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열
정창열

2020년 서해상에서 북한군 총격으로 숨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 씨의 형 래진 씨가 지난 6월 22일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김종호 전 민정수석 등을 공무집행방해 및 직권남용, 허위공문서작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국가안보실이 국방부·해양경찰청 등에 하달한 월북 관련 지침이 있어 월북으로 조작된 건지 파악하고자 한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바꿔 말하면, 이대준 씨 피살사건을 ‘월북 기도’로 몰아간 최고 실무 책임자로서 서훈 안보실장을 지목한 것이다.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이 발생하기 29개월 전,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확고한 한반도 비핵화 의지의 명문화 ·연내 종전 선언 등 남북 간 적대행위 금지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같은 남북관계 개선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공동 선언문을 발표한 직후 서훈 당시 국정원장은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 모습은 생중계된 방송에 그대로 포착됐다. 당시 언론들은 서 원장의 눈물에 대해, 명실상부하게 판문점 선언을 성사시킨 주역인 서 원장이 겪었을 마음고생의 의미와 함께 다가올 한반도의 평화를 생각했을 때 벅차오르는 감정이 포함된 것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뒤이은 1차 북미정상회담(2018.6), 9·19 평양 공동선언과 남북 군사합의서 채택(2018)으로 한반도에 봄이 성큼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하고 결렬된 2차 북미회담(2019.2)을 끝으로 ‘겉보기’만의 밀월은 10개월 만에 끝났다.

이후 북한은 온갖 막말을 동원하여 대한민국을 조롱하는 한편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을 시비하면서 ‘판문점 선언’의 최대 성과물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2020.6)해 버렸다. 더불어 판문점 선언 자체도 공중 분해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김정은은 문재인 정부의 일방적인 대북 구애 행위에 대해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한편 자신의 시간표대로 핵·미사일 능력을 강화해 나갔다.

판문점 선언 당시, 서훈 국정원장이 흘린 눈물의 진의가 어떻든 간에 사태가 이런 방향으로 전개된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첫째, 몇 번의 만남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리라고 판단했다면,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장으로서 대단히 무능했다는 것이다. 둘째,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판문점 선언을 성사시켰다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추진의 중심적 직책인 국정원장과 국가안보실장을 역임하면서 대국민 사기극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서훈 원장의 국정원 근무 경력과 북한의 지속적인 미사일 도발에 대해 수수방관을 넘어 김정은의 입장을 두둔하듯 해온 문 정부의 행태로 볼 때, 두 번째의 결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런 ‘대화 지상주의’와 ‘김정은 바라기’라는 정부 입장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이대준 씨 ‘월북 몰이’다. 정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억울한 죽음을 ‘강 건너 불 보듯’한 것으로도 모자라, 월북 기도로 몰아갔다. 시쳇말로 사람을 두 번 죽인 것이다.

몇몇 보도로 미루어 볼 때, 그 중심에는 국가안보실이 자리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이들에 대한 조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 사법부의 판단은 약간 늦어지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대준 씨 가족이 겪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빨리 덜어주는 동시에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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