임원들. 앞줄 중앙이 회장을 맡았던 김세지.
대한애국부인회 여선교회 임원들. 앞줄 중앙이 회장을 맡았던 김세지.

이처럼 여성은 제대로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없었던 조선 말 대한민국 초기에도 김점동과 김세지 같은 인물들은 여성운동 차원에서만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역사를 견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복음으로 변화된 이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새벽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여성차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 기독교 자리 잡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강민준은 저서 ‘한국 근대사 산책 3: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에서 신복룡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끼친 가장 큰 공헌은 그것이 한국의 민권의식을 높이는 데에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한국 사상에는 평등의 개념이 없다. 유교적 애민사상과 불교적 자비가 있으나 이것은 평등의 유사 개념이지 동일 개념은 아니다. 한국의 개화 운동이 시대적으로 기독교의 전래와 때를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본 계층은 여성이었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한국은 여성으로서는 저주받은 땅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비참했다. 보쌈이라는 약탈혼, 축첩, 종부(씨받이), 기처(棄妻), 은둔, 학대, 전(餞, 여자는 남자와 겸상을 못하고 남자가 물린 상에서 음식을 먹는 풍습) 등의 풍습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자리 잡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였다.”

여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조선에 반드시 YWCA를 세워야 한다는 결의로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간 서울 충정로 협성여자성경학원에서 제1회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 하령회가 열렸다. /한국 YMCA
여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조선에 반드시 YWCA를 세워야 한다는 결의로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간 서울 충정로 협성여자성경학원에서 제1회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 하령회가 열렸다. /한국 YMCA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 집문당, 1999)’이란 책에서 비숏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성에게 가정의 행복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한국인들에게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없다. 남편과 가정과는 동떨어진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 남자는 우정이라든가 바깥나들이 같은 것을 집안에 알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라면 남자 친구들이나 기생들과 어울리는 것이며, 결혼 관계란 양반들의 다음과 같은 대화로써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장가야 마누라에게 갔지만 재미야 소실만한가!’”

게일은 또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같은 방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알지도 못했지요. 남편은 사랑채에서 식사를 했고 나는 부엌 바닥에서 먹었으니까요. 그는 하인들 사이에서 나 오고 가는 말투로 내게 말했으며 모욕적인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흔했습니다. 화가 나거나 술이 취하면 두들겨 패는 것이 일쑤여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여염집 아낙네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받아들인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남편이 예수를 믿은 후에는 저를 때리는 일도 없어요. 우리는 사랑채에서 함께 식사하고 함께 기도하며, 내게 대한 말씨도 친절해졌고,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지난날은 참으로 악몽 같았어요. 오늘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사는 맛이에요.’”

이처럼 복음은 조선의 여성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게 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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