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길, 추모의 길··· 대한독립군단의 亡地에서 울다
자유의 길, 추모의 길··· 대한독립군단의 亡地에서 울다
  • 김유라 역사 에디터
  • 승인 2017.11.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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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상자: 더 자유일보 창간 맞이 자유시참변 추모역사기행

 시베리아 횡단열차, 스보보드니 너머 이르쿠츠크로!

대한독립군 5군단 3500명이 소련 공산군에게 괴멸 당한 '자유시 참변'의 강가에서 더 자유일보는 호국 영령의 넋을 달래는 제를 올렸다.
공산당을 믿은 죄로 대한독립의 깃발은 덧없이 꺾였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의 넋이 서려있는 제야 강은 오늘도 말없이 흐릅니다.

[김유라 더 자유일보 역사에디터]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자유일보 임직원들이 서두른다고 잡았던 인터넷-모바일 창간의 날인 2017년 11월27일은 마침, 대한민국 법치를 짓밟은 탄핵반란의 400일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들은 종교를 떠나(기독교가 가장 많음) 그 뜻을 받들고자 옛 부여의 영고(迎鼓)처럼 하늘과 땅과 사람의 기운을 모두 맞아들이는 멍석을 미리 깔았습니다. 하나가 ‘자유시참변 추모역사기행’이었고 또 하나는 지난 11월20일 모셨던 음력 개천절 마니산 참성단 비나리였습니다.(그 비나리를 볼 수 있게 올리겠습니다.)

<청산리에서 스보보드니까지, 愛族愛民의 길>

지난 10월 20~28일 부산의 태극기 전사들을 모시고 (먼저는 전주 애국자들이었습니다.) 자유시참변 96돌을 추모하는 뒤늦은 길에 올랐습니다. 자유시는 러시아 아무르주 스보보드니(Svobodny)를 일컫는 말로서 러시아 말 자유(Svoboda)에서 왔습니다. 스보보드니는 우리가 얼추 아는 연해주 위쪽이며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블라디보스톡에서 꼬박 24시간, 하바로프스크에서 12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입니다. 옛날로 치면 북만주 끝자락입니다. 하얼빈에서는 12시간 기차로 가서 흑하시(헤이하)에서 국경 건너 블라고베센스크에서 150km 달리면 나오는 제야 강가의 군사도시입니다. 이리 말씀드린 까닭이 있습니다. 96년 앞서 우리 순국선열들이 그만큼 멀리 가셨음을 느끼게 해드리려 함입니다.

먼저 망원경으로 보겠습니다. 1919년 3.1만세에 이은 1920년 봉오동-청산리 대첩은 영국을 따라 언젠가는 세계제국을 세우리라 꿈꾸었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는 공황에 가까운 모욕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청나라를 뒤이은 중화민국부터 먹으려면 식민지 조선의 안정은 절대필수입니다. 그런데 그 조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뒤흔든 비폭력평화시위의 물결이 일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청과 러시아를 꺾어 제국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의 정예군이, 스스로 근대국가도 못 만들고 식민지가 된 나라의 보잘 것 없는 민병들에게 참패를 잇달아 당했으니 국제무대에서 위신이 곤두박질했습니다. 악에 받친 일본이 독립군들을 없애려 애꿎은 동포들을 학살하였으니 경신 간도참변이었습니다.

독립군들은 동포들을 살리려 눈물을 머금고 물러섭니다. 북로군정서 본부가 있던 연변 왕청현에서 흥개호(興凱湖, 항카호) 옆 밀산시까지 (요즘 차로 달려도 462km) 물러나 그 곳에서 백포 서 일을 총재로 하여 단일대오를 만드니 3500 대한독립군단입니다.¹) 대한독립군단은 정규군처럼 한 몸으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따른 산개퇴각(散開退却)이 한 까닭입니다. 그에 더해 1918년 7월부터 1922년 10월까지 적백 내전을 둘러싼 시베리아 전쟁에 일본군이 대거 출병하였기에 대한독립군단은 레지스탕스의 연합전선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몸이었다면 어떻게든 자유시참변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저미는 비사(悲史)입니다. 오죽했으면 백포 서 일 총재께서 자진하셨겠습니까.

 이윽고 대한독립군단은 연해주의 요충지 이만(달네레첸스크)으로 진지를 옮깁니다. (동포들이 모인 우수리스크에서 313km를 올라감. 하바로프스크에서 358km 남쪽) 바로 여기서부터 자유시참변은 3단계로 접어듭니다. (1단계는 봉오동-청산리 대첩, 2단계는 경신 간도참변과 대한독립군단 결성)

 

<스러진 대한의 얼, 울어 예는 제야 강>

볼셰비키의 달콤한 제안을 어찌 받아들일까, 대한독립군단은 갈라졌습니다. 일찍이 선열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그러나 3.1만세까지 했음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음이,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조선 같은 곳이 아니라 1차 대전 뒤의 전후 질서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패전국과 오스만터키의 땅에 영국과 프랑스가 나이프를 얹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독립군들은 나라를 되찾으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그 틈새를 파고든 레닌의 민족자결선언을 믿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음흉한 속내는 곧 드러났습니다. 자유시로 옮겨가자면서 무장해제를 강요했습니다. 총이 없는 군인은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이에 서 일 총재와 김좌진-김규식 장군을 비롯한 어른들은 간도로 되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홍범도-최진동-이청천-안 무 장군 등은 총을 내어주고 자유시로 가셨으니 그때부터 가두리에 갇힌 물고기 신세와 같았습니다.²) 


코민테른 앞에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나타납니다. 이동휘를 비롯한 상해파는 나라를 되찾으려 공산당을 방편으로 삼은 이들입니다. 오하묵을 비롯한 이르쿠츠크파는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이들입니다. 끝내 칼자루는 이르쿠츠크파의 손에 쥐어집니다.

자유시참변의 증언인 수라셰프카역 급수탑과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
자유시참변을 증언하는 수라셰프카역 급수탑과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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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독립군단은 정규군처럼 한 몸으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따른 산개퇴각(散開退却)이 한 까닭입니다. 그에 더해 19187월부터 192210월까지 적백 내전을 둘러싼 시베리아 전쟁에 일본군이 대거 출병하였기에 대한독립군단은 레지스탕스의 연합전선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몸이었다면 어떻게든 자유시참변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저미는 비사(悲史)입니다. 오죽했으면 백포 서 일 총재께서 자진하셨겠습니까.

2) 그렇다고 이 어른들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아직 바이칼 동쪽을 볼셰비키가 장악하지 못한 터라 방패막이로 세운 치타 공화국과 독립군의 사이는 좋았습니다. 무기와 군복의 지급은 물론 ‘4년 훈련 뒤 일본 정벌을 개시하되 양국이 합작하여 즉시 전투할 것.’을 비롯한 군사협정까지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깨어집니다. 적백내전이 끝나니 치타 공화국도 문을 닫습니다. 이때 소련과 일본이 북경에서 맺은 캄챠카 어업협정에 따라 코민테른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합니다. 결국 독립군은 소련이 일본에 치른 물고기 값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운명의 날이 다가옵니다. 말없이 참변을 증언하는 스보보드니 수라셰프카 역(지금은 미하일로 체스노코프 역) 급수탑 앞에서 철길을 따라 두 곳으로 두 대의 장갑차와 30여 문 기관총을 앞세운 기갑부대와 코자크 기병대가 들이칩니다. 존경받는 깔란다리쉬빌리 사령관의 기다림에도 가장 설쳐댄 것은 오하묵의 자유대대입니다. 뒤쪽 수라셰프카 마을을 거쳐 제야 강가까지 쫓겨 가면서 독립군들은 포로로 잡힌 854 분 빼고 모두 죽거나 사라졌습니다. 잡힌 분들은 이르쿠츠크까지 끌려가 공산당 교육을 받습니다. (오늘의 이르쿠츠크 5군단거리) 일본과 싸우게 도와달라, 그까지 찾아간 이동휘의 간청에 코민테른은 상해파 지도자들의 숙청으로 답합니다.

그렇게 봉오동-청산리 대첩과 간도참변을 거치며 어떻게든 단일 정규군을 만들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그나마 함께 한 백전노장들마저 뿔뿔이 흩어지며 만주 무장독립군의 신화는 시나브로 저뭅니다.³) 무엇보다 같은 겨레가 볼셰비키의 앞잡이가 되어 총질했다는 것은 독립군들에게 크나큰 상처였습니다. 이로써 상해 임정을 비롯한 독립진영은 공산당과의 모든 인연을 끊었으며 그 뒤 적색제국주의와의 전쟁은 오늘까지 1백년을 이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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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뒤로도 만주에서 독립전쟁은 꾸준히 이어집니다. 그러나 갈수록 기울어집니다. 쌍성보와 대전자령에서 봉오동과 청산리의 전설을 되살려낸 지청천 총사령의 한국독립군은 또다시 자유시참변처럼 무장해제 당했습니다. 조선혁명군을 이끌던 양세봉 총사령은 김좌진 장군마냥 돌아가시고 남은 이들마저 1938년 9월6일 끝내 깃발을 빼앗깁니다. 이로써 모든 게 끝났습니다. 그 텅 빈 자리에 첫 역사왜곡이 독버섯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8년 6월4일의 보천보 전투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암담하던 때에 동아일보가 기사를 키우는 바람에 알려졌지만 고작 비적 떼들의 소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 기념으로 고동뢰 독립군 소대를 죄다 죽인 중국 공산당의 졸개이자 소련 공산당의 꼭두각시 김성주(김일성). 처음부터 민족반역자였던 김성주는 그저 막내 부하로 따라다녔을 따름입니다.(깊은 이야기는 김용삼의 역작 [김일성 신화의 진실]을 꼭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 태생의 비밀을 안다는 까닭으로 불쌍한 갑산파들은 1967년 김일성 우상화를 앞두고 마지막 숙청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 라즈돌리노예에서 5군단 거리까지! >

추모기행단은 세 곳에서 비나리를 올렸습니다. 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강가 이상설 어른 유허비와 스보보드니 제야 강가 대한독립군단의 마지막 터 그리고 바이칼 알혼 섬 후지르 마을 부르한 바위. 그 뜻은 하나입니다. 자유통일 대한민국으로 가려면 한 세기에 걸친 역사왜곡을 먼저 깨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인류사에서 백색제국주의와 적색제국주의 그 둘과 싸워 나라를 세운 기적은 오로지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1945년 해방조차 반쪽 아닙니까. 볼셰비키 동맹에서 해방을 선언함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건국입니다. 그 적색제국주의와의 한 세기에 걸친 전쟁, 그 <자유의 길>을 되살리고자 추모기행에 나선 것입니다.

그 자유의 길에 선열들은 세 차례 피를 흘리며 지나가셨습니다. 1921년 6월28일 자유시참변으로 이르쿠츠크 5군단거리까지, 1937년 9월9일 러시아 동포 강제이주만행으로 노보시비르스크를 거쳐 카자흐스탄 우쉬토베로~ 그리고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까지~ 끝내 카스피해 북쪽 아스트라한까지, 1945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로 끌려간 시베리아까지.(안타깝게도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길이 앞으로 우리가 되살려야 할, 역사왜곡으로 찌든 대한민국 헌정사를 되살리는 길이자, 인류 자유문명의 길이며, 자유통일 대한민국을 여는 길입니다. 

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강가에서 독립전쟁의 대부이자 순국 1백년을 맞으신 이상설 어른께 아뢰었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어른께서 동지들과 함께 닦으신 터. 연해주의 바이칼 흥개호를 끼고 세모꼴로 밀산 한흥동과 용정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까지 다시 뿌리내리겠습니다.” 이윽고 러시아 동포들이 가장 먼저 끌려간 라즈돌리노예 역에서 80년의 설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공산분자의 꿈을 키워가던 김성주(김일성) 소련 대위의 숙영지를 둘러보며 반드시 2500만 대한민국 국민들을 구해내겠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드디어 24시간 기차를 타고 내린 스보보드니.

눈이 하얗게 덮인 제야 강가에서 감격에 겨웠습니다. 이제껏 그렇게 와도 러시아 군인들 눈치 보느라 늘 풀섶 사이에서 비나리를 올렸는데 눈부시게 탁 트인 제야 강가에서 선열들이 숨져간 모래톱과 철교 사이 바로 그 강가에서 비나리를 올리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바람도 멎고 햇살까지 따사로와 순국 한 세기가 다 되어서야 뒤늦게 찾아온 후손들을 기꺼이 품어주는 선열들의 품에서 속울음을 삼켰습니다. 반드시 대한독립군단을 되살려 ‘있을 수 없는 전쟁’ 백년전쟁의 끝을 맺겠노라 다짐했습니다.

헤이그 밀사 3인의 한 분이었던 이상설 어른의 유허비.
독립전쟁의 대부 이상설 어른 유허비.

 

까레이스키 빠숄록. 그 무렵 우리 동포들이 머물렀던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 곳 언저리에서 몹쓸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6월28일 처음 찾았던 새까만 비입니다. 이리 적혀 있습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력 1921.06.28. 흑강(黑江) 자유시사건 독립군 순절지.’ 아래에는 러시아 키릴 글자로 ‘까레이스키 빨치산’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 보라고 빨치산이라 적어주고 한글로는 우리끼리 싸웠다고 합니다. 딱 틀에 박힌 운동권들의 역사인식입니다. 대한독립군단이든 러시아 동포 강제이주만행이든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는 아예 지워 버렸습니다.) 똑같습니다.

결코 적색제국주의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만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픈 역사다, 어쨌든~ 이렇게 힘들게 찾은 나라를 빼앗은 친일파가 나쁘다, 그래도 북한은 자주성이라도 있다, 오로지 그 주문만 외우고 있습니다. 이 못된 짓이 만주든 연해주든 중앙아시아든 곳곳에 지울 수 없는 낙서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역사왜곡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고서는 설사 탄핵반란을 진압한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또 다른 운동권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스스로 낮추는 매조히즘의 자학(自虐)사관과 침략자를 뒤바꾸는 변태성 사대주의가 뒤엉킨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반사회 반국가 인격장애를 내버려두면 번지 수를 굳이 알 까닭이 없는 불평불만의 촛불은 언제든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꼬박 48시간 바이칼-이르쿠츠크로 가는 길입니다. 지구마을의 젊은이들이 시베리아를 맛보려 굳이 타보는 이 기찻길이 선열들께는 피눈물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설레는 마음과 원한 맺힌 가슴이 뒤엉키며 이틀 밤낮을 달립니다. 마침내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에 섰습니다. 고리키 길로도 불리는 이 거리의 드라마 극장에서 묵념을 올립니다. “오직 음모와 배신과 피비린내 그리고 무너져 내린 독립의 꿈과 대한독립군단의 깃발만 뒹굴 뿐.” 그 원한을 차곡차곡 쓸어 담았습니다. 탄핵반란으로 가슴에 한이 맺힌 태극기 물결처럼 이 자유의 길을 되살리려면 우리 가슴의 원한 또한 바이칼처럼 깊고 넓어야 합니다. 

<러시아의 자유시참변. 아! 콜챠크 제독!>

이르쿠츠크에서 세 곳을 꼭 가봐야 합니다. 5군단 거리와 키로바 광장 그리고 콜챠크 제독 동상. 앙가라 강의 갈래인 우샤꼬브까 강가에 자리 잡은 즈나멘스키 수도원. 바로 그 앞에 콜챠크 제독 동상

'자유시 참변'의 장본인인 러시아 콜챠크 제독 동상.
러시아의 '자유시 참변'- 콜차크 제독 동상.

이 서 있습니다. 소련 때에는 금기어였으며 소비에트가 망하고서도 이 자리에 주검으로 실려온 그가 다시 설 때까지는 13년이 걸렸습니다. “얼어붙은 앙가라 강에서 / 덧없이 스러진 콜챠크 제독이여. / 키로프 그리고 체코군단의 배신을 / 어찌 잊을 소냐마는 그 탓에 / 나름 중무장한 대한 독립군들이 /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신화를 일구었나니 / 오묘한 인연의 저울을 어찌 잴까나.”

올해는 볼셰비키 1백년의 해입니다. 지난 한 세기 공산당은 인류에게 70여 년의 악몽과 1억이 훌쩍 넘는 제노사이드를 선물했습니다. 그 악몽과 선물을 아직도 코리아는 짊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부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 충성할 것인가, 내게는 그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케렌스키 정부에 충성하던 콜챠크 제독이 볼셰비키에 맞섰을 때 적군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다릅니다. 트로츠키가 총대를 메고 선동전을 벌이고 키로프가 간첩으로 이간책을 쓰며 ‘다 이긴 전쟁’에서 집니다. 체코군단의 도움으로 대한 독립군은 빛나는 역사를 썼지만 체코군단의 배신으로 백군은 전멸합니다. 탄핵반란의 패잔병인 우리로서는 남 이야기로 흘릴 수 없는, 살아있는 비극입니다. 그들 몫까지 우리가 되살리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대한독립군단을 되살려 자유의 길을 열겠습니다>

우리의 정성이 모자라 바이칼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인천-이르쿠츠크 마지막 직항 왕복으로 갔음에도 시공간을 품는 우리 마음의 그릇은 아직 작았나 봅니다. 지금은 바다이지만 얼추 2만5천년~1만년 황해는 압록강과 황하가 하나로 만나 큰 강으로 굽이치는 드넓은 황해 초원이었습니다. 그 곳이 물에 잠기고 풀밭이 시베리아까지 올라가 만주와 몽골부터 말을 달려 수메르와 이집트에 이르러 기름진 초승달을 빚으며 역사시대를 엽니다. 그 처음을 새긴 ‘초원의 길’, 그 들머리에 있던 천지가 바이칼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 적색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던 자유의 전사들을 선열로 모신 덕에 오래 잊고 살았던 ‘초원의 길’의 DNA를 되찾았습니다.

첫 초원의 길이 홍익인간의 길이라면, 다음 초원의 길이 유라시아의 길이라면, 이제 셋째 초원의 길은 자유의 길입니다. 70여년에서 한 세기에 이르는 악몽과 1억이 넘는 원혼들. 그 모든 괴로움을 떨치고 무등과 홍익인간과 공존공영의 지구마을 천년의 자유문명을 제대로 열어가는 간곡한 비원으로 우리 몸과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당장은 탄핵반란을 다스리기도 바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극우사대종북 부패운동권은 지난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진화한 야만의 네오 맑시즘 세력입니다. 그저 앞에서 까부는 가케무샤 강남좌파들 보고 헛갈리면 오늘 땅을 치고 후회하는 광화문과 여의도와 서초동의 보수기득권들처럼 바보가 될 것입니다. 하여 시공간을 품는 그릇으로 애국우파가 거듭 나지 않으면 하늘은 우리에게 열쇠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미처 바치지 못한 비원으로 매듭짓겠습니다.

 

바이칼 알혼섬 후지르마을 부르한 바위.
바이칼 알혼섬 후지르마을 부르한 바위.

 

다시 바이칼 앞에서 옷깃을 여밉니다.

하늘새 까레이가 머물던 곳 바이칼.
부여와 고구려의 태가 묻힌 바이칼.
수천 년 초원의 길을 지키던 바이칼.

이 곳은 25만 백군들이 가라앉은 무덤.
이 곳은 대한독립군단의 뿌리마저 삼킨 늪.
이 곳은 까레이스키가 노예로 끌려간 어둠.
이 곳은 신의주 자유의 얼이 사위던 하늘.

아! 바이칼이여!
오늘 우리들은 스보보드니 너머
이르쿠츠크로 기꺼이 달려왔습니다.

3500 대한독립군단의 희생이
어찌 부질없다 하겠습니까.
님들의 거룩한 발걸음이 계셨기에 오늘
저희들이 이 바이칼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까레이의 하늘과 거룩한 바이칼
그리고 초원의 길을 걸고 다짐합니다.

자유통일 대한민국의 가장 큰 밑천인 한미동맹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탄핵반란을 토벌하고
다음에는 한미가 함께 바이칼을 찾겠습니다.

러시아동포 강제이주만행과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그 거룩한 희생을 아름다이 꽃피우겠습니다.

러시아동포들과 그 손주들이
집시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임자가 되도록
신의주 자유의 외침이 3.1만세 버금가는
20세기 인류사의 자랑이 되도록
하여 서울이 아니라 평양의 해방정국 1천일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날을 앞당기겠습니다.

이상설 어른과 대한독립군단의 길을 따라
연추리와 하산과 훈춘
크라스키노와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
한흥동과 용정과 신한촌
흥개호와 스보보드니와 이르쿠츠크
마침내 하와이와 상해와 바이칼
그 모든 세모꼴을
무등과 홍익인간과 공존공영의 마당으로 엮겠습니다.

하여 마침내 3500 대한독립군단이
대한민국에 되살아나도록 하겠습니다.
젊디젊은 님들과 얼싸안고
자유통일대한민국의 하늘을 열어
셋째 초원의 길을 웃으며 달리겠습니다.
부디 자유일보를 그 땔감으로 마중물로 쓰소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이다.

kyr@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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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처사 2017-11-29 22:28:35
유라시아 김유라 선생님이시군요. 참혹한 자유시참변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