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④ 5.18 광주민주화운동

‘美, 무력진압 용인설’은 정파적 이해관계 앞세운 진실왜곡·억측
공수부대, 무차별 공격에 격분한 시위대 20일 20만명까지 늘어
27일 계엄군 2만5000명 투입 대대적 ‘상무충정 진압작전’ 시작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앞 분수대에 모여있는 광주 시민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앞 분수대에 모여있는 광주 시민들.

5.16 서울역 회군으로 시간을 번 신군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전국으로 계엄군을 확대 배치하는 한편, 5월 17일 오후 9시에는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보안사령부는 10시경 야당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는 병력을 국회에 배치해 국회기능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5월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대학 휴교령, 보도검열 강화, 정치활동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계엄포고령 10호가 선포되었다. 새벽 2시에는 제7공수부대가 조선대와 전남대를 점령했고, 각 조별로 광주시내와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며 검문, 검속을 단행했다.

사실 신군부는 79년 부마민주항쟁 때처럼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 3월부터 공수부대에서 시위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이동 배치하여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신군부, 계엄확대 무력진압을 준비하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9시 등교를 하던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교문을 막아선 계엄군에 대항해 공수부대에게 돌을 던지기 작했다. 이에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며 곤봉으로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흥분한 대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했고, 카톨릭 회관 앞에 300여명이 집결하였다. 이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대치상태에 있던 상황은 4시경 제7공수여단이 투입되면서 바뀌었다. 공수부대는 시위학생은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대검과 곤봉으로 무차별 가격했다.

이날 광주 시민들에게 가해진 계엄군의 살상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날 북동에 있었던 동아일보 광주 지사에서 있었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곳에 정은철 총무와 배달학생, 그리고 도망 온 시민 3명이 있었다.

공수부대원이 건물로 들어와 도망 온 시민 3명을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긴 뒤 데리고 갔다. 한참 뒤, 다시 들어온 두 군인이 업무를 보던 정은철 총무를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리곤 두 다리를 잡고 끌고 갔다. 이어 배달 학생인 박준하도 마찬가지로 진압봉으로 때리고 끌고 갔다.

또, 조선대 의대생인 이민오씨는 광주일고 동문체육대회에 참가했다가 교장관사로 피신했다가 구타당하고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친구들과 점심 먹고 돌아오다가 구타를 당했다. 그로인해 눈이 터지고 어깨가 부서졌고, 대퇴부가 으깨지는 부상을 당한 뒤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사망했다.

공수부대의 폭력진압,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다

이처럼 공수부대가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무차별 폭력을 가하자, 시위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19일부터 일반시민과 고등학생까지 합세하기 시작했고, 시위대는 3천여 명으로, 20일에는 20만 명까지 불어났다. 그럼에도 진압봉과 대검을 동원한 공수부대원의 폭력적 진압방식은 변함이 없었다. 시민들이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항의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광주mbc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했다. 이에 시민들이 광주mbc에 몰려가 방화를 했다.

전남 광주 시내에서 진압봉으로 광주 시민을 폭행하는 계엄군.

20일 24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금지가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했다. 21일 정오경 전남대 앞에서, 오후 1시에는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 또 각조별로 금남로의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에 대항해 시민들도 무장하기 시작했다. 나주와 화순군의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 몰려가 총을 들고 시민군을 결성했다. 또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고 나주, 화순 등지로 광주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그리고 탈취한 총과 실탄, 폭약을 시민들에게 분배했다.

이렇게 시민군이 무장을 하자, 계엄군은 외곽지역으로 퇴각하고 광주시를 봉쇄했다.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에 대한 경고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해 발표토록 했다. 담화문은 광주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이름 짓고 불순분자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고 갔다.

21일 19시 30분 광주시 외곽도로를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떨어졌고, 21시 30분에는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었다. 그 후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 등 집단 학살이 이뤄졌고, 계엄군간의 오인 교전으로 1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2일 이후 광주에서는 고립된 가운데, 시민들에 의한 자치질서가 진행되었다. 평화적 집회를 지속하며 "계엄해제와 민주인사 석방"을 요구했다.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며 계엄군과 협상에 나섰다. 또, 자발적으로 헌혈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시민정신이 발휘되었다.

하지만, 항쟁의 지도부는 계엄군과의 협상을 하면서 강, 온파로 나뉘어 논란을 지속했다. 일부는 계엄사에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무장해제를 하자고 했고, 일부는 무장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 27일 새벽, 마침내 계엄군은 군인 25,000명을 투입하며 진압작전(상무충정작전)을 시작했다. 2시에 광주시내로 진입한 계엄군은 도청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이에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은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하자’는 의견으로 나뉘고, 의견일치를 못 본 채 날이 밝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 ‘들불야학’

마침내 계엄군이 저항하는 시민군을 사살하며 도청을 점령하고, 생존자를 체포 연행하면서 진압작전은 마무리가 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민중들의 저항이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중들의 항쟁으로 발전하는 데는 광주지역의 학생운동과 운동권 역량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중 핵심역량으로 박기순(민청학련 출신 박형선의 동생, 윤한봉 여동생의 시누이, 78년 연탄가스 중독 사망)이 만든 ‘들불야학’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다. 윤상원(수습대책위 대변인, 80년 도청에서 사망)과 박관현(전남대총학생회장, 82년 40일 옥중 단식 중 사망), 박용준(고아출신, YWCA에서 계엄군 총탄에 사망), 김영철(체포 후 고문후유증으로 사망), 신영일(체포후 박관현과 함께 옥중 단식, 출소 후 사망), 박효선(수습대책위 홍보부장, 98년 간암으로 사망) 등이 들불야학 출신들이다.

그 외에 광주 엠네스티의 홍남순, 이기홍, 천주교의 조비오, 김성용, 윤공희(대주교), 교육운동을 이끈 YMCA와 삼봉회의 이성학, 명노근, 윤영규, 양성우, 박석무, 양서협동조합을 이끈 YWCA의 조아라, 이애신, 이윤정, 로케트건전지, 호남전기 노동조합, 카톨릭 농민회의 이강, 서경원, 장두석, 여성운동을 이끈 송백회의 홍희담, 안성례, 김경천, 전남대총학생회의 박관현, 양강섭, 신영일, 조선대총학생회의 김운기, 유재도, 양희승 등이 있다.

또, 지역의 민청학련 관련자 등을 지원하는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와 녹두서점(김상윤), 현대문화연구소(윤한봉), 황석영, 문병란 작가 등이 있었다.

그 외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면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대개는 정파적 진영논리에 따른 억측일 뿐, 신빙성이 낮다. 그 중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시민들이 탄 버스를 공격하는 무장한 계엄군들.
광주시민들이 탄 버스를 공격하는 무장한 계엄군들.

* 미국의 개입 논란

학생 운동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미국이 무력진압을 용인했다’는 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로 인해 민주화운동이 반미, 반체제 운동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군 통제권을 미국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군 투입을 미국이 용인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미국은 신군부의 행동을 반대했다(주한미군사령관 위컴). 하지만 군 투입을 저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군부가 움직인 20사단이나 특전사는 미국의 군사통제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 당국은 21일에야 광주지역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 북한 군 개입 논란

지만원, 서정갑 씨 등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탈북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임천용)도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희생자들이 M16이 아니라 탈취된 카빈총탄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북한에 5.18 관련자 특수묘역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5·18 민주화 운동 진압 후 작성한 사망자 검시 자료 원본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피해자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M16사망자는 폭도로 분류되고, 카빈소총 희생자만 보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카빈총 희생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또한 북한의 5.18 관련자 묘역과 선전은 주민들 선전선동에 이용하는 북한의 수법이다. 그 선전을 탈북자들이 듣고 사실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5.18뿐 아니라, 4.19혁명, 65년 6.3봉기, 87년 6.10항쟁도 자신들의 행위라고 선전한다.

지만원 씨 등이 북한 특수군 ‘광수’라고 한 사람들 중에 계엄군에 의해 사살당한 고등학생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 북한의 입장에서 군사적으로 중요치 않는 광주에 특수군을 파견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군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1개 대대나 되는 북한 특수군 투입을 방치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북한 특수군 개입설은 정파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진실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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