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자산으로 인식됐던 엔화가 일본은행의 초저금리 정책 고수에 따라 약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 22일 엔·달러 환율은 136엔을 돌파해 136.71엔까지 찍으며 1998년 10월 이후 24년 만에 최저치를 새로 썼다. /연합
안전자산으로 인식됐던 엔화가 일본은행의 초저금리 정책 고수에 따라 약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 22일 엔·달러 환율은 136엔을 돌파해 136.71엔까지 찍으며 1998년 10월 이후 24년 만에 최저치를 새로 썼다. /연합

"달러는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의 헤지 수단으로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세계 외환시장에서 독주하고 있는 달러에 대해 도이체방크의 전략가 조지 사라벨로스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달러는 최근 초강세 행보를 보이고 있고, 전 세계 투자자들은 달러 보유를 늘리고 있다. 미국 주식과 채권은 팔더라도 달러만큼은 자국 통화로 환전하지 않고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16개 통화 대비 달러의 가치를 측정하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달러인덱스는 올들어 지난 21일까지 8.5% 올랐다. 최근 1년 간 상승률은 11.5%에 달한다. 뉴욕증시가 급락한 것과 대비된다.

이 같은 달러 초강세, 즉 ‘킹 달러’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물가 상승 압력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경기침체 우려마저 부상하면서 주식과 암호화폐 등 위험자산 가격이 크게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원유 등 원자재 역시 경기에 민감해 가격 변동폭이 크다. 기준금리가 오르자 전통적 안전자산인 미국의 국채 가격도 하락하고 있다. 한마디로 달러 외에는 마땅한 안전자산이 없는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전 세계 투자자들이 미국의 주식과 채권을 팔아 확보한 달러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달러 자체가 투자자산으로서 가치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증시 및 채권시장에서 차익을 실현한 후 자국 통화로 환전 및 송금했던 과거와는 다른 행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세계 투자자들이 갖고 있는 달러 규모가 조만간 사상 최대 액수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세계 외환시장에서도 달러에 대적할 상대는 없다. 시장이 위기를 맞았을 때 달러와 함께 ‘피난처’로 여겨졌던 일본 엔화와 스위스프랑은 약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당 엔화가치는 140엔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기준금리 차이가 3%포인트 안팎까지 벌어지면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투자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통화당국은 구두 개입 외에는 환율을 방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엔화가치의 추가 하락을 점치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일본은행(BOJ)이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강제로 축소해야 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엔·달러 환율이 140엔대에 진입하면 일본의 물가상승률이 3%까지 치솟아 대응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난 15일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상하는 자이언트스텝을 단행하고, 유럽중앙은행(ECB)도 7월과 9월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하면서 마이너스(-)금리 시대의 종언을 시사했다. 반면 일본은행은 단기금리를 -0.1%로 고정하고, 장기금리는 무제한 국채 매입을 통해 0%로 유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본의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2.1% 올랐다. 이미 일본은행의 목표치인 2%대에 진입한 것이다. 그럼에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에너지 가격 상승 등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라며 시간이 지날수록 에너지가 물가를 밀어올리는 효과가 희미해지고 상승폭도 줄어들 것이라고 낙관했다. 완화적 통화정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일본은행에게 최상의 시나리오는 미국과 유럽의 기준금리 인상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는 연착륙이다. 그렇게 돼야 미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을 멈추고 엔저 압력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예상을 웃돌아 전년 동기 대비 8.6%까지 치솟았고, 이에 미 연준도 기준금리를 당초 예상보다 큰 폭인 0.75%포인트 올렸다. 물가 오름세가 진정되지 않으면 다음달 역시 자이언트스텝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행에게는 가장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3년 만에 1300원을 돌파하면서 우리 경제도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는 과거 원·달러 환율이 1300원 이상 올랐던 시기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심각한 국면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환율 수준을 근거로 과거의 위기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는 관측도 많다. 실제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올들어 지난 24일 기준 8.4% 하락한 반면 비슷한 기간 세계 16개국 통화에 대한 달러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8.5% 올랐다. 주요 국가의 통화가치에 비해 크게 하락했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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