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원전 후폭풍이 지구촌을 덮친다〈중〉

美·유럽, 인력·노하우 부족으로 원전 품질 기대 이하로 떨어져
전문 기술 재습득해야 하는 상황...한국도 인재 육성에 어려움

지난달 14일(현지시간) 프랑스 노르망디주 플라망빌의 차세대 유럽형 가압경수로(EPR) 원전의 원자로 격납 시설 앞으로 한 인부가 걸어가고 있다. 프랑스 원전을 건설·운영하는 전력공사(EDF)는 수없이 지연되며 차질을 빚은 이 원전을 내년부터 가동할 계획이다. /AFP=연합
지난달 14일(현지시간) 프랑스 노르망디주 플라망빌의 차세대 유럽형 가압경수로(EPR) 원전의 원자로 격납 시설 앞으로 한 인부가 걸어가고 있다. 프랑스 원전을 건설·운영하는 전력공사(EDF)는 수없이 지연되며 차질을 빚은 이 원전을 내년부터 가동할 계획이다. /AFP=연합
"2017년 이후 건설된 신규 원자로 31개 가운데 27개가 러시아 또는 중국의 설계를 토대로 한다. 원전 주도권이 독보적인 설계 기술을 가진 러시아·중국에 넘어갔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지난 2일 밝힌 내용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원자력 발전이 에너지 안보의 중추로 떠올랐다. 그러나 원전 시장은 이미 러시아·중국에 장악됐으며, 인력과 노하우 부족으로 미국·유럽이 주도권을 잃었다. 서방세계가 탈(脫)원전 후폭풍 속에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의 원자로 사고, 1986년 체르노빌(현 우크라이나) 사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고를 거치며 원전 기술력이 후퇴한 이래, 일선 숙련공의 퇴직 후 후속 세대를 키우지 못했다. 프랑스가 노르망디 해안의 플라망빌에 건설 중인 차세대 유럽형 가압경수로(EPR)의 완공 시점은 10년 이상 늦춰졌다. 경수로 냉각시스템 등에서 용접을 비롯해 100개 이상 ‘불량’이 발견됐는데 수리할 기술자가 없었다. 로봇까지 동원해도 기한을 맞추기 어렵다.

원전 건설의 난항으로 품질은 기대 수준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미국 조지아에 건설 중인 원자로 2기 역시 같은 문제다. 심지어 작업자들 대부분 원자로 용접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제작에 뛰어 들었다. 각국의 원자로 건설 지연이 자연스럽게 초과비용을 낳는다. 하자 보수비용도 만만치 않다. 중국·러시아를 제외한 대다수 나라들은 원전 관련 전문기술을 재습득해야 할 상황이다.

한국의 차세대 원전 사업을 이끌 인재 육성 또한 사각지대에 놓였다. 한국원자력학회에 따르면, 2016년 22명이던 카이스트(KAIST) 원자력·양자공학과 신입생 수가 2017년 탈원전 정책발표 직후 9명으로 줄었다. 2022년엔 단 4명이었다. 유니스트(UNIST) 원자력공학과의 신입생 수 역시 18명(2016년)에서 8명(2017년)으로 격감하더니, 2018년부터 2021년까지 5명을 못 넘겼다. 반도체 인력이 중요한 만큼 원전 전문가 육성도 시급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제재를 위해 수입에너지를 스스로 끊어버린 유럽연합(EU)이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한시적으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에너지믹스’, 즉 화석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원전 및 신재생에너지의 확충을 시도한다고 한다. 아울러 EU 자체적으로 ‘에너지 안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각국의 에너지 주권보다 유럽 전체의 안보가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원전대국’이자 원자력 산업의 르네상스를 주창한 프랑스 중심의 공동체가 논의되고 있다. 무엇보다 독일을 향해, ‘탈원전 기치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이 거세다. 지난 10년간 기후문제 관련해 유럽은 광범위한 ‘진보 그룹’의 출현을 보았지만, 이상의 실현은 훨씬 요원해졌다. 환경문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탈탄소·친환경’만을 강조하던 EU가 러시아産 에너지에서 벗어나고자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EU집행위원회는 지난 18일 에너지 안보계획인 이른바 ‘리파워EU(REPowerEU)’를 발표했다. 2027년까지 러시아 의존도를 극복하고, 원전과 함께 신재생에너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목표다. 태양광을 중심으로 한 신재생에너지 확충·에너지 절약·화석 에너지 공급선 다변화 등이 세부 사안으로 제시됐다. 2030년까지 3000억 유로(약 400조원)가 투입된다. 그러나 관건은 현재 태양광 밸류체인에서 압도적 비중(70~80%)의 중국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지 여부다.

IEA에 따르면, 2050년까지 이른바 넷제로(온실가스 순배출량 0)에 도달하기 위해 전 세계 원자력발전 용량이 현재의 두 배가 돼야 한다. 세계 각국은 새 원자로 건설 계획을 속속 발표하고 있지만 인력과 노하우 부족에 발목이 잡혔다. 그런 가운데 중국은 지난해부터 향후 15년 동안 신규 원전 최소 150기를 추가로 지을 방침이다. 세계 나머지 국가들이 지난 35년간 건설한 원전 수보다 많다. 이제 ‘에너지 주권’을 넘어 ‘에너지 안보’ 시대다. 화석연료·천연가스 패권으로부터의 주권 수호는 물론, 원전 기술 및 인력을 확충해 미래 에너지 안보까지 챙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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