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기원, 조선인민혁명군 존재 않았다
북한군 기원, 조선인민혁명군 존재 않았다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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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혈통 뿌리 김일성 바로알기 [5]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1930년대 중국 공산당에 편제돼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자료에는 그런 기록이 한 줄도 없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북한의 건군 기념일인 1932년 4월 25일을 날조된 역사라며 외면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날이 김일성 주석이 1932년 안도반일유격대를 결성한 날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기록은 북한이 조선인민군의 모태라고 선전하는 안도항일유격대 관련 자료에서 김일성의 이름을 한 줄도 적지 않았다. 아울러 일본군이 만주를 강점한 1932년부터 1934년 봄까지 만주 지방 도처에서 발족된 중국 공산당 유격대 조직 어느 곳에서도 김일성이 활동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국내의 종북 세력과 북한 주민, 심지어 탈북 동포 대다수도 1945년 광복은 김일성이 이끈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과 무려 10만 차례 전투를 거듭하면서 쟁취한 결과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역사책 말고는 어느 나라 역사도 김일성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중국 공산당 기록에 김일성 이름은 없어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이 박물관에는 만주 지방의 중국 공산당 항일 투쟁 역사와 국공 내전 당시 사적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 중에는 일본군이 만주를 강점한 1932년부터 1934년 봄까지 만주 지방 도처에서 발족된 공산당 유격대의 명칭, 그 결성 시기, 지휘한 영도자, 활동 지역 등이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러나 안도반일유격대의 주요 영도인이 이영배라고 적혀 있다. 전시물 중 조직 서열표에는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부하로 말하는 양성룡은 있지만 김일성이란 이름은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북한이 혈맹이라고 여기는 중국조차 김일성의 활동 무대였다는 중국 동북 3성 만주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김일성의 이름을 단 한 줄도 써놓지 않았다. 김일성의 혁명 역사를 중국 공산당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 기록인 <조선전사(17권, 1981)>는 안도반일유격대의 발대식이 안도현에서 있었고 대원은 이영배를 포함한 다섯 명이었다고 기록했다. 5·1절에 안도반일유격대가 안도현성에 입성해 시위를 했고 며칠 후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이 방문해 대원들을 쓰다듬어 주며 격려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2)(1992년 발행)>에는 대원이 100명 가량이며 김일성이 대장 겸 정치위원이었다고 돼 있다. 이 책에는 김일성 생모 강반석이 5·1절 당일에 방문했다고 썼다. 제일 먼저 이영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덧붙여 이영배가 김일성 부하인 것처럼 묘사했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에,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간도에서 자신이 제일 먼저 반일 유격대를 조직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1958년 무렵에는 1932년 중국 안도현에서 조직했다고 말을 바꾼다. 또 1968년 쯤에는 1932년 4월 25일에 조직했다고 날짜까지 덧붙였다.

◇북한군 창건 기념일도 78년도부터 2월8일서 4월25일로 변경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말을 바꾸다 보니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도 바뀌게 된다. 당초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은 1948년 2월 8일이었다. 그날 김일성도 열병식에서 ‘조선인민군 창건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연설까지 했다. 그런데 ‘안도반일유격대’ 발족일이라고 하는 1932년 4월 25일로 소급해 인민군의 뿌리를 짜 맞추느라 창군기념일도 1978년부터는 4월 25일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이 발행한 김일성 회고록들은 특정인의 사실상의 역사가 아니라 특정인을 주인공으로 한 하나의 역사 소설적 창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소설’을 북한 주민들만 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 내부의 지식인과 정치인, 특히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들은 이 ‘소설’들을 창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였다. 또 대부분이 지금도 이런 역사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북한이 청산리 대첩 등 우리 민족의 항일 무장 투쟁 역사를 모두 지워버리고 김일성만을 유일한 항일 무장 투쟁 혁명가로 날조하는 기본 토대는 네 가지이다. 첫째,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동남 만주에서 10만여 회 전투를 백전백승하여 1945년에 조국을 해방시켰다. 둘째, 그 10만여 회 전투의 대표적 승리가 보천보 전투다. 셋째, 조국광복회를 조직하여 수십만 회원이 조국 광복의 첨병이 되게 했다. 넷째,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안하여 그 깃발 아래 자주자력의 혁명 노선을 영도해왔다.

이 중 김일성을 유일 최고의 무장 혁명가로 조작하는 대목이 첫째와 둘째 항목이다. 그런데 보천보 전투는 물론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역사도 완전히 날조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5일 조직한 조선인민혁명군이 1948년 2월 8일 창설된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전신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즉 조선인민군의 기원을 1932년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이 조선인민혁명군이 일제를 상대로 10만여 회 이상 전투를 벌여 8·15 해방을 가져왔으며 조선인민군은 항일 빨치산의 군대이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또한 항일 빨치산 부대가 만든 국가라는 것이다.

◇1930년대 국제코민테른 원칙으로 한인독자공산조직 불가능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그런데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무장 부대는 그 조직과 인솔자가 누구든 간에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만주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1국 1당’ 원칙에 따라 모두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각급 조직에 통합되어 있었다.

한인들의 독자적인 조직은 있을 수 없었고 있었다면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 코민테른의 원칙을 위반하는 무리였다. 국제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이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무장 활동을 하려면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무장 조직인 동북인민혁명군에 가입해야 했다. 실제로 많은 한인이 그렇게 활동했다.

북한에서는 1930년부터 18세 김일성(1912년생)이 조선 공산당 창건 사업에 나섰다고 날조하고 있다. 이 해부터 김일성이 조국의 해방과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1952년 최초로 김일성의 경력을 공식 발표할 때는 없던 이야기다.

북한은 1952년 처음 김일성 경력을 발표할 때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에 반일 유격대를 조직하여 무장 투쟁에 나섰다고 했다. 그런데 1968년부터는 한 해 앞당겨서 1930년 여름부터 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통현 고유수에서 발족한 조선혁명군이 바로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다. 이통현 고유수에 조선혁명군이라는 부대가 있기는 있었다. 이종락 부대가 그것이다. 국민부의 무장 부대가 1929년 12월에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되면서 이종락도 자동적으로 조선혁명군 소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부는 공산주의 단체가 아니라 민족주의 단체였다.

물론 이종락은 1930년 이후 공산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1930년 8월 이후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부 타도와 공산주의 혁명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종락은 자신의 부대를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라 개칭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 부대 대원이었다. 그 부대는 1931년 초에 이종락과 그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와해되고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김일성은 자신이 조선혁명군을 조직했다고 위조했다.

김일성의 경력은 대부분 자기의 상관 경력을 도용한 것이다. 또 그냥 도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하고 미화하고 변조해서 도용한다. 이중 삼중으로 위조하는 수법이다.

◇1930년대 조선혁명군은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제가 만주를 강제 점령하자 조선혁명군은 항일전을 벌였다. 이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는 1938년 가을까지 남만주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악착같이 싸우며 처절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북한의 항일 무장투쟁사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한 줄도 없다. 조선혁명군은 우리의 근대사와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독립군 부대다.

북한의 항일 투쟁사는 이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인 조선혁명군을 마치 김일성이 조직한 공산 혁명 부대인 것처럼 조작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조선혁명군은 처음에는 반정치적 반 군사적 조직이었다. 그러다 만주사변으로 실전에 대비해야 하게 되자 1931년 12월에 새로운 항일 유격대를 창설할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그것도 1952년 최초 공식 발표 때는 1931년에 항일 유격대를 발족시켰다고 하더니 1968년부터는 1931년엔 방침만을 세웠고 실제 발족은 1932년 4월 25일에 했다고 바꾸어 놓았다. 안도현에서 발족했다는 안도유격대가 그것이다. 이 안도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이 되었고 이것이 북한 정권 성립 뒤 조선인민군이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무력인 조선인민군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소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김일성은 ‘항일 유격대’가 아니라 ‘무력 폭력단’을 만든 적이 있다. 그는 만 19세이던 1931년 말 겨울 무송에서 스스로 두목이 되어 또래 젊은이들과 군자금을 모은답시고 부잣집을 털고 다녔다. 14세 무렵 폭력 도당인 마골 일당을 따라 다닌 경험을 살려 자신이 폭력단 두목이 되어 혁명을 빙자한 약탈질에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1931년 말 무송 일대의 중국인 사이에서는 ‘조선놈 김일성 일당’ 때문에 못살겠다는 비난이 거셌다. 이에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인 조선혁명군은 치안 유지와 한중 충돌 예방을 위해 유하현에 있는 고동뇌 소대장을 출동시켰다.

고동뇌 소대장은 아홉 명의 대원을 데리고 110km 정도 떨어진 무송까지 눈길을 헤치고 걸어서 도착했다. 일행은 피로를 풀기 위해 하룻밤을 쉬다가 미리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의 역습을 받아 그날 밤 전원이 살해되고 말았다.

김일성의 무장 투쟁 첫 승리는 이처럼 우리 독립군인 조선혁명군의 고동뇌 소대장 일행을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김일성 일당은 고동뇌 일행의 권총을 전부 거두어 그날 밤으로 무송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김일성이 만 20세 되던 1932년 2월의 일이다.

◇김일성 첫 무장투쟁, 독립군인 고동뇌 소대장 살해

북한은 오의성이 김일성을 만나 감탄했다고 주장하고있다.
북한은 오의성이 김일성을 만나 감탄했다고 주장하고있다.

이처럼 1931년에서 1932년 초에 걸친 김일성의 행적은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부끄러운 범죄 행각뿐이다. 북한은 이를 감추기 위해 항일 유격대를 조직했다는 경력을 조작해 냈다. 그리고 거짓말을 자꾸 하다보니 책이 나올 때마다 그 시기가 자꾸 바뀌었다.

1932년 스무 살 청년 김일성은 무송에서 독립군을 참살하고 안도현에 있는 중국인 오의성 부대로 갔다. 오의성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200명 가량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오의성의 당번병으로 들어갔다.

오의성 부대는 1933년에는 600명으로 병력이 늘고 왕청현을 근거지로 하다가 1934년 6월 28일에는 타 항일 부대와 연합하여 왕청현에 있는 만주국 군대를 공격한 일이 있다. 이 전투를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오의성 부대가 김일성의 지휘 아래 있었던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

이 해 봄 일제의 포위 공격이 심해지자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항일연군 제5군과 제2군 제2사 및 제3사와 오의성 부대는 서로 협의하여 연합 전선을 폈다. 이때 비로소 오의성 부대원이었던 김일성은 공산주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과 접촉하게 되었다. 특히 제2군 제2사와 제3사에는 한인이 많아 그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후 제3사는 제1로군 제2군 제6사로 이름을 바꾸며 남쪽으로 내려와 압록강 건너편 무송현 장백현으로 이동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무송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이 일대의 지리에 밝았으므로 이 전투 때 제6사장 김일성(보천보 전투의 주역으로 1937년에 사살된 김일성) 부대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 무송현 전투를 북한의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데리고 타 항일 부대와 연합하여 한 전투로 조작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이 제6사장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었음은 확인할 근거가 있다. 만주 안도현의 치안대장 이도선이라는 한인이 있었다. 이도선은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던 사람이다. 1937년 봄 이도선이 제6사장 김일성 부대 토벌에 나섰다가 한 소년 대원을 붙잡아 왔다.

◇김일성의 막내 동생 김영주 생포

김일성의 막내 동생 김영주 젊은 시절
김일성과 김일성의 막내 동생 김영주 젊은 시절

이 소년은 북한 김일성의 막내 동생 김영주였다. 열다섯 살밖에 안된 김영주는 1932년에 어머니를 잃고 둘째형 철주와 둘이서 살았다. 그러다가 1935년에 철주마저 죽자 의지할 데가 없어 큰형(북한의 김일성)을 찾아 제6사장 김일성 부대의 소년대원으로 종군하고 있었다. 마침 이도선의 형 이도일이 무송에서 살 때 북한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과 친구 사이였기에 고아인 김영주를 불쌍히 여겨 보호했다고 한다.

북한은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해서 1932년 4월부터 1945년까지 10만여 회 전투를 벌여 우리나라를 해방시켰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1940년 여름부터 1945년까지는 지하공작기였으므로 무장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북한의 주장대로 하더라도 무장 활동이 가능한 기간은 1932년부터 1940년까지 8년간이다. 8년 간에 10만여 회라고 하면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평균 34회의 전투를 한 셈이 된다. 이를 시간으로 따지면 매일 밤잠도 자지 않고 두 시간에 세 번씩 전투를 한 것이 된다. 이런 거짓말을 누가 믿겠는가.

물론 이 10만여 회라는 숫자도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 경력 창조팀은 소년 김일성의 경력은 레닌을, 그리고 항일 투쟁 시기는 마오 쩌둥을 모방했다. 이 10만여 회 전투도 마오 쩌둥의 일화를 모방한 것이다.

1945년 4월 24일 마오 쩌둥은 중국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했다. 121만 당원을 대표하여 7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중국 공산당의 중국 인민해방군은 1937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크고 작은 11만5천여 회의 전투를 했다고 발표했다.

마오 쩌둥의 군대는 정규군이기 때문에 8년간 여기저기서 11만5천여 회의 전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유격대였으므로 그렇게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전투를 치를 수 없다.

김일성이 창설하고 인솔하여 드디어는 조국 해방까지 가져온 무력 부대라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출발부터 소설이었다. 그래도 북한은 이 가공의 역사를 현실의 역사에 붙들어 매고 이것을 사실화하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공의 조선인민혁명군 살리려고 북한군 창건일 2월8일서 4월25일로

그 이유는 바로 북한의 군대 이름인 조선인민군 때문이다. 이 조선인민군은 1948년 2월 8일에 탄생했다. 처음에 북한은 이 2월 8일을 기리기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벌였다. 또 북한의 여러 공장과 단체에는 2·8이란 명칭이 많이 붙어 있다. ‘2·8 비닐론 공장’, ‘2·8 영화촬영소’ 등이 그런 것이다. 모두 조선인민군 창설을 기념하는 이름들이다.

그런데 북한은 1978년부터는 30년 동안 해오던 2·8절 행사를 취소하고 대신 ‘4·25 행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인민군의 역사를 1948년에서 1932년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즉 조선인민군은 1948년 2월 8일에 탄생했으나 조선인민혁명군은 1932년 4월 25일에 태동했다는 것이다. 둘 다 김일성이 조직한 공산 혁명군이다. 그래서 제대로 따지자면 조선인민군의 창건 기념일은 4월 25일이라야 맞는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앞서도 보았듯이 조선인민혁명군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부대다. 가공의 역사다.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란 이름을 해방 후 7년 만인 1952년에 처음 만들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68년에 창설 날짜를 1932년 4월 25일로 정했다. 또 10년이 지난 1970년에는 이 날짜가 북한 군대의 창군 기념일까지 된다.

북한은 이 조선인민혁명군을 핵심으로 해서 거대한 항일 무장 투쟁 드라마를 엮어왔다. 이 ‘집단 창작 소설’은 곧바로 북한은 항일 빨치산이 세운 국가이고 조선인민군도 이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 만든 군대라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사는 이처럼 완전히 소설이다. 1948년 9월 9일 세워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이처럼 소설에서 그 기원을 찾는 엉터리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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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The root of the North Korean army, North Korean People's Revolutionary Armed Forces did not exist

YoungJae Choe Journalist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설했다고 주장하는 그림

North Korea has been arguing that Kim Il-sung fought in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n the 1930s as a member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However, there is no such record in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ata. In particular,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disregards the anniversary of North Korea, April 25, 1932, because it is a fabricated record. North Korea says this day was when Leader Kim Il-sung formed the Ando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in 1932. However, the record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id not mention the name of Kim Il-sung in the data on the Ando anti-Japanese guerrilla propaganda that North Korea is the motherland of the Korean People's Army. There is no evidence that Kim Il-sung was active in any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guerrilla groups launched from Manchuria from 1932 to the spring of 1934, when the Japanese military had a strong foothold in Manchuria.

In South Korea, pro-North Koreas and even the majority of the North Korean defectors firmly believe that the independence in 1945 was the result of the Joseon People Revolutionary Army, led by Kim Il-sung, winning 100,000 battles with the Japanese army. However, no other history than the North Korean History textbooks state that Kim Il-sung attacked Japan into surrendering.

Chinese records about the formation of the Ando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are well displayed in the Heilongjiang Revolution Museum in Harbin, China. The museum exhibits the history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s anti-Japanese struggle in Manchuria and historical objects during the civil war. Among the exhibits are details of the name of the Communist Party guerrilla launched in Manchuria from 1932 to the spring of 1934, when the Japanese army strengthened Manchuria, the date of its formation, the leader who conducted it, and the area of activity.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However, it says that Lee Young-bae is the main leader of the Ando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The organization hierarchy table among the exhibits shows Yang Sung-ryong, whom North Korea argues to be leader Kim Il-sung’s subordinate, the name of Kim Il-sung is not there. Even the Chinese, which North Korea considers to be their bloodbath, did not write Kim Il-sung’s name in a history museum in Manchuria, 3rdnortheastChina,whichwasKimIl-sung’s main sphere of action. This means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oes not acknowledge Kim Il-sung's revolutionary history.

North Korea’s record, Joseon Warriors(17th volume, 1981), stated that the opening ceremony of the Ando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was in Andohyun and 5 members including Lee Young-bae. On 5.1, the Ando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entered the castle of Andohyun and protested, and a few days later, Kang Ban-seok, the birth mother of Kim Il-sung, visited and encouraged the members. Kim Il-sung's memoir, With the Century(2) (issued in 1992), said there were about 100 members, and Kim Il-sung was said to have been chief and political member. This book says Kim Il-sung’s birth mother Kang Ban-seok visited on the same day of 5.1. It said that he firstly stroked Lee Young-bae's head, and described him as Kim Il-sung’s subordinate.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Immediately after independence, Kim Il-sung said that when the Japanese imperialists invaded Manchuria in 1931, he was the first one to organize the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in Gando. Then, in 1958, he changed that he organized it in 1932 in Andohyun, China. In 1968, he even made up an exact date, and said that it was organized on April 25, 1932. As he changed his words, the anniversary of the Korean People's Army had to change. Originally, the KPA anniversary was on February 8, 1948. On that day, Kim Il-sung delivered a speech titled "On the occas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People's Army" at the opening ceremony. This date was changed to April 25th from 1978 to the day of anniversary of the invasion of the People's Army in order to combine the roots of the People's Army retroactively to the April 25, 1932,which was said to be the start date of the "Ando anti-Japanese guerilla group.”

Kim Il-sung's memoirs issued by North Korea are not a factual history of a person but rather a historical fiction with a specific person as the main character. The bigger problem is that not only North Koreans have read this fiction. Intellectuals and politicians in the South Korean society, especially 386 generations who attended universities in the 1980’s, acknowledged these as facts rather than fictions. Most of them still keep such historical awareness.

There are four basic foundations for North Korea to eradicate the history of anti-Japanese armed struggle of our nation, including the Cheongsan-ri battle, and to make Kim Il-sung the sol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revolutionary. Firstly, Kim Il-sung led the Joseon Labor Revolutionary Army and won 100,000 battles in Southeastern Manchuria and liberated the country in 1945. Secondly, the main victory among the 100,000 victories is the Bocheonbo Battle. Third, organizing the Korean National Security Association, hundreds of thousands of members became the advance guards of national independence. Fourth, the Juche idea of eternal immortality was invented, and the line of revolution of self - power was often under the banner.

Out of the above foundations, the first and the second ones manipulate Kim Il-sung as the best armed revolutionist. The history of the founding of the Joseon Labor Revolutionary Army, as well as the Bocheonbo Battle, has been completely fabricated. North Korea is propagandizing that the Joseon People Revolutionary Army, organized by Kim Il-sung on April 5, 1932, was the predecessor of the Joseon People Revolutionary Army, which was founded on February 8, 1948. In other words, it is raising the origins of the Joseon People Revolutionary Army until 1932. The Korean People's Revolutionary Army fought more than 100,000 battles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ts, resulting in the independence of August 15.The Joseon People Revolutionary Army was an anti-Japanese army of the North Korean partisan,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was also created by the anti-Japanese guerrilla force.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The Korean Communist Armed Forces, called the Joseon Labor Revolutionary Army, did not exist anywhere in Manchuria during the 1930s and 1940s, regardless of who their leader was. In the 1930s, Korean communists were all incorporated into the organizations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Communist Party in accordance with the principle of "One Country One Party". There were no independent organizations of Koreans, and if they existed, it would have been a group that violated the principle of the International Comintern in Moscow. The International Comintern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id not allow it. Korean communists had to join the Northeast People's Revolutionary Army, the armed organization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s Communist Party, in order to conduct armed activities. In fact, many Koreans actually did so.

In North Korea, 18-year-old Kim Il-sung (born in 1912) has faked the construction of the Communist Party of Korea since 1930. From this year, Kim Il-sung started the armed struggle for the independence of the motherland and the communist revolution. Of course, this was not mentioned in 1952 when Kim Il-sung made an official announcement for the first time.

When North Korea announced the career of Kim Il-sung in 1952 for the first time, they said Kim Il-sung organized an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in 1931, shortly after the Manchurian affair. However, from 1968 onwards, they said it was one year earlier, and it was changed to the summer of 1930. They claimed that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was from the unique number of Lee Tong-hyun.

Of course this is also a lie. There was a unit called Joseon Revolutionary Army in the unique number of Lee Tong-hyun. It is Lee Jong-rak's unit. As the Armed Forces of the National Department was reorganized into Joseon Revolutionary Army in December 1929, Lee Jong-rak automatically became the sub-leader of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However, the national wealth was not a communist organization but a nationalist organization.

Lee Jong-rak, of course ,changed to a communist after 1930. Since August 1930, he has declared a struggle for communist revolution and overthrowing the nationalist group. Lee Jong-rak renamed his unit as Joseon Revolutionary Gilgang Command. North Korea's Kim Il-sung was a member of the unit. This unit was disbanded in the early 1931 as Lee Jong-rak and his cadres were arrested, and their members were scattered all over the place. With this fact, Kim Il-sung falsified that he organized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Most of Kim Il-sung's career has been stolen from his boss’s career. It has not just been stolen but also exaggerated, beautified, and moderated. It is fabricating double and triple times.

In 1931, when the Japanese forced Manchuria to be occupied during the Manchuria Incident,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fought for an anti-Japanese battle. This Nationalist army left a record of struggling and desperate records for the independence of the motherland in the Southern Manchuria until the fall of 1938.However, there is no explanation about this in North Korea's anti-Japanese armed struggle records. Joseon Revolutionary Army is an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that will last in our modern history and our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forever. North Korea’s anti-Japanese tactics manipulated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the nationalist army, as if it were a communist revolutionary unit organized by Kim Il-sung. According to North Korean propaganda, Joseon Revolutionary Army was initially an anti-political and anti-military organization. However, when it became necessary to prepare for the war due to the Manchuria Incident, in December 1931, they set up a policy to establish a new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During the first official announcement in 1952, it was said that they launched an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in 1931. However, since 1968, they restated that it set its policy in 1931 and its actual establishment was on April 25, 1932. It is the Ando guerrilla group that started from Andohyun. This Ando guerrilla group became the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and it became the Joseon People's Army after the formation of the regime of North Korea. It can be seen that the history of the Joseon People's Army, the armed forces of North Korea, has been a novel since its inception.

In fact, Kim Il-sung at the time did not create an anti-Japanese guerrilla but an armed gang. At the end of 1931, when he was 19 years old, he became a boss himself and collected money from wealthy families, with other young men around his age. At the age of fourteen, he took advantage of his experience with the Magols, a violent faction, and became a gang leader, and he plundered under the pretext of revolution. Therefore, at the end of 1931, there was a strong criticism among the Chinese people of Musong that they would not be able deal with the 'Kim Il-sung group’anymore.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a nationalist army unit, dispatched Ko-dong-nwae, the platoon commander in Yuhahyun to maintain security and prevent conflicts.

 

북한은 오의성이 김일성을 만나 감탄했다고 주장하고있다.

The platoon commander Ko Dong-nwae arrived at Musong, about 110km away, with his9 crew members by walking across the snowy road. The party took a night off to relax and received a counterattack by Kim Il-sung’s group, who had been expecting their arrival, and all of them were killed that night. Kim Il-sung’s first victory of the armed struggle started by killing the party of the Ko Dong-nwae of the Korean Revolutionary Army. Kim Il-sung took all the pistols from the party, and disappeared after leaving Musong that night. This occurred in February 1932 when Kim Il Sung was 20 years old.

Like above, there is nothing to be proud of about what Kim Il-sung has done from 1931 to early 1932. Rather, they are shameful crimes. North Korea manipulated his experience of organizing an anti-Japanese guerrilla group to hide these. As they continued to lie, the times changed every time a book came out.

In 1932, a 20-year-old young man, Kim Il-sung, slaughtered an independence army in Musong, and went to the unit of a Chinese named Ouisung in Andohyun. Ouisung was not a communist. He had about 200 men in the troop. Kim Il-sung went into the unit as Ouisung’s messenger. In 1933, the Ouisung unit increased their troops to 600 men. It was basing on Wang Chung-hyun, and on June 28, 1934, they allied with other anti-Japanese troops and attacked the Manchurian troops in Wang Chung-hyun. In North Korea, this battle has been recorded to be led by Kim Il-sung. Also, it was fabricated that the Ouisung unit was under the command of Kim Il-sung.

In the spring of that year, as the siege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began to worsen, the 5th,2nd,and3rdtroopsundertheManchurianNortheastAnti-JapaneseArmyoftheChineseCommunistPartyandOuisung’s group negotiated, and united fronts. At that time, Kim Il-sung, a member of Ouisung’s group, came into contact with the Communist force. Particularly, there were many Koreans in the 2nd and 3rd troops, which opened up new possibilities for him.

Later, the third troop changed its name to the sixth troop of the second group of the first army, and went south and moved to Jangbaekyun, Musonghyun, across from Aprok River. Kim Il-sung of North Korea was a person who lived in Musong, and knew the geography of this area, so it is very likely that he was involved in the 6th leader Kim Il-sung (Kim Il-sungwho was shot in 1937 due to the Bocheonbo Battle) during this battle. However, North Korea has fabricated that thier Kim Il-sung has been fighting in the Musonghyun Battle in combat with other anti-Japanese forces along with the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There is an evidence to confirm that Kim Il-sung of North Korea was a member of the 6th leader Kim Il-sung army. There was a Korean man named Lee Do-sun, the chief commander of Andohyun in Manchuria. He showed outstanding skills in the Northeast anti-Japanese warfare subjugation. In the spring of 1937, Lee Do-sun came to the subordination of the 6th leader, and captured a boy. This boy was Kim Young-joo, the youngest brother of North Korea's Kim Il-sung. Kim Young-joo, who was only fifteen years old, lost his mother in 1932 and lived with Chul-joo, his second older brother. Then, after the death of Chul-joo in 1935, he was unable to depend on anybody, thus, he served as a young man of the 6th leader Kim Il-sung army in search of the big brother (Kim Il-sung of North Korea). Because Lee Do-il, Lee Do-sun’s older brother, was a friend of Kim Hyung-sik who was the father of North Korea’s Kim Il-sung when he lived in Musong, he had pity and protected Kim Young-joo who was an orphan.

김일성과 김일성의 막내동생 김영주 젊었을 때 사진

North Korea propagandizes that Kim Il-sung founded the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and fought in around 100,000 battles between April 1932 and 1945, liberating Korea. However, from the summer of 1940 until 1945, it was an underground maneuvering period, so it was not possible to do armed activities. Despite North Korea's assertion, the period of possible armed activities is eight years from 1932 to 1940. If you say 100,000 times in eight years, that means he had an average of 34 battles a day without taking a day off. If you calculate this in terms of time, he could not even sleep every night, in order to have 3 battles every two hours. Who would believe such a lie?

Of course, the figure of 100,000 times has not been just made up. North Korea’s Kim Il-sung career creation team imitated Lenin’s career for the boy Kim Il-sung, and imitated Mao Zedong’s career for his anti-Japanese struggle period. These 100,000 battles mimicked Mao Zedong's anecdote.

On April 24, 1945, Mao Zedong convened the 7th National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on the Chinese coast. On the occasion of 700 representatives representing 121 million members, the People's Liberation Army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announced that it had 115,000 large and small battles from September 1937 to March 1945. Since Mao's army is a regular army, it can have 115,000 battles in 8 years. However, North Korea’s Kim Il-sung’s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was not a regular army, rather a small guerrilla force, so it could not fight at once in various locations.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which was the armed forces that Kim Il-Sung founded and led and eventually liberated the country, was a fiction from the start. Still, North Korea is trying to keep this processed history in the real history and to make it real. Why? This is because of the North Korean military name, the Joseon People's Army. The Joseon People's Army was established on February 8, 1948. Initially, North Korea held various events to celebrate this date: February 8th. Also, many factories and organizations in North Korea have names containing 2·8,”for example, '2·8 Vinylon Factory' and '2·8 Movie Studio.' These names all commemorate the creation of the Joseon People's Army.

However, since 1978, North Korea has canceled the 2·8 events which they have been doing for thirty years, and instead started to hold '4·25 events'. This brought the history of the Joseon People's Army from 1948 to 1932. In other words, the Joseon People's Army was founded on February 8, 1948, but the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was founded on April 25, 1932. Both are communist revolutionary groups organized by Kim Il-sung. That is why North Korea claims that the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Korean People's Army should be celebrated on April 25th.

As stated above, the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was a unit that was not even existent from the beginning. It is fabricated history. North Korea first made the name of the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in 1952, seven years after its independence. In 1968, 16 years later, the date of its foundation was April 25, 1932. Ten years later, in 1970, this date was became the anniversary of the North Korean military, too.

North Korea has made a hug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drama at the core of the Joseon People's Revolutionary Army. This 'collective novel' is directly connected to the story that North Korea is a country founded by an anti-Japanese guerilla force and that the Joseon People's Army is an army built by generals from this anti-Japanese guerilla force. Kim Il-sung’s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s thus a complete fiction. The Democratic People's Korea, which was established on September 9, 1948, is a foolish group looking for its origins in no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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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판>

北朝鮮軍のルーツ、朝鮮人民革命軍は存在しなかった

崔寧宰 記者

北朝鮮は、金日成首席が1930年代に中国共産党に編制され、抗日武装闘争を展開したとプロパガンダしている。しかし、中国共産党の資料には、そういった記録はただの一行も記録されていない。特に中国共産党は、北朝鮮の建軍記念日である1932年4月25日を捏造の歴史として無視している。北朝鮮は、この日が、金日成首席が1932年に安図(アンド)反日パルチザンを結成した日だとプロバガンダしている。

ところが中国共産党の記録では、北朝鮮が朝鮮人民軍の母胎だとプロパガンダする安図抗日パルチザン関連資料において、金日成の名が一言も出てこない。さらには、日本軍が満州を強制占領した1932年から1934年春まで、満州地方のいたる所で発足した中国共産党パルチザン組織のどこにも、金日成の活動記録を見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国内の従北勢力と北朝鮮の住民、甚だしくは同胞の大多数すらも、1945年の光復は金日成率いる朝鮮人民革命軍が、日本軍となんと10万回以上の戦闘を重ねて争奪した結果であると固く信じている。しかし、北朝鮮の歴史書以外いかなる国の歴史においても、金日成が日本軍を降伏させたという記録を探し出すことはできない。

安図反日パルチザン結成に関する中国側の記録は、中国のハルビンにある黒龍江省革命博物館に展示されている。この博物館には、満州地方における中国共産党の抗日闘争歴史と国共内戦当時の史跡物が展示されている。展示物の中では、日本軍が満州を強占した1932年から1934年の春まで、満洲のいたるところで発足した共産党パルチザンの名称、その結成時期、指揮を取った指導者、活動地域等が詳しく明かされている。

しかし、安図パルチザンの主要指導者は李英培(イ・ヨンベ)だと記されている。展示物の中の序列表には、北朝鮮が金日成首席の部下だとする梁成龍(ヤン・ソンリョン)の名はあるが、金日成という名前はまったく登場しない。北朝鮮が血盟と捉える中国ですら、金日成の活動舞台であったという中国東北三省・満州の歴史博物館に、金日成の名前をただの一行も書き記してない。金日成の革命歴史を中国共産党は認めていないのだ。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北朝鮮の記録である『朝鮮戦史(17巻、1981)』は、安図パルチザンの発隊式が安図県で行われた時、隊員は李英培を含めて5、6名だったと記録している。5・1節に安図パルチザンが安図県城に入城してデモを行い、その数日後に金日成の生母である康盤石(カン・バンソク)が訪ねてきて、隊員たちの頭をなでながら激励したと書かれている。

ところが金日成回顧録『世紀と共に(2)(1992年発行)』では、隊員が100名ほどおり、金日成が大将、兼政治委員であったとなっている。この本には金日成の生母・康盤石が5・1節当日に訪問したとある。一番最初に李英倍の頭をなでたという内容を付け加えて、李英培が金日成の部下であるかのごとく描写している。

金日成は解放直後、1931年に日帝が満州を侵略すると、間島(カンド)で自分が一番初めに反日パルチザンを組織したと語った。それなのに、1958年頃には、1923年に中国安図県で組織したと言葉を変えた。また1968年頃には、1932年4月25日に組織したと日付まで加えた。それに従って、朝鮮人民軍創軍記念日も変更することになる。

当初、朝鮮人民軍創軍記念日は1948年2月8日であった。その日、金日成も列兵式で、「朝鮮人民軍創建に際して」という題目の演説まで行っている。ところが、人民軍のルーツを、「安図反日パルチザン」発足だと主張する1932年4月25日に遡って合わせようと、1978年からは創軍記念日も4月25日に変更して今日に至っている。

北朝鮮が発行した金日成回顧録は、特定の人物の事実上の歴史ではなく、特定の人物を主人公にした一種の歴史小説的創作品だといえる。さらに大きな問題は、この「小説」を北朝鮮の住民だけが読む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だ。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韓国社会内部の知識人や政治家、特に1980年代に大学生であったいわゆる386世代は、この「小説」を創作としてではなく、「事実」として受け入れた。またその大部分が、今もこのような歴史認識を捨てずにいるのである。

北朝鮮が青山(チョンサン)里の戦い等、我が民族の抗日武装闘争の歴史をすべて消し去り、金日成のみが唯一なる抗日武装闘争革命家として捏造する基本となる土台は4種類ほどある。その一、金日成が朝鮮人民革命軍を率いて東南満州における10万回を超える戦闘で百戦百勝し、1945年に祖国を解放させた。その二、その10万回以上の戦闘のうち、代表的な勝利が普天堡(ポチョンボ)戦闘だ。その三、祖国光復会を組織し、数十万人の会員が祖国光復の尖兵となった。その四、永遠不滅の主体思想を創案し、その旗の下に自主自力の革命路線を率いてきた。

このうち、金日成を唯一最高の武装革命家であると捏造したのは一番目と二番目の項目だ。しかし、普天堡戦闘はもちろん、朝鮮人民革命軍の創建歴史も完全に捏造である。北朝鮮は、金日成が1932年4月5日に組織した朝鮮人民革命軍が、1948年2月8日に創設された北朝鮮の朝鮮人民軍の前身だとプロパガンダしている。

即ち、朝鮮人民軍の起源を1932年まで遡らせている。この朝鮮人民革命軍が、日帝を相手に10万回以上の戦闘を展開しながら8.15解放をもたらしたのであり、朝鮮人民軍は抗日パルチザンの軍隊であり、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もまた、抗日パルチザン部隊がつくった国家だというのである。

しかし、 組織やリーダーの名称の如何に関わらず、「朝鮮人民革命軍」という朝鮮人共産主義者による武装部隊自体、1930年代から1940年代における満州のどこにも存在していなかった。1930年代の朝鮮人共産主義者たちは、「1国1党」の原則に従って、すべて中国共産党満州省委員会各レベル組織に統合されていた。

朝鮮人の独自的組織というものは存在し得ず、もし存在したとするならば、モスクワにある国際コミンテルン(第3インターナショナル)の原則に違反する群れであった。国際コミンテルンと中国共産党が、それを許可することはなかった。朝鮮人共産主義者たちが武装活動をしようとすれば、中国共産党満州省委員会の武装組織である東北人民革命軍に加入しなければならず、実際、多くの朝鮮人がそのように活動したのである。

北朝鮮は、18歳の金日成(1912年生まれ)が、1930年から朝鮮共産党創建事業に取り組んだと捏造している。金日成が、この年から祖国解放と共産主義革命のための武装闘争を始めたというのだ。もちろんこれも、1952年に初めて金日成の経歴を公式発表した時にはなかったストーリーだ。

안도반일유격대 결성에 관한 중국 측 기록들은 중국 하얼빈에 있는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돼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활동기록이 없다. 

北朝鮮が1952年の初めに金日成の経歴を発表した時には、1931年の満州事変直後に反日パルチザンを組織し、武装闘争に取り組んだとした。ところが1968年からは、1年早めて1930年の夏からだと内容を変えた。伊通(イトン)県・狐楡樹(コユス)で発足した朝鮮革命軍がまさにそれだという主張だ。

もちろん、これも嘘である。 伊通県・狐楡樹に朝鮮革命軍という部隊があったのは事実で、李鍾洛(イ・ジョンラク)部隊がそれだ。国民部の武装部隊が1929年12月に朝鮮革命軍に改変されながら、李鍾洛も自動的に朝鮮革命軍小隊長となった。しかし国民部は共産主義団体ではなく、民族主義団体だ。

李鍾洛が1930年以降、共産主義に転向したという事実はある。彼は1930年8月以降、民族主義団体である国民部打倒と共産主義革命闘争を宣言して立ち上がった。李鍾洛は、自らの部隊を朝鮮革命軍・吉江(キルガン)指揮部と改称した。北朝鮮の金日成は、その部隊の隊員であった。

彼の部隊は、1931年の初めに李鍾洛とその幹部たちが逮捕されることで瓦解し、隊員たちは四散した。このような事実をもって金日成は、自らが朝鮮革命軍を組織したと偽った。

 金日成の経歴は大部分、彼の上官の経歴を盗用したものだ。それも、ただ盗用するのではなく、誇張、美化、変造して盗用する。二重、三重に偽造するというやり方だ。

 

1931年の満州事変で、日帝が満州を強制占領するや、朝鮮革命軍は抗日戦を展開した。この民族主義独立軍部隊は、1938年の秋まで南満州において祖国の独立のために懸命に戦い、凄絶な記録を残した。しかし北朝鮮の抗日武装闘争史には、これに対する説明が一言もない。朝鮮革命軍は、我が民族の軍隊史と独立運動史に長く残る独立軍部隊だ。

北朝鮮の抗日闘争史は、この民族主義独立軍部隊である「朝鮮革命軍」を、まるで金日成が組織した共産革命部隊であるかのように捏造した。北朝鮮のプロパガンダによれば、朝鮮革命軍は初めは半ば政治的、半ば軍事的組織であった。それが、満州事変により実戦に備える必要性が生じたことで、1931年12月に新しい抗日パルチザンを創設する方針を打ち立てたのだという。

それも、1952年の最初の公式発表の時には、「1931年に抗日パルチザンを発足させた」といったかと思うと、1968年からは、「1931年には方針を打ち立てただけで、事実上の発足は1932年4月25日であった」と変造した。

安図県で発足したという安図パルチザンがそれだ。この安図パルチザンが朝鮮人民革命軍となり、これが北朝鮮政権成立後、朝鮮人民軍になったというのである。北朝鮮の武力である朝鮮人民軍の歴史は、スタートからして小説であることが分かる。

実際この時期、金日成は「抗日パルチザン」ではなく「武力暴力団」を組織したことがある。満19歳であった1931年末の冬、茂松(ムソン)において自らが頭目となり、同世代の若者たちと共に軍資金を集めるという名目で資産家の家を略奪して回った。14歳の頃、暴力徒党である馬骨(マゴル)の一党について回った経験を活かし、自らが暴力団の頭目となり、革命にかこつけた略奪行為を行ったのである。そのため、1931年末頃、茂松の中国人の間では、「朝鮮野郎、金日成一味」のために生活が成り立たないという激しい非難があった。これに対して民族主義独立軍部隊である朝鮮革命軍は、治安維持と韓中衝突を防ぐために、柳河(ユハ)県にいる高東雷(コ・ドンノェ)小隊長を出動させた。

 

高東雷小隊長は、9名の隊員を連れて、110kmほど離れた茂松まで雪道を徒歩で行進して到着した。一行は、疲れを癒すために一晩休んでいたところを、事前に情報入手した金日成一味の逆襲を受け、その日の夜に全員殺害されてしまった。

金日成の武装闘争の初勝利は、このように我が独立軍である朝鮮革命軍の高東雷小隊長一行を殺害することによりスタートした。金日成一味は高東雷一行の拳銃をすべて奪い集め、その日の晩に茂松を立ち去り形跡を隠した。金日成が満20歳になった、1932年2月のことだ。

このように、1931年から1932年の初めにかけての金日成の行跡に、自慢できるようなものは何もない。むしろ、恥ずべき犯罪行為の連続である。北朝鮮は、この事実を隠すために「抗日パルチザンを組織した」という経歴を捏造した。嘘を頻繁につくので、本を出版するたびに年数も頻繁に変わっていった。

1932年、二十歳の青年・金日成は、茂松で独立軍を惨殺した後、安図県の中国人・呉義成(オ・ウィソン)部隊に向かった。呉義成は共産主義者ではなかったが、200名程度の兵力を保有していた。金日成は呉義成の当番兵として入隊した。呉義成部隊は、1933年には兵力を600名に伸ばし、望城(ワンチョン)県を根拠地としていたのが、1934年6月28日には他の抗日部隊と連合して、望城県にいる満州国軍隊を攻撃したことがある。

北朝鮮は、この戦闘を金日成が行ったと記録している。また呉義成部隊が金日成の指揮下にあったと捏造している。

この年の春、日帝の包囲攻撃がひどくなると、中国共産党満州省委傘下、東北抗日連軍第5軍と第2軍第2師、及び第3師と呉義成部隊は協議の上、連合戦線を組んだ。呉義成部隊員であった金日成は、この時初めて、共産主義部隊である東北抗日連軍と接触するようになった。特に第2軍第2師と第3師には朝鮮人が多く、金日成に新しい可能性を開いてくれることとなった。

以後、第3師は第1路軍第2軍第6師に名を変えて南下し、鴨緑江の向かい側にある茂松県、長白県に移動した。北朝鮮の金日成は、茂松で生活した経験からこの地域一帯の地理に明るかったために、この戦闘の時に第6師長キム・イルソン(普天堡戦闘の主役で1937年に刺殺されたキム・イルソン)部隊に加担した可能性が大きい。ところが北朝鮮ではこの茂松県の戦闘を、北朝鮮の金日成が朝鮮人民革命軍を率いて、他の抗日部隊と連合して行った戦闘だと捏造している。

北朝鮮の金日成が、第6師長キム・イルソン部隊の隊員であったことは、確認可能な根拠がある。満州・安図県の治安隊長で李道善(イ・ドソン)という朝鮮人がいた。李道善は東北抗日連軍討伐に優れた腕を発揮した人物であった。1937年の春、李道善が第6師長キム・イルソン部隊討伐に取り組みながら、一人の少年を捕まえてきた。

この少年は北朝鮮の金日成の末弟、金英柱(キム・ヨンジュ)であった。わずか15歳であった金英柱は、1932年に母を失い、二番目の兄の哲柱(チョルジュ)と二人で暮らしていた。そのうち1935年に哲柱まで死ぬと、頼るあてがなく、長兄(北朝鮮の金日成)を訪ねて第6師長キム・イルソン部隊の少年隊員として従軍した。ちょうど李道善の兄、李道日(イ・ドイル)が茂松に住んでいる時に、北朝鮮の金日成の父・金亨稷(キム・ヒョンジク)と友人であったことから、孤児となった金英柱をかわいそうに思って保護したのだという。

 

北朝鮮は、金日成が朝鮮人民革命軍を創設し、1932年4月から1945年まで10万回を超える戦闘を展開しながら我が国を解放したとプロパガンダしている。しかし、1940年の夏から1945年までは地下工作期間であったため、武装活動を行うことはできなかった。

たとえ北朝鮮の主張通りだったとしても、武装活動が可能な期間は1932年から1940年までの8年間だ。8年間に10万回余りといえば、一日も休まずに一日平均34回の戦闘をしたことになる。これを時間計算すると、毎日夜も寝ないで2時間に3回ずつ戦闘をしたことになる。こんな嘘を誰が信じるだろうか。

もちろんこの10万余回という数字も、何の根拠もなくただ出てきた数字ではない。北朝鮮の金日成経歴創造チームは、少年・金日成の経歴はレーニンを、また抗日闘争の時期は毛沢東を模倣した。この「10万回余りの戦闘」というのも毛沢東の逸話を真似たものだ。

1945年4月24日、毛沢東は中国・延安で中国共産党第7次全国代表大会を招集した。121万の党員を代表して、700名余りの代表が参加したこの場で、中国共産党の中国人民解放軍は1937年9月から1945年3月まで、大小11万5千回以上の戦闘を行ったと発表した。

毛沢東の軍隊は正規軍であるため、8年間にあちこちで11万5千回の戦闘をすることもあり得る話だ。しかし北朝鮮の金日成の朝鮮人民革命軍は、正規軍ではなく小規模のパルチザンであったため、そのように一度に複数の場所で戦闘を行うことは不可能だ。

金日成が創設して率い、最終的には祖国解放までもたらした武力部隊だという朝鮮人民革命軍は、出発点からして小説であった。それでも北朝鮮は、この架空の歴史を現実の歴史にとってつけ、これを事実化しようと総力を挙げている。その理由は何だろうか?それはまさに、北朝鮮の軍隊名である朝鮮人民軍のためだ。この朝鮮人民軍は1948年2月8日に誕生した。

最初、北朝鮮はこの2月8日を称えるために、様々な行事を開催した。また北朝鮮の様々な工場と団体には、2・8という名称が多くつけられている。「2・8ビニロン工場」、「2・8映画撮影所」等がそれだ。すべて朝鮮人民軍創設を記念する名前である。

ところが北朝鮮は、1978年から30年間開催してきた2・8節の行事を取り消し、代わりに「4・25行事」を展開し始めた。これは朝鮮人民軍の歴史を1948年から1932年まで遡らせたのである。即ち、朝鮮人民軍は1948年2月8日に誕生したが、朝鮮人民革命軍は1932年4月25日に胎動した。二つとも金日成が組織した共産革命だ。そのため、正確にいえば、朝鮮人民軍の創建記念日は4月25日こそ正しいというのが北朝鮮の主張だ。

前述したように、朝鮮人民革命軍は当初から存在しなかった部隊だ。架空の歴史である。北朝鮮は、朝鮮人民革命軍という名称を、解放後7年が経過した1952年に初めてつくった。それから16年が過ぎた1968年に、創設日を1932年4月25日と定める。さらに10年が経過した1978年には、この日が北朝鮮軍隊の創軍記念日にまでなるのである。

北朝鮮は、この朝鮮人民革命軍を核心として、巨大な抗日武装闘争ドラマを描いてきた。この「集団創作小説」は、まさに「北朝鮮は抗日パルチザンが立てた国家であり、朝鮮人民軍もこの抗日パルチザン出身者がつくった軍隊だ」というストーリーに繋がる。金日成の抗日武装闘争は、完全に小説だ。1948年9月9日に建てられた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は、このように小説にその起源を置くほら吹き集団なのである。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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