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勢東漸'에 비틀린 세계사, 중심은 '초원의길' 기마민족이었다
'西勢東漸'에 비틀린 세계사, 중심은 '초원의길' 기마민족이었다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7.11.2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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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세계사 ①]

들어가며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세계사’라는 관념이 정확히 없다. 현실의 세계사는 서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고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때문에 일국의 역사는 일국의 역사일 수가 없다. 한국의 역사도 세계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한국사를 일국의 역사로, 국내의 역사로 파악하는 경향이 짙다. 한국인은 세계사를 기껏해야 한·일관계, 한·중관계, 한·미관계 정도로 파악한다.

한국인의 역사인식 가운데 대표적인 오류가 구한말에서 일제 식민지로 전락되는 시기에 대한 이해다. 대부분의 한국인과 국내 주류 역사학계는 이 시기를 한·일관계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이 존재하는 시기였다. 1860년의 아시아 지도에서 존재했던 독립국들이 1910년 이후가 되면 태국 정도 빼고는 모두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놓친 조선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러시아 등 서구열강에게 먹힐 운명이었다.

 

세계사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유럽의 역사가 세계사의 대표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국민 개개인이 한국의 국가이익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의 이미지를 갖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한국 정부의 외교가 주류 세계사의 흐름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이런 세계사 관념 부재 탓이 크다.

원래 세계사의 인식은 인류의 발자취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러한 세계사의 구상은 이미 고대 중국과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고대인들이 의식했던 ‘세계사’는 당시 생활권이라는 지리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지구 규모의 ‘세계’가 인식된 것은, 유럽인들의 상업활동 공간이 확대되면서부터다. 이 시기 유럽인들은 범선을 통한 대항해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자본주의적 진출을 통해서 동서의 현실적 접촉이 상시적으로 가능해졌다. 말하자면 유럽이 아시아에서 자기들과 이질적인 사회를 발견했을 때, 유럽을 아시아와 견주어 인식하면서 근대의 세계사 이론이 탄생했다.

때문에 서세동점의 역사가 시작된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유럽도 세계사를 몰랐다고 볼 수 있다. 세계사에서 유럽의 우위가 확립된 것은 기껏해야 지난 2세기 반부터였다.

그러면 중국인은 세계사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까? 자국문화를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중화사상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들은 이민족에게 장기간 지배당한 적이 많다. 그 정치적 열등감이 중국문화중심사상을 낳았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이 시리즈를 보는 한국인이 현재 세계사의 판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500년 전부터의 세계사, 즉 유럽에서 중세가 끝나는 16세기 무렵부터 세계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무렵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세계최대의 넓은 지역을 이끈 것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무대로 패권을 다투었던 유목 기마민족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전근대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세계사의 창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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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시작된 세계사①

초원의 길이 대륙의 동서를 잇는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하나의 폭 넓은 길이 동서를 관통하고 있다. ‘초원의 길’이다. 이 길은 해발 1000m의 몽골고원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향한다. 4000m 정도의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알타이산맥을 넘어 신장(新疆;신강)위구르 자치구 북부 쥰가르분지를 통과한다. 이어 천산산맥의 북측 바르하시호의 남측에서 카자흐스탄초원으로 들어가서, 카스피해의 북안인 볼가강에 이른다. 볼가강을 서쪽으로 건너면 러시아령 코카서스로, 그리고 돈강을 건너면 흑해의 북쪽 우크라이나초원이다. 이 초원의 길은, 동쪽 끝은 중국문화권에 접하고, 서쪽 끝은 지중해문화권에 닿아있다.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 초원의 길을 통해서, 많은 사람과 물건이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질러 오갔다. 그 가운데 가장 눈부신 이동은, 기원전 3000년기(기원전 3000년부터 2001년까지)에 일어난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

언어의 가족, 인도 유럽어족

현재 남아시아의 인도 아대륙, 서남아시아의 이란고원, 그리고 유럽 전체에 걸쳐, 같은 계통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금은 수많은 국어로 나뉘어 있어도 근원을 더듬어 나가면 옛날에는 같은 어휘였던 것 같다. ‘언어의 가족’이란 의미에서 ‘인도-유럽어족’이라 부른다. 기록이 없던 시대라 잘 알 수는 없지만, 이 어족의 말을 쓰는 사람들의 조상은 유라시아대륙의 오지에 살았던 것 같고, 기원전 3000년기가 되어 초원의 길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서 지금처럼 인도에서 유럽에 걸쳐 정착하게 된 것 같다. 그로부터 훨씬 뒤 역사라고 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역사는 전 세계 어디에나 다 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있다고 해서 그대로 역사가 될 수 없다. 역사는 문화의 일종으로, 지중해문명에서는 기원전 100년경, 비슷한 시기에 중화 문명권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창출되었다.

변화 인정 유무가 동서양 역사 서술의 차이

역사라고 하는 문화를 창출한 사람은 두 사람의 천재였다. 지중해에서는, 희랍어로 『ἱστορίαι, historíai ; 히스토리아이』를 쓴 헤로도토스(Herodotos)이며, 중국에서는, 한문으로 『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이었다. 이 두 사람이 최초로 역사를 쓰기까지는, 희랍어의 「히스토리아」 (영어의 history의 어원)에도, 한자의 「史」에도, 「역사(歷史)」라고 하는 의미는 없었다. 역사(歷史)라고 하는 관념 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비롯된 중국의 역사는 황제라고 하는 제도의 역사였다. 황제 권력의 기원과 그 권력이 현재의 황제로 이어져 온 유래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적 세계관에서는 황제가 ‘천하’(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은, ‘천명’이 부여한다. 그 천명이 전해지는 순서가 ‘정통’으로 불린다. 천명의 정통에 변화가 있으면, 황제 권력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중국형 역사에서는 현실 세계에 어떤 큰 변화가 없어도 될 수 있는 한 무시하고 기술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중국의 언론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 헤로도토스가 창출한 지중해형의 역사에서는 큰 나라가 약소해지고, 작은 나라가 강대해지는 일정치 않는(무상한) 운명의 변절을 기술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처럼 같은 세계사이면서도 중국에서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역사가, 지중해에서는 변화를 주제로 하는 역사가 기술되다가 13세기 몽골제국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세계사는 뒤섞인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하나의 정치권력 안에서 통일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즉 13세기에 몽골제국이 초원의 길에 질서를 세워 유라시아대륙의 동서 교류를 활발히 하는 바람에 하나의 세계사가 시작된 것이다. 다음호부터 상세하게 언급하겠다.

sopulg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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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호 2017-11-30 15:23:46
호모사피엔스는 인류의 역사 아닌가요?

김처사 2017-11-29 16:32:58
아하, 세계사가 그렇게 이해되어야 말이 되네요. 지구 전체가 무대인 세계사, 이 시리즈 기대됩니다. 창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