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③ 10. 26 사건과 서울역 회군 2

沈 “柳 6월 12일 자술서에 명단 있다”-柳 “7월경 합수부서 진술”
서울역 집회 해산 결정, 沈·柳·이해찬 등 서울대 지도부가 내려
학생운동 노선 대립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야 본격화

80년 5월15일 서울역에 대규모로 집결한 학생들이 각 대학 대표자회의 토론끝에 스크럼을 짜고 서울역에서 남대문방향으로 행진을 하였다.
80년 5월15일 서울역에 대규모로 집결한 학생들이 각 대학 대표자회의 토론끝에 스크럼을 짜고 서울역에서 남대문방향으로 행진을 하였다.

서울역에 모인 10만 인파는 "계엄철폐"와 "전두환, 신현확 등 신군부 퇴진" 등을 외치며 성토대회를 이어갔다. 아울러 고대생 등이 중심이 된 대오가 남대문으로 진출하면서 군경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서울대의 이수성 학생처장이 제공한 마이크로버스에 임시지도부를 설치한 심재철, 유시민, 이해찬 등의 서울대 지도부와 서울역 대합실에 모인 16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모이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광화문을 향해 진군할 것인가? 해산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이때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임시지도부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다가 대학생과 군경이 충돌하는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따라 이튿날 서울 시내 주요 거점별로 집결할 것으로 결정한 뒤, 심재철이 마이크로버스에 올라가 해산결정을 발표했다. 이수성 학생처장은 국군기무사 쪽으로 연결해 철수하는 대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요청했다.

임시지도부, 서울역 철수를 결정하다

이에 남대문 쪽에서 군경과 대치하고 있던 신계륜(고대총학생회장), 윤여원(숭실대총학생회장) 등은 임시지도부 쪽으로 달려왔으나, 이미 중앙대오가 철수하는 상황이어서 되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남대문 쪽에 있던 고대 등의 대학생들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군경과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저녁 9시 40분경엔 완전히 해산되었다.

다음날, 전날 집결하기로 한 각 거점(영등포, 공덕동, 안암로터리, 동대문 등)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 장악돼 있었다. 그 후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취하고, 야당 정치인들과 시위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서울대 임시지도부를 구성했던 심재철, 유시민 등도 6월경에 모두 체포되었다.

반면 서울과 달리 광주의 전남대생들은 5월 18일 계엄군이 장악한 대학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를 계엄군이 강경진압하면서 시내로 진출하게 된다. 시내 진출에 대해 계엄군이 또다시 강경진압을 하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서울역 회군에 대해선 두 가지 평가가 나온다. 해산 결정을 옹호하는 측은 해산하지 않았을 경우 서울에서 군경과 학생이 유혈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고, 이는 국가적 환란으로 치달아, 북한의 남침 가능성도 높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훨씬 더 퇴보되는 상황을 맞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해산결정을 비판하는 측은 광주와 달리 서울에서는 신군부가 함부로 유혈사태를 조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서울은 수도라서 외국의 대사관이 산재하고, 국내 및 해외 언론을 차단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신군부도 무력 진압을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평가와 달리, 서울역 회군에 대한 참가자들의 진실공방도 벌어졌다. 2020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광주 MBC와의 인터뷰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언급하며, 서울역 회군에 대한 참회의 발언을 했다. 집회 해산을 발표한 미래통합당의 심재철 의원의 책임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이로 인해 심재철 의원과 유시민 이사장의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하지만, 심재철, 유시민뿐 아니라, 문재인, 신계륜, 윤여원, 이선근, 이해찬, 김부겸, 김병곤, 권형택, 이태복 등 당시 학생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던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하면 서울대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준비론’ 경향인 농법학회의 ‘무림’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투쟁보다는 지하 지도부를 구성해서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서울역 회군을 둘러싼 진실공방

그들은 학생집회(서울대 집회, 서울역 집회)에 계엄군 진주 등의 첩보가 뿌려질 때마다 해산과 철수를 반복했다. 5월 12일 오후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신군부세력에 항의하는 농성이 벌어지자, 불과 3시간 후 주화론자들이 집중된 회의에서 농성을 풀기로 결의하였다. 그때도 공수부대의 관악산 진주설이 나왔는데, 누구의 정보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이었던 이선근(학림계열)의 증언에 의하면, "저녁에 농성장으로 복귀하는데 여학생들은 울부짖고, 남학생들은 헐레벌떡 교문으로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이선근이 당시를 회고하며 블로그에 쓴 내용이다.

[학생회관으로 뛰어올라가자 유시민 대의원회 의장이 2층에서 내려오고 있기에 "농성을 풀면 안 된다고 만류하며, 우리 둘만이라도 학생회관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형님! 목숨 잘 보전하십시오." 그리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학교 안 농성도 피하자는 주화론자이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대규모 학생시위 중 신원불상의 청년이 시내버스를 탈취해 진압경찰 저지선을 뒤에서 돌진하여 전경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대규모 학생시위 중 신원불상의 청년이 시내버스를 탈취해 진압경찰 저지선을 뒤에서 돌진하여 전경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5월 15일엔 훨씬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자연스럽게 서울역에 모이게 되었다. 시위지도부의 봉고차가 집회를 지휘하였다. 많은 연사들이 나와 신군부타도와 비상계엄해제를 외쳤다. 오후가 되자 김*곤(김병곤을 지칭한 듯) 선배가 필자 옆에 앉더니 이상한 얘기를 했다.

"조금 전 대우빌딩에서 복학생과 재학생 지도부가 모여 집회 해산을 결의했고 이게 이화여대에서 열리고 있는 전국대학 학생회장단회의에 곧 전달될 것이다. 거기서 결정되면 시위지도부가 해산을 알릴 것이다." 그 뒤 많은 반대가 일어났지만 뒤에서 신군부의 선무부대가 침투한 것 같은 발언이 잇따랐다.

반대하는 발언이 나올 때마다 "과격분자"라며 욕설을 하였다. 혼란이 일자 시위지도부는 "비상연락망이 잘 만들어져 있으니 언제든 싸울 수 있다"며 설득하였다. 그러자 하나 둘 대학별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이선근 남영동인권기념관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이 같은 내용은 김부겸 전 총리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또 서울역 회군에 대해서도 신계륜과 윤여원 등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즉, 서울역 집회 해산을 발표한 것은 당시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이 맞지만, 마이크로버스에 설치된 임시지도부에서 주화론자인 서울대 지도부(심재철, 유시민, 이해찬)에서 해산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심재철과 유시민은 계엄군에게 학생운동 지도부를 털어 놓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진실공방도 벌였다. 즉, 유시민은 7월경 합수부에서 진술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지만, 심재철은 당시 심문기록을 공개하며 유시민의 자술서가 6월 12일에 작성되었으며, 77명의 학생지도부 명단이 나와 있다고 공개했다. 또, 유시민의 자술서는 자신의 유죄판결의 증거로 채택되었다고 말했다.

농법학회 등 학생운동 지도부와 김대중과 연계된 문제도 유시민은 "일관되게 진술하지 않고 숨겼다"고 했지만, 심재철은 유시민의 진술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증거자료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진실공방을 벌인 심재철과 유시민은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던 농촌법학회의 멤버였다.

무림의 준비론(주화론), 학림의 선도적 투쟁론(주전론)

농촌법학회는 당시 서울대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지하 지도부를 구성해 장기적인 항쟁을 준비하자는 ‘준비론’의 입장이었다. 이들은 공안당국의 조사과정에서 관련자가 너무 많다는 의미로 안개 무(霧)자를 붙여 ‘무림’이라고 불렸으며, 1980년 12월 11일 서울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검거되기 시작했다. 총 9명이 구속되고 90여 명이 강제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이와 달리, 1981년 6월부터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체포된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이 있다. 이태복, 이건복 형제를 비롯해 유동우, 양승조, 이선근 등이 노동자와 학생이 연대하는 비공개합법 노동운동을 도모하여 적극적인 선도투쟁을 주장했던 사람들이었다. ‘학림’이라 이름 붙여진 이유는 이들이 주로 모인 곳이 대학로에 있던 ‘학림다방’이었기 때문이다.

1979년 10.26 당시 학생운동은 유력 대학 캠퍼스 내에서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말하자면 서울대를 지도하는 집단이 운동 전체의 기조를 설정하는 힘을 지닌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서울대 지도부를 장악한 무림의 노선은 학생운동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국민대 출신 이태복과 전남대 출신인 윤상원이 주도한 학림은 영향력이 미약하였다. 세력이라고 해야, 서울의 학림, 부산의 부림, 광주의 들불야학(윤상원) 등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학생운동의 노선 대립은 서울역 회군 이후 달아올라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야 본격화되었다.

무림세력의 학생운동 노선은 ‘캠퍼스 압력론’이었다. 계엄해제와 정치 민주화에 대한 요구나 가두시위를 자제할 것과 학원 민주화 요구를 중심으로 한 교내 시위를 강조했다. 무림세력이 주도하던 서울대 총학생회가 1980년 5월 1일에야 계엄 해제와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을 보면, 무림의 기본 노선이 역량강화, 준비론에 기울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말되, 학원 내에서 압력을 가해 ‘개헌-선거-야당의 집권’이란 정치 일정이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쪽으로 구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정치적 본능은 무림의 정치구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무림세력의 노선은 서울역 회군으로 파산되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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