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어떻게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까?
김일성은 어떻게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까?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9.0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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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혈통 뿌리 김일성 바로알기 [8]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

물론 김일성을 처음부터 최고 권력자가 되게끔 등장시켜 준 것은 소련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끝까지 소련의 뒷받침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련으로부터 주어진 기회를 백배로 살린 인물이었다.

1945년 김일성이 처음 북한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소련군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어도 김일성의 앞길이 완벽하게 탄탄한 것은 아니었다. 현준혁, 오기섭, 주영하 등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중국에서 돌아온 조선의용군사령 무정 등이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장 박헌영과 통하면서 김일성의 지도에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

소련은 북한 내에 기반이 전혀 없는 김일성을 돕기 위해 소련에서 조선인 2세인 허가이, 박창옥, 태성수, 기석복, 김승화 등을 파견하고 안길, 김책 등을 데려왔다. 이렇게 북한 정권의 형성에는 크게 나누어 역사와 체질이 다른 세 개 종파의 공산주의자들이 참가했다.

먼저 소련군이 데리고 온 소련파(다시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출신과 소련 2세파로 나뉜다)와 중국의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같이 싸운 연안파(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다. 그 중 국내파 세력이 가장 강했고 다음이 연안파, 소련파가 힘이 가장 약했다. 그러나 소련파는 소련군의 일방적 뒷받침 아래 짧은 기간에 급속히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김일성 세력의 신장을 말한다.

◇국내파와 연안파, 소련파

1948년 9월 9일 발족한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가 김일성, 김일성의 왼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오른쪽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1948년 9월 9일 발족한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가 김일성, 김일성의 왼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오른쪽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그러나 세력이 커졌다고 해서 바로 간부 요원 자리를 모두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45년까지 적어도 20여 년에 걸친 조선 공산주의 운동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투쟁 경력에 맞춰 알맞게 간부가 배치되어야 했다.

경력도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의 순이었다. 결국 소련파는 국내파와 연안파에게 당과 행정기관의 간부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또 소련파 내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김일성이 속했던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출신과 소련 2세파가 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때를 기다리며 치밀하게 반대파를 숙청해나갔다. 김일성은 먼저 비슷한 열세 그룹인 연안파와 연대하여 가장 강력한 상대인 국내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평양 지방 출신으로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북조선 임시정치위원회 부위원장 현준혁을 암살하였다. 현준혁은 해방 직후 소련군의 치안 유지 아래 있었던 1945년 9월 28일 한낮, 평양시 중심가 평양시청 앞 길거리에서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김일성은 군대 조직에 가장 많은 힘을 들였다. 그는 인민군의 중요 부서에 자기 직계를 배치했다. 군의 최고 부서인 총참모장에는 안길, 그가 병사한 후에는 강건을 배치했다.

군대 내의 사상적 통제와 정치 교육을 담당하는 문화부 사령관 및 민족보위성(국방부) 부상이라는 요직에는 김일을 배치했다. 김일은 김일성과 같은 평안도 출신이었다. 또 인민군의 건군 정신을 “김일성 장군의 애국적 무장 항일 유격 투쟁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김일성은 북한군을 자신의 개인 병사들로 만들었고 북한의 권력을 어느 정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의 현실로 보아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된다면 김일성은 정권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방 후의 남북한 추정 인구는 남한이 1800만인데 북한은 1200만 이하였다. 남북한이 총선거를 했을 때 남북 노동당이 이승만, 김구 등 보수 진영에 이긴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었다.

◇김일성, 박헌영에 주도권 뺏길 가능성 커

사진 왼쪽 박헌영, 사진 오른쪽 김일성
사진 왼쪽 박헌영, 사진 오른쪽 김일성

남북한 총선거에서 이긴다 해도 북조선 노동당을 기반으로 하는 김일성은 남조선 노동당의 박헌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공산이 컸다. 남조선 노동당은 박헌영의 단일 지도 체제 아래 당내 파벌도 없이 단결되고 있었는데 북조선 노동당의 내부는 복잡했다. 그 상황대로라면 김일성은 결국 2류나 3류 정치가로 도태되어 정계에서 밀려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자신이 확실히 통일 한반도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평화적 통일이 아니라 자신의 사병이 된 조선인민군으로 무력 통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6·25전쟁 전에 김일성이 처한 상황이었다.

6·25전쟁이 실패했음이 명백해지자 김일성은 1953년 봄에 박헌영 등 국내파를 전쟁 패전 책임을 물어 숙청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가이 등 소련 2세파도 제거했다. 1956년 여름에는 김두봉 등 연안파를 숙청했다. 이렇게 경쟁 세력이 될 만한 존재들을 숙청하고 나서도 김일성에게는 방심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바로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의 처치 문제였다.

박금철은 보천보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살다가 해방 뒤 출옥했다. 이효순은 보천보 사건으로 사형된 이제순의 동생이었다. 김일성이 박금철과 이효순을 중용한 것은 자신이 보천보 전투의 주역이라고 위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김일성은 이 두 사람을 조선 노동당 부위원장 자리까지 앉혔다.

그러나 김일성은 1967년에 박금철과 이효순을 숙청했다. 당시 이 두 사람은 조선 노동당 서열 4위, 5위였다. 죄목은 일제 스파이였다. 박금철과 이효순은 보천보 전투와 이 전투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과 다른 인물인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김일성의 거짓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숙청은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 선제공격으로 상대를 전멸시키는 방법 써

김일성(왼쪽)과 소련파 거두 허가이(오른쪽),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허가이를 1953년에 숙청한다.
김일성(왼쪽)과 소련파 거두 허가이(오른쪽),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허가이를 1953년에 숙청한다.

민주주의가 없는 집단에서 권력 투쟁은 언제나 폭력이 따를 수밖에 없다. 또 그런 상황에서 승자는 항상 선제 공격으로 상대를 단숨에 전멸시키는 방법을 쓴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 두 가지 솜씨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피해 망상의 강박 관념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의 대원으로 포위망을 좁혀드는 일본군에 다년간 쫓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매사에 극심한 의심증과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몸에 밴 극심한 의심증과 경계심으로 말미암아 김일성은 거듭된 숙청 때마다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은 권력 앞에 겁에 질린 사람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반대파 숙청만 갖고 북한의 유일 권력자로 확립된 것은 아니다. 집단 창작팀이 써낸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사’가 여기서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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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How has Kim Il-sung become the one and only man in power?

YoungJae Choe Journalist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

Of course, it was the Soviet Union who made Kim Il-sung appear as the supreme leader from the beginning. However, Kim Il-sung did not depend solely on the Soviet support until the end. He was a man who saved a hundred times the opportunity given by the Soviet Union.

When Kim Il-sung first appeared in North Korea in 1945, Kim Il-sung's path was not perfectly solid, even if the Soviet army had absolute support. There were domestic communists such as Hyun Joon-hyuk, Oh Gi-sup, and Joo Young-ha, and the Korean Military Force commanders, who came back from China, did not submit easily to the guidance of Kim Il-sung through agreeing with Park Hun-young.

In order to help Kim Il-sung, who has no base in North Korea, the Soviet Union dispatched the 2nd generation Korean warriors: Hur Ga-yi, Park Chang-ok, Tae Sung-u, Ki Seok-bok, Kim Seung-hwa, and others. The formation of the North Korean regime was largely divided into three communist communities with different histories and constitutions. First, the Soviet Union brought back the Soviet Union (again divided into the Soviet Union II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e Joseon Independence Alliance and the Joseon Uniform) and the Chinese communists on the Chinese coast. Domestic forces were the strongest, followed by the coastal and Soviet forces. However, the Soviet Union was able to grow rapidly in a short period under the unilateral support of the Soviet army. It was the size of Kim Il-sung’s influence.

Even with the forces grown, it was not possible to secure all the positions of the cadres. By 1945, there had been at least 20 years of Joseon communist movement history. So, the cadre had to be arranged according to the struggle career. It was in the order of domestic, coastal, and the Soviet Union. Ultimately, the Soviet Union was forced to serve as the cadre of the party and administrative agencies to the domestic and coastal groups. There was also a problem inside the Soviet Union.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which Kim Il-sung belonged to and the Soviet Union's second generation was not in the same mind.

1948년 9월 9일 발족한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가 김일성, 김일성의 왼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오른쪽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1948년 9월 9일 발족한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가 김일성, 김일성의 왼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오른쪽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However, Kim Il-sung paved the opposition with care, waiting for the right time. First, Kim Il-sung began to remove the strongest opponent, the domestic party, in solidarity with the coastal party, a similar 13 group. Kim Il-sung is from Pyongyang and assassinated Hyun Joon-hyuk, vice chairman of the North Korean Provisional Political Commission, the most powerful rival of Kim Il-sung. Hyun Jun-hyuk was killed by a pistol on the street in front of Pyongyang City Hall in central Pyongyang at noon on September 28, 1945, just after the liberation.

Kim Il Sung was forced to rely on military force in North Korea. Because of this, Kim Il-sung was the most powerful force in the military organization. He placed his direct line in the important department of the People's Army. He place Ahn Gil in the position of the chief of the army, and after he died of an illness, he placed Kang Kun. He placed Kim Il in the post of commander of the Ministry of Culture, who is in charge of ideological control and political education in the army, and in the position of raising the national security satellit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Kim Il was from Pyongan Island, like Kim Il Sung. He also declared the spirit of the People's Army as "inheriting the tradition of Kim Il-sung's patriotic armed anti-Japanese riot struggle." In this way, Kim Il-sung has made the North Korean army his own soldiers and takes control of North Korea's power to a certain extent.

사진 왼쪽 박헌영, 사진 오른쪽 김일성
사진 왼쪽 박헌영, 사진 오른쪽 김일성

However, according to the reality of the Korean Peninsula at that time, if the two Koreas were peacefully united, Kim Il-sung could not hold the regime. The estimated population of North and South Korea after liberation was 18 million in South Korea and less than 12 million in North Korea. When the two Koreas held a general election, there was no assurance that the North and South Korean Labor Party would win against conservatives such as Lee Seung-man and Kim Koo. Kim Il-sung, based on the North Joseon Labor Party, won the leadership of the South Joseon Labor Party, even though he won the general election in the two Koreas. The Labor Party of South Korea was united under Park Hun-young's single leadership system without any party faction. The inside of the Labor Party in North Korea was complicated. According to the situation, Kim Il-sung eventually became a politician of the second or third class, and it was possible that he might get out of politics. Therefore, in order for Kim Il-sung to become head of the unified Korea, Kim Il-sung was forced to reunify with the Korean People's Army, which became his soldier, not peaceful reunification. This was the situation of Kim Il-sung before the Korean War.

In the spring of 1953, Kim Il-sung began to purge domestic parties such as Park Hun-young to take charge of war defeat. At the same time, the Soviet Union, including the ruling party, also eliminated the second party. In the summer of 1956, he quashed coastal parties such as Kim Du-bong. After purging the entrepreneurs who might be such a competitive power, there was a problem that Kim Il-sung could not be worried about. This was the problem of treatment of 'Kapsanpa' such a Park Geum-chul and Lee Hyo-soon.

김일성(왼쪽)과 소련파 거두 허가이(오른쪽),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허가이를 1953년에 숙청한다.
김일성(왼쪽)과 소련파 거두 허가이(오른쪽),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허가이를 1953년에 숙청한다.

Park Geum-chul was arrested in the case of Bocheonbo and lived at a life imprisonment and was released after liberation. Lee Hyo-soon was the younger brother of Lee Jae-soon who was executed by the Bochoeon incident. It was Kim Il-sung's use of Park Geum-chul and Lee Hyo - soon as a means to disguise himself as the protagonist of the Bocheonbo Battle. Kim Il-sung placed these two people as the vice chairmen of the Joseon Labor Party.

In 1967, Kim Il-sung purged Park Geum-chul and Lee Hyo-soon. At the time, these two were the 4th and 5th highest in the Joseon Labor Party. The charges were Japanese-made spies. Park Gum-chul and Lee Hyo-sun were the ones who knew well whether Kim Il-sung, the 6th president of the anti-Japanese anti-Japanese alliance in Northeast North Korea, was different from Kim Il-sung in North Korea. Because these two people knew Kim Il-sung's lies better than anyone else, the purges can be seen as inevitable.

In a group without democracy, power struggle is always subject to violence. In such a situation, the winner always uses a preemptive attack to destroy the opponent at once. Kim Il-sung of North Korea had excellent ability in these two skills. Kim Il-sung also had obsessive thoughts of evil delusion. He had extreme suspicion and vigilance in everything because he lived in Japan for many years as a member of the anti-Japanese alliance. Due to the extreme suspicion and vigilance in the body, Kim Il-sung has resulted in numerous innocent victims every time he has been purged. As a result, the North Koreans were forced to shrink in fear of power. It is not that Kim Il-sung has been established as the only power in North Korea with only the purge of the opposition. The 'Kim Il-sung anti-Japanese armed struggle' written by the group creation team played a big role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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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판>

金日成はいかにして唯一無二の権力者になることができたのか?

崔寧宰 記者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

当初から、金日成を最高権力者にすべく登場させたのは、確かにソ連であった。しかし、金日成は最後までソ連の支援だけに依存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彼は、ソ連から与えられたチャンスを百倍に活かした人物であった。

1945年に金日成が初めて北朝鮮に登場した時点では、ソ連軍の絶対的支持があるとはいえ、金日成の行く道が完璧に強固なものではなかった。玄俊爀(ヒョン・ジュニョク)、呉琪燮 (オ・ギソプ)、朱寧河(チュ・ヨンハ)等、国内の共産主義者たちの存在に加えて、中国から帰国した朝鮮義勇軍司令、武亭(ム・ジョン)が、ソウルの朝鮮共産党中央委員長、朴憲永(パク・ホニョン)と通じており、金日成の指導に対して簡単には服従しようとしなかった。

ソ連は、北朝鮮内に何の基盤もない金日成を支援するために、ソ連から朝鮮人二世である許哥而(ホ・ガイ)、朴昌玉(パク・チャンオク)、 太成洙(テ・ソンス)、奇石福(キ・ソクボク)、金承化(キム・スンファ)等を派遣し、さらに安吉(アン・ギル)、金策(キム・チェク)等をも送り込んだ。

このように、北朝鮮政権の形成には、大きく分けてその歴史と体質を異にする三つの派閥の共産主義者たちが関わっていた。ソ連軍が連れてきたソ連派(内部でさらに、中国共産党東北抗日連軍出身者とソ連二世派に別れる)、中国の延安で中国共産党と共に戦った延安派(朝鮮独立同盟と朝鮮義勇軍)、国内派共産主義者がそれだ。

そのうち、国内派の勢力が最も強く、続いて延安派、最も弱いのがソ連派であった。しかしソ連派は、ソ連軍の全面的支援の下に、短期間のうちに急速度に勢力をの伸ばすことができた。それはイコール、金日成が勢力を伸ばすことと同義であった。

1948년 9월 9일 발족한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가 김일성, 김일성의 왼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오른쪽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1948년 9월 9일 발족한 북한의 초대 내각. 앞줄 가운데가 김일성, 김일성의 왼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오른쪽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だが、勢力が大きくなったからといって、すぐに幹部や要職の地位をすべて確保できたわけではない。1945年まで、少なくとも20年以上にわたって朝鮮共産主義運動の歴史があったのだが、その闘争経歴にふさわしい幹部配置がな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その闘争経歴もやはり、国内派、延安派、ソ連派の順であった。

結局、ソ連派は、国内派と延安派に対して、党と行政機関の幹部の位置を譲らざるを得なかった。さらに、ソ連派内部の問題もあった。金日成が属する共産党東北抗日連軍出身派と、ソ連二世派の思惑が一致していなかったのである。

しかし金日成は、時を待ちながら緻密に反対派を粛清していった。彼はまず、似たような劣勢グループである延安派と連帯し、最も協力な相手である国内派を消去し始めた。また、平壌出身者で、金日成の最も強力なライバルであった北朝鮮臨時政治委員会副委員長、玄俊爀を暗殺した。玄俊爀は、解放直後のソ連軍が治安維持をしていた1945年9月28日の真昼間に、平壌市の中心街にある平壌市庁前で拳銃を撃たれ、殺害された。

金日成が北朝鮮内で権力を掌握するためには、武力に頼らざるを得なかった。そのため、金日成は軍隊組織に最も力を注ぐようになる。彼は、人民軍の主要部署に、自分の直系を配置した。軍の最高部署である総参謀長には安吉を、彼が病死した後には姜建(カン・コン)を配置し、軍隊内部の思想的統制と政治教育を担当する文化部司令官、及び民族保衛省(国防部)副相という要職には金一(キム・イル)を配置した。金一は、金日成と同じ平安道出身である。

また、人民軍の健軍精神を、「金日成将軍の愛国的武装抗日パルチザンの伝統を引き継いだもの」だと宣言した。このようにして金日成は北朝鮮軍を自らの私兵とし、北朝鮮の権力をある程度、掌握するようになるのである。

しかし、当時の韓半島の現実からみた時に、南北が平和統一された場合、金日成が政権を握するのは不可能な状況であった。解放後の南北の推定人口は、南が1800万人、北は1200万以下。南北の総選挙を行った場合、南北の労働党が、李承晩(イ・スンマン)、金九(キム・グ)等の保守陣営に勝てる確実な保障はなかった。

南北総選挙で勝利したとしても、北朝鮮労働党を基盤とする金日成は、南朝鮮労働党の朴憲永(パク・ホニョン)に主導権を奪われる公算が大きかった。南朝鮮労働党は、朴憲永の単一指導体制の下で党内派閥もなく団結していたのだが、それに対し、北朝鮮労働党の内部は複雑であった。その状況のままでは、金日成は結局、二流、三流の政治家として淘汰され、政界から追いやられる可能性もあった。

そのため、金日成が確実に統一韓半島の首長になるためには、平和統一ではなく、自らの私兵となった朝鮮人民軍による武力統一を狙わざるを得なかったのである。これが、6.25動乱前、金日成が置かれていた状況であった。

사진 왼쪽 박헌영, 사진 오른쪽 김일성
사진 왼쪽 박헌영, 사진 오른쪽 김일성

6.25動乱が失敗したことが明白になると、金日成は1953年の春、朴憲永等、国内派に戦争敗戦の責任を追求し、粛清を始めた。許哥而等のソ連二世派も消去した。1956年の夏には、金枓奉(キム・ドゥボン)等、延安派を粛清する。このように競争勢力となり得る存在を粛清した後も、金日成にとっては、まだ油断できない問題があった。それがまさに、朴金喆(パク・クムチョル)、李孝淳(イ・ヒョスン)等、「甲山(カプサン)派」の処置問題である。

朴金喆は、普天堡事件で拘束されて無期懲役の立場にあったが、解放後に出獄した。李孝淳は、普天堡事件で死刑となった李悌淳(イ・ジェスン)の弟である。金日成が朴金喆と李孝淳を重用したのは、自らを普天堡戦闘の主役だと偽装するための方便であった。金日成はこの二人に、朝鮮労働党副委員長の座まで与えている。

しかし金日成は、1967年に朴金喆と李悌淳を粛清した。当時、この二人は朝鮮労働党内の序列ナンバー4とナンバー5であった。罪名は日帝のスパイ。朴金喆と李悌淳は普天堡戦闘と、この戦闘の主役であった東北抗日連軍第6師長、キム・イルソンが北朝鮮の金日成とは別人である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者たちであった。この二人は金日成の嘘を誰よりもよく知っていたがゆえに、粛清は必然であったといえよう。

김일성(왼쪽)과 소련파 거두 허가이(오른쪽),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허가이를 1953년에 숙청한다.
김일성(왼쪽)과 소련파 거두 허가이(오른쪽),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허가이를 1953년에 숙청한다.

民主主義が存在しない集団における権力闘争は、常に暴力が主導せざるを得ない。またそのような状況では、勝者は常に先制攻撃を仕掛けて、相手を一発で全滅させる方法をとる。北朝鮮の金日成は、この二つの能力において卓越した能力の所有者であった。金日成は、被害妄想的脅迫観念の所有者でもあった。

東北抗日連軍の隊員として、包囲網を狭めてくる日本軍に長年追われながら生きてきたため、万事に対して極度な猜疑心と警戒心を持っていた。身に染み付いた極端な猜疑心と警戒心により、金日成は度重なる粛清で、数多くの無辜なる犠牲者を輩出した。

従って北朝鮮の住民たちは、権力に怯え、萎縮しながら生活するよりなかったのである。金日成は、必ずしも反対派を粛清するという方法だけで、唯一の権力者の位置を確立したのではない。集団創作チームが書き上げた「金日成抗日武装闘争史」がここで大きな役割を果たしたのである。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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