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본·중국·미국의 지폐. /연합
한국·일본·중국·미국의 지폐. /연합

통상 한 나라의 통화는 다른 나라의 통화보다 가치가 하락해야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 자국의 통화가치가 낮으면 재화의 가격 경쟁력이 생기고, 이 때문에 해외 수요가 증가해 수출과 무역흑자를 키울 수 있다.

이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은 그동안 자국의 통화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이 과정에서 국가 간 갈등이 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일반적인 형태의 환율전쟁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각국이 통화가치를 끌어올리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역(逆) 환율전쟁이다.

각국이 경쟁적으로 역 환율전쟁에 나서고 있는 것은 고공행진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성장보다 물가 안정에 경제 정책의 방점이 찍히면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자국 통화가치의 평가절상인 것이다.

환율이 높을수록 수출이 증가한다는 공식이 사문화된 것도 역 환율전쟁에 한몫 하고 있다. 오히려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가격이 올라 생산자물가를 밀어올리고, 이는 재차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국의 통화가치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기준금리 인상이다. 특히 신흥국의 기준금리 인상은 보다 기민하고 가파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 지난해 3월 2.0%였던 브라질의 기준금리는 현재 13.25%에 달한다. 1년여 만에 10%포인트 이상 뛴 것이다. 멕시코는 지난달 23일 자이언트스텝을 단행하며 기준금리를 7.75%로 끌어올렸다.

이 같은 행보는 아시아도 마찬가지. 인도는 지난달 8일 기준금리를 4.4%에서 4.9%로 올렸고, 지난 4월 7일 2.5%포인트 기준금리를 인상했던 파키스탄은 5월 23일 12.25%에서 13.75%로 또다시 1.5%포인트를 올렸다.

최근에는 외환보유액을 털어 환율 방어에 나서는 나라도 속출하고 있다. 베트남의 최근 외환보유액은 1000억 달러(약 129조3300억원)로 알려졌는데, 3개월 전만 해도 1100억 달러였던 점을 고려하면 100억 달러가 감소한 것이다. 달러를 매도해 자국의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하는 실탄으로 사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도는 반 년 만에 외환보유액이 7.9%나 줄어들었다.

지난 5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477억1000만 달러로 전월 대비 15억9000만 달러 줄었다. 이에 세계 8위였던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순위 역시 지난 5월 말 기준 9위로 한 계단 내려왔다.

강(强)달러에 맞서 외환보유액까지 동원하는 환율 방어책이 통화가치 안정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달러가치가 급등할수록 각국의 통화정책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종속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역 환율전쟁의 종식 여부도 미 연준에 달려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스케줄이 끝나야 각국의 통화가치역시 반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 우리나라의 무역수지 적자는 103억 달러에 달한다. 상반기 기준 역대 최대 적자를 기록했던 1997년의 91억6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수출전선에도 이상 신호가 들어오고 있다. 지난달 수출 증가율이 16개월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릿수를 기록한데 이어 글로벌 경기 악화로 올 하반기에는 마이너스로 전환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위기 때마다 한국 경제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고환율이 이제는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고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고환율이 수출 경쟁력을 높여줬지만 이번에는 에너지와 곡물 수입가격 급등으로 이어져 무역수지 적자폭을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무역수지 악화는 글로벌 정세 변화에 따른 공급부문의 위기에 따른 것이어서 적절한 해법을 내놓기도 어렵다. 무역수지 적자폭 확대로 원화가치가 추가 하락하고, 이는 다시 수입물가를 폭등시키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혔다는 분석마저 제기되고 있다.

올들어 지난 4월 우리나라의 경상수지는 24개월 만에 마이너스로 전환해 8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여기에 통합재정수지는 2019년 적자로 돌아선 이후 올해도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경상수지와 재정수지가 모두 적자를 기록하는 ‘쌍둥이 적자’가 1997년 이후 25년 만에 현실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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