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詩와 이야기 그리고...오선지 흐르는 거리, 대구

대소시 속 숨어있는 여유와 한적함
추기경의 숨결이 아로새겨진 성당
섬처럼 남아 있는 시인의 고택
붉은 벽돌담 끝자락엔 40년된 '다방'

청라언덕 3·1운동길.
청라언덕 3·1운동길.

대구는 오래된 시간이 남아 있는 도시다. 진골목에서 시작해 약전시장을 지나 청라언덕까지 이어지는 도보 여행길에서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간과 만난다. 조금은 퇴색했고 조금은 이국적이고 그래서 조금 더 정이 간다. 방천시장은 가수 고 김광석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그를 추억하며 따라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1시간 40분을 가면 동대구역이다. 대전을 지나 한숨 까무룩 졸면,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앨범을 한 바퀴 들으면, 소설책을 반쯤 읽으면 도착한다. 동대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반월당 네거리에서 내린다. 대형 쇼핑센터와 백화점이 들어선 이곳은 대구의 최고 번화가다. 대구 걷기 여행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반월당 네거리에서 한일극장 쪽으로 걷다 중앙시네마 옆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붕붕거리던 도시의 소음이 일순간 모두 사라진다. 2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붉은 벽돌을 쌓은 담장이 이어지고 약간 촌스러운 서체의 아크릴 식당 간판이 어지럽다. 중절모를 쓴 노인들이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지난다. 이 골목의 이름은 진골목.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이곳은 마치 섬처럼 무심하게 떠 있다.

‘진골목’이라는 이름은 ‘긴 골목’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경상도에서는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는데 이 때문에 ‘긴 골목’이 ‘진골목’으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이름만큼 길지는 않다. 고작해야 100m 남짓 될까. 한때 이곳에 대구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모여 살았지만 세월이 흘러 그들은 떠났고 고래등 같던 대저택들은 요정과 술집 골목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숯불갈비 집으로, 보리밥 집,아구찜 집, 한방백숙 집 등으로 다시 변했다.

서문시장.
서문시장.

그나마 옛 모습을 지키고 남아 있는 집이 정소아과다. 붉은 벽돌담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진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정 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층집을 만날 수 있다. 현존하는 대구 최고의 양옥 건물이다. 1937년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건립한 주택인데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건축 풍이라고 한다.

진골목 끝에는 옛날 다방이 있다. ‘미도다방’이다. 1982년 문을 연 뒤로 대구˙경북 지역의 정치인과 유림, 문인 사이에서 명소가 됐다. 손님 대부분은 70·80대 노인이다. 웬만큼 머리가 희끗희끗하지 않으면 자리에 앉아 있기가 민망할 정도다.

약전골목을 나와 대로를 따라 걸으면 운치 있는 성당과 만난다. 계산성당이다. 프랑스 선교사 로베르가 설계한 것으로 서울·평양에 이은 세 번째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서울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들이 내려와 1902년 지었다고 한다. 시인 이상화가 이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나의 침실로>를 지었고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사제 서품식도 이곳 계산성당에서 치렀다.

내부는 아름답다. 높은 아치형 천장을 통과한 햇살은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들의 조각상 위로무한정 쏟아져 내린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초기 대구 천주교 신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색이 어찌나 고운지 성당을 나와서도 눈에 아른거릴 정도다.

계산성당을 옆으로 몇 걸음만 걸어가면 즐비한 고층 빌딩 사이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의 옛집이 섬처럼 남아 있다. 이곳에서 시인은 1939년부터 임종 때까지 약 4년간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

성당 맞은편으로 우뚝 솟은 첨탑이 보인다. 대구제일교회다. 교회 뒤편이 청라언덕.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라는 노래 ‘동무 생각’의 무대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은 3.1운동길이다. 1919년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이 길을 통해 서문시장으로 나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계단이 모두 90개여서 일명 90계단길로도 불리며 <운수 좋은 날>, <빈처>를 쓴 소설가 현진건이 자주 산책하던 곳이라고 해 ‘현진건길’이라고도 불린다.

청라언덕에 오르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예쁜 집이 세 채 서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선교박물관·의료박물관·교육역사박물관이다. 미국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지어졌는데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이상화 시인의 그림이 그려진 진골목.
이상화 시인의 그림이 그려진 진골목.

대구에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여행지가 많다. 대구시는 시 곳곳에 자리한 생태자원들을 활용해 ‘대구 내추럴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대구 시내권 여행코스와는 달리 북적이는 관광객에 떠밀려 시간에 쫓기며 여행지를 둘러보지 않아도 되고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여행지를 돌아봐도 좋은 곳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비슬산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산이다. 봄이면 정상부를 붉게 뒤덮는 철쭉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비슬산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전기자동차를 타고 20분 남짓 오르면 웅장한 바위들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대견사를 만난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초임 주지로 임명받아 10년간 주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전국적인 기도 도량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남쪽 눈앞으로는 시야가 탁 트여 굽이치는 낙동강과 달성을 전망할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추노〉, 〈대왕의 꿈〉, 〈장영실〉 등 굵직굵직한 사극 드라마들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사문진 나루터는 한때 낙동강 하류를 대표하는 나루터였다. 조선시대에는 왜와의 무역중심지 역할을 해 무역창고인 왜물고(倭物庫)가 설립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부산 구포에서 경상북도 안동 사이를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사문이라는 이름은 낙동강 홍수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어 모래를 거쳐서 배를 탄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대견사 탑과 비슬산 능선.
대견사 탑과 비슬산 능선.

사문진 나루터는 한국 최초로 피아노를 들여온 곳이기도 하다. 1900년 3월 26일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보턴 부부가 대구 지역 교회로 부임하면서 피아노를 가지고 왔다. 당시에 짐꾼 20여 명이 사흘 동안 지금의 약전 골목 부근의 선교사 자택까지 피아노를 힘겹게 옮겼다고 한다. 당시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은 주민들은 빈 나무통 안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겨 통 안에서 귀신이 내는 소리라 하여 ‘귀신통’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문진 나루터에서는 유람선을 타보는 것도 좋을 듯. 그 옛날의 나룻배를 대신해 낙동강을 유람하는 여객선이 운항한다. 상쾌한 강바람을 맞으며 유람선을 타고 유유히 가로지르는 낙동강은 색다른 감흥을 선사한다.

사문진나루터 옆 화원동산은 대구의 여유로움을 흠뻑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공원을 한 바퀴 일주하는 산책로는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가는 길은 느티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예쁜 숲길. 가족과 혹은 연인과 함께 손을 꼭 잡고 걷다 보면 더 깊어가는 여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 정보]

경상도식 추어탕.
경상도식 추어탕.

비슬산 가기 전 꼭 들러야 할 곳은 국립대구과학관이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한다. 자연과 과학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시설이 가득하다. 대구는 ‘막창’으로 유명하다. 연탄불이나 숯불에 구운 다음 집집마다 비법을 동원해 만든 된장소스에 찍어 마늘과 쪽파를 곁들여 먹는다. 마루막창(053-953-3003)이 요즘 뜨는 곳. 동인파출소 뒷골목에 찜갈비 골목이 있는데 20여 개의 찜갈비집이 성업 중이다. 갈빗살에 빨간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은 양념과 함께 조리하는데 등줄기에 땀이 배일 정도로 화끈하게 매운맛이 특징이다. 낙영찜갈비(053-423-3330), 벙글벙글 찜갈비 (053-424-6881)가 유명하다. 진골목 막다른 길 끝에 진골목식당(053-253-3757)이 있다. 이 식당에서 고춧가루를 넣은 칼칼한 고깃국을 끓여내면서 ‘육개장’이란 음식이 시작됐다. 상주식당(053-425-5924)은 경상도식 추어탕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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