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일제(日帝)청산과 북한의 일제(日帝)계승
한국의 일제(日帝)청산과 북한의 일제(日帝)계승
  • 최성재 교육문화평론가
  • 승인 201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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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재 교육문화평론가

∥제2차대전 이후 100여 신생독립국 중 식민잔재를 가장 잘 청산하고 가장 멋있게 극복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얼인 국어를 되찾았고(베트남도 있지만 표기법은 프랑스 식), 농지개혁과 산업화와 민주화로 전전(戰前 ante bellum) 서구 열강을 능가하는 세계 8대 선진강국으로 우뚝 섰다. 반면에 북한은 국어만 되찾았을 뿐 천황숭배의 식민잔재를 계승·심화시킨 최악의 세습독재로 일제시대보다 지독한 공산왕조시대로 곤두박질쳤다.∥

[들어가며]

문화를 분류할 때 흔히 과거와 미래, 감성과 이성, 인간과 일을 기준으로 삼는다. 대체로 과거를 중시하면 감성과 인간을 중시하고, 미래를 중시하면 이성과 일을 중시한다. 우리나라는 전자에 속한다. 서구와 북미는 대체로 후자에 속한다. 바로 이웃에 살지만, 일본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은 우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은 원래 전자에 속했지만, 몽고족이나 만주족 등 이민족의 지배를 수백 년 간 받고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와 일본에 시달리고 공산주의와 중화주의의 기묘한 결합으로 건국 후 모택동 치하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후에 과거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대학생의 70% 이상이 이공계열로 채워지고 국가지도자가 거의 100%로 이공계열 출신으로 물갈이하면서 미래지향적이 되어 감성보다는 이성을, 인간보다는 일을 중시하는 문화로 급격히 변하고 있다. 어제의 중국이 아니다.

한국은 서구에 비해 흥분을 잘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 비해서도 월등히 흥분을 잘한다. 그래서 협상에서 판판이 진다. 제 풀에 스스로 무너진다. 속내를 너무 쉽게 드러내고 상대방의 생각을 예사로 넘겨짚는다. 자신에 비추어 전혀 얼토당토않게 족집게처럼 상대의 의도를 간파했다고 확신하고 성토하고 분개한다. 문득 정신 차려 보면, 객석이 텅 빈 무대에 홀로 남아 있다. 돈도 빼앗기고 명예도 빼앗기고 총도 빼앗긴 채.

북한은 어떤가.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흥분하는 척할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보고 그들의 황당무계한 언어 폭격을 보고 속으면 안 된다. 북한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한국을 도리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봉으로 생각한다.

망나니 막내아들이 어머니와 큰누나 작은누나, 할머니가 꾸짖는 척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구 퍼 주는 것을 어리광과 협박으로 악용하는 것과 흡사하다. 돈만 떨어지면 찾아오고 여차하면 패악을 부린다.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모른 척하고 있고 큰형은 어머니와 할머니와 누나들의 공작으로 아버지한테 미움을 사서 밀려나고 어릴 때 친하게 지낸 작은형이 실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더 냉철하다. 다만 중국은 마음대로 안 된다. 그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당한 미국이 최근에 서서히 정신을 차려 가고 있고 일본은 납치 사건을 계기로 거의 정신을 차렸다.

한국인은 아무 것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냉철하다. 날카로운 이성에 섬광 같은 직관이 더해지고 직감도 고도로 예민해져서 머리칼 하나의 빈틈만 있어도 그걸 절대 놓치지 않는다. 북한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한국은 북한의 몰락에 비하면 사건도 아니지만, 97년 외환위기 때도 그런 모습을 잠시 보여 주었다.

천만뜻밖에도 한국이 북한의 수중에 고스란히 넘어가서 이젠 북한이 한국을 보자기로 덮어씌우고 뭇매를 가하고 있다. 여론을 주도하는 많은 한국인에게 민족공조란 장밋빛 안경을 씌워서 김정일을 백마 탄 왕자처럼 보이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이 멀찍이 서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게 바로 일제잔재, 군사독재, 빈부격차 등이다. 한국인의 국민성을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하여 이를 120% 사용한다. 한국인은 1%의 진실을 잘 가공하여 이를 미끼로 던져 그 감정을 자극하면, 99%의 거짓을 진실로 확신하고 생명을 기꺼이 바친다. 그래서 북한의 1% 진실과 99% 거짓을 한데 묶어 100% 진실로 철석같이 믿고, 한국의 1% 거짓과 99% 진실을 싸잡아 100% 거짓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인은 과거지향적인 민족이라 과거의 어떤 결정적 사건을 들이대며 이를 정통성의 근거로 삼으면 속절없이 넘어간다는 것을 북한은 너무도 잘 안다. 아니, 북한이 애써 공작할 필요가 없다.

국내외에서 직접 장사를 해 보거나 사업을 벌여 보지 않은 사람들은, 곧 눈뜨고 코가 베이는 험난한 시장에서 직접 돈을 벌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과거에 매달리고 배운 것을 총동원하여 대한민국의 '원죄'를 찾아 나선다. 목숨을 걸고 찾아 나서서 어릴 때부터 주워듣고 확신한 바를 입증한다. 그러다가 문득 북한은 '원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내고 눈물을 펑펑 쏟는다.

[이승만의 일제청산과 김일성의 친일행각]

반민특위 체포자 이송 장면

우리는 일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문화라 일제청산이라면 당연히 인적 청산을 의미한다. 일제시대에 일제에 빌붙었던 자들이, 친일파들이 해방공간에서 그대로 미군정에 참여하고 이승만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문제는 거기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반민특위가 무산된 것을 민족 정통성을 찾지 못한 천추의 한이라고 생각한다. 해방된 지 60년이 다 되었지만, 이제라도 그 일을 다시 해야 한다고 목 놓아 외친다. 친일파의 친일행각을 샅샅이 뒤져낸다. 어디서 그렇게 잘 찾아내는지 그 놀라운 끈기와 열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공개적으로 말은 않지만, 김일성은 친일파를 철저히 척결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절로 김일성에게 머리가 조아려진다. 잘 먹고 잘사는 한국의 한 교수가 북한에 가서 감격에 겨워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자고 무지몽매한 남쪽 사람들을 향해, 친일파 후손들이 득실거리는 대한민국을 향해 비장하게 일갈한 적이 있는데,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과연 이승만은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김일성은 친일파의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발라냈는가. 이건 전형적인 감정적 대응으로 1% 진실로 99%의 거짓을 가리고 1%의 거짓으로 99%의 진실을 뒤덮는 것이다. 그 결과 1%의 진실은 100%의 진실로 둔갑하고 1%의 거짓은 100%의 거짓으로 매도되었다.

[보복과 정의]

눈에는 눈,이에는 이, 함무라비의 법전
눈에는 눈,이에는 이, 함무라비의 법전

함무라비 법전과 성경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말이 나온다. 주먹으로 때리거나 화살을 쏘아 눈을 하나 실명시켰으면 똑같이 주먹으로 때리거나 화살을 쏘아 눈을 하나 실명시키고, 돌로 치거나 팔꿈치로 쳐서 이를 하나 부러뜨렸으면 똑같이 돌로 치거나 팔꿈치로 쳐서 이를 하나 부러뜨리라는 말이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의 기본 정신이다. 보복에서 정의로 나아가는 위대한 첫걸음이다. 옛날에는 눈이 하나 뽑혔으면, 원수를 잡아다가 눈을 두 개 뽑거나 눈을 두 개 뽑고도 성이 안 차 귀도 하나 잘랐다. 아니 죽이는 수가 더 많았다. 그러면 이렇게 당한 사람이 가만있을 리 없다. 전 가문을 동원하고 전 부족을 동원하여 수십 명을 죽여 버렸다. 그러면 다시 기운을 차린 쪽에서 이웃 부족까지 동원하여 수백 명을 죽였다. 보복이었다. 복수였다. 적나라한 힘이 지배하는 중국 무협지의 가장 큰 주제이기도 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율법은 제발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눈이 하나 다쳤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눈을 하나만 다치게 하라는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칼처럼 냉철한 이성적 심판이었던 것이다. 이 정신은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다. 지은 죄만큼 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무법천지의 원시시대처럼 무지막지한 보복을 하는 데가 있다. 거기가 바로 북한이다. 김일성 사진이 박힌 신문지로 코를 풀었다고 하여 강제수용소에 끌고 가서 소처럼 부려 먹으며 매 타작을 한다. 소보다 못한 것이 하루 15시간을 일하고도 옛날 노예보다 못 얻어먹는다. 그래서 허우대가 멀쩡한 사람은 금방 죽어 버리거나 병신이 된다. 에너지 섭취량이 적은 아주 작은 여자들이 제일 잘 버텨낸다.

그 안에서는 누구든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바로 총살이다. 재판이고 뭐고 없다. 신문지는 신문지일 따름이지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신이기 때문에 그 사진은 구겨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이제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마을에 한 부밖에 배부하지 않는 신문은 보고 나면 아예 전부 회수해 버린다. 이게 바로 일제를 청산했다는 북한의 실상이다. 한없는 보복과 증오가 넘치는 땅이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북한 전 지역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총살(사형집행) 포고문. 사진=구글 이미지

국가를 이루어 살면서 법으로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게 되면서, 죄에 대한 벌은 점차 신체에 가하는 형벌에서 구금으로 넘어가고 구금도 갈수록 인간적으로 변해 간다. 죄 없는 사람을 잘못하여 벌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범법자를 제대로 가리려는 노력도 부단히 이어져 왔다.

조선 세종조에 우리는 이미 심증이 아닌 물증을 토대로 판결하고 이도 안심 못해 3심 제도를 도입했었다. 아무리 사심 없는 판결을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제도화한 것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형무소도 교도소로 바뀐다. 선진국에서는 그 교도소가 후진국의 호텔보다 낫다. 구금도 벌금형으로 대체되는 수가 많다. 이를 악용하는 부자들이 많기도 하지만, 이 벌금형도 보통 괴로운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등바등 벌어도 이를 고스란히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으로 때우는 사람이 숱하다. 단위가 수백억 원 수천억 원일수록 더 그러하다. 주는 밥 다 먹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수백억 수천억 버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일제청산이라는 말을 쓰는데, 거기에는 친일파에 대한 인적 청산과 그들에 대한 보복을 염려에 두는 수가 많다. 연좌제를 적용하여 그들의 후손도 망하게 해야 된다는 악감정이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 실지로 북한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한다. 친일파 후손이라고 낙인찍히면 3대가 지나도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전인민의 원수가 된다.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죄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야 한다.

일본인들과 함께 술마시며 야유회 하는 조선인들. 사진=구글이미지

한국에서 이미 친일파는 자연사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산다고 '확신'하고 그들에게 윤봉길이나 이봉창처럼 수류탄을 던지고 싶어 한다. 그건 감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그건 복수지 정의 실현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한국인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게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청산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인적 청산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개돼지 다루듯 했다. 잘해야 마소 다루듯 했고 최대한 잘해야 마름 다루듯 했다. 이중에서 우리가 일제 청산이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이 바로 마름 역할을 한 자들이다. 옛날에 지주는 이 마름을 앞세우고 소작인들을 착취했다.

고려 말이나 조선 말에는 국법이 와해되어 지주들이 소출의 50%~60%를 거둬 가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마름이 일부 착복한 것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 마름도 신세가 소작인과 다름없었다. 감옥에서 간수들이 죄수 중의 한 사람을 기율 반장으로 세워 부려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주인 양반의 눈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마름도 소작인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실지로 소작인들을 착취하는 자는 지주였지만, 이들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원망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마름에게 퍼부었다. 악의 원흉은 주인이었지만, 악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 또 다른 피해자인 마름을 악의 원흉으로 생각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에게 잘못 보이면 그나마 생명 줄인 소작권을 빼앗길 수 있었기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평소에 이 마름에게도 비굴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은 꽃 대궐에서 호의호식하면서 고상한 책을 읽고 벗과 더불어 인생과 도덕을 논하고 예술을 즐기면서 하인하녀를 꾸짖고 마름을 나무라고 소작인을 개탄했다. -- 게으르다느니, 무식하다느니, 배은망덕하다느니.

[해방과 일본인 축출]

당시 부주석(서열 2위)로 임명됐던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는 일제 강점기 시절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한 친일파였다. 또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7촌 아저씨인 강양욱은 일제 강점기 도의원(道議員)을 지낸 친일파였으나 북한 정부 수립 후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초대 내각의 부수상이었던 홍명희(洪命熹)는 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말 전쟁비용 마련을 위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사법부장 장헌근은 중추원 참의 출신, 보위성 부상이었던 김정제는 양주군수를 지냈다.
당시 부주석(서열 2위)로 임명됐던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는 일제 강점기 시절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한 친일파였다. 또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7촌 아저씨인 강양욱은 일제 강점기 도의원(道議員)을 지낸 친일파였으나 북한 정부 수립 후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초대 내각의 부수상이었던 홍명희(洪命熹)는 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말 전쟁비용 마련을 위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사법부장 장헌근은 중추원 참의 출신, 보위성 부상이었던 김정제는 양주군수를 지냈다.

일제 청산에서 인적 청산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각론에 들어가서 누구를 우선적으로 청산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간단한 듯 복잡하고 쉬운 듯 어렵다.

첫째, 누구를 청산 대상으로 삼느냐.

둘째, 어떻게 청산하느냐.

청산 대상 1호는 남의 나라에서 주인 행세를 한 일본인이다. 이 당연한 것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우리 힘으로 내쫓은 것은 아니지만, 남북한 양쪽에서 일본인은 모조리 쫓아냈다. 통쾌한 일제 청산이었다. 인적 청산에서 90% 이상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마름이 아무리 악했다고 해도 그들 100명이 악독한 주인 1명보다 더 악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 역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남북한에서 일본인을 각각 미국과 소련의 힘을 빌려 내쫓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있다. 한국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노력영웅이라 하여 1,000명의 일본인을 특별 대우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일제가 90%의 공장과 발전소를 북한 지역에 지어 놓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국인에게는 거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고 특히 과학기술자를 거의 기르지 않았다. 열등한 민족으로 남겨 둠으로써 한민족을 영원히 지배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게 되면, 한국인은 부지불식간에 일본인을 능가하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황국신민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었던 소학교 교육에 약간의 신경을 쓰고 충실한 마름을 기르기 위해 극소수의 양반 지주 자제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일본으로 쫓겨나면서 당시에 어느 나라 못지않게 훌륭한 공장과 발전소를 고스란히 남겨 두고 갔지만, 북한에서는 이를 가동할 인재가 없었다. 한국인은 모조리 저임금으로 단순 노동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일본인을 그렇게 미워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일본인 1,000명을 노력 영웅이라며 파격적으로 대우했다. 일본인은 항복하면 더 이상 조국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심 없이 새로운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한다. 이들은 김일성이 원하는 대로 공장을 가동하면서 한국인에게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그 결과 북한은 공장과 발전소가 거의 없는 한국에 비해 월등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전기도 북한에서 보내 주지 않으면 한국은 암흑세계에서 살아야 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무기를 지원 받으면서 동시에 한국에 비해 월등한 공장과 발전소를 이용해서 남침을 위한 군수 산업에 박차를 가했다.

국민을 먹여 살리는 데 공장을 이용한 것은 겨우 비료 공장과 월북한 이승기의 도움으로 세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비날론 공장밖에 없었다. 조국 해방이란 미명하에 대를 이어 군수 산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같은 민족으로 평균 신장이 10cm나 작아진 게 바로 이런 산업 정책 때문이었다.

한국에는 일본인이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설혹 한국인과 결혼해서 남아 있다고 해도 권력과 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어느 쪽이 인적 청산을 잘했는가?

[마름--일제 앞잡이의 청산]

한국에서 북한 방송과 신문에서 줄기차게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마름 곧 일제 앞잡이의 청산이다. 이 문제에서 항상 한국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북한에 비해서 훨씬 못하다고 부끄러워한다. 한국의 모든 불의와 부정은 바로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해방 60년에 다시 일제 청산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이것도 북한의 선전선동과 한국의 원죄의식과는 정반대로 한국이 훨씬 일제 청산을 잘했다.

이미 밝힌 대로 죄를 지은 사람을 정의의 저울에 달 때,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보복의 추를 추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 죄만큼 벌을 주지 않고, 그 사람 자체를 악인으로 몰아 연좌제까지 적용하여 말살시키려는 복수심은 적절한 벌을 준 다음 그 사람에게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될 기회를 주지 않고 아무 죄가 없는 그 후손들에게까지 부모의 원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새로운 권력과 부를 독점하려는 저열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강아지 한 마리 훔쳐 간 사람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개 패듯 패고 그 집안의 개와 고양이 닭뿐만 아니라 소까지 끌고 가고 가재도구를 다 가져가고 이윽고 그 집까지 차지하고, 죄인은 일벌백계로 죽여 버리고 그 아들딸들은 노예로 삼거나 짐승처럼 팔아넘기거나 죽여 버리는 짓을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하면 안 된다. 그러면 강아지를 훔친 사람보다 100배나 나쁜 사람이 된다.

북한 함경북도 어느 마을 소녀들. 이들은 소녀의 여린 몸으로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땔감을 마련한다. 현재 북한정권은 농민의 자식은 계급이동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농민 계급은 항상 계급이동을 하기 위해 평생 노력한다. 사진=구글이미지
북한 함경북도 어느 마을 소녀들. 이들은 소녀의 여린 몸으로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땔감을 마련한다. 현재 북한정권은 농민의 자식은 계급이동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농민 계급은 항상 계급이동을 하기 위해 평생 노력한다. 사진=구글이미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바로 이런 짓을 자행했다. 북한에서는 일제 앞잡이를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지주와 자본가로 정의 내렸다. 그런 다음 이들을 철두철미하게 청산했다. 잔인하게 보복했다. 그 자손에게까지 권력과 부와 명예를 원천적으로 박탈해 버렸다. 그들과 그 자손에게 적대계층이란 낙인을 선명하게 찍어 그들에게 노예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강요하면서도, 노동자농민보다 더 천한 신분으로 전락한 그들의 노동을 대를 이어 착취하였다.

노동자·농민의 노동을 신성시하는 나라라고 선전하면서 적대계층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굶주림과 강제수용과 저주와 불명예였다. 그러면서 일제와 봉건주의를 한꺼번에 청산했다고 날마다 피의 축제를 벌였다.

죄인에게 벌을 주되, 살인죄나 강도상해 등 그 죄질이 아주 나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민주주의의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구금보다는 벌금으로 그 죄를 물어야 한다. 또한 구금하더라도 개전의 정이 뚜렷하고 모범적인 수감 생활을 하면 모범수로서 감형을 해야 한다. 또한 사회에 나가서 더 이상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직업 훈련을 시켜 주어야 한다.

이 점에서도 한국이 북한보다 월등히 나았다.

마름에게 죄를 묻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은 그가 주인의 주구 역할을 하면서 챙긴 재산을 빼앗아 버리는 일이다. 몽둥이찜질을 하고 멍석말이를 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서 토지를 빼앗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이 때도 무조건 빼앗으면 안 된다. 그에게도 최소한 먹고살 만한 돈을 주고 토지도 남들만큼은 갖게 해 주어야 한다.

응분의 죄를 물어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악독한 주인이 사라진 새로운 세상에서 넓은 의미에서 정도의 차이일 뿐 다 같은 피해자로서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옛날 양반에게 가장 가혹한 벌은 토지를 몰수하는 것이었다. 양반은 토지가 없으면 상놈보다 못했다. 상놈은 몸으로 벌어먹고 살 수도 있었지만, 토지 없는 양반은 대추 먹고 이빨 쑤시는 짓밖에 못했기 때문이다.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영양실조로 서서히 죽어 갔던 것이다. 이를 잘 알았던 남북한은 일제청산의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을 취했고 한국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형식을 취했다. 이것도 북한 공산당의 선전선동이나 한국 책상물림들의 울분과는 달리 한국이 월등히 나았다. 80년대 이후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 1호로 쓰인 《태백산맥》은 허구의 형식을 빌어 역사를 철저히 왜곡했다. 북한 공산당의 선전선동과 얼치기 한국 지식인들의 무비판적 앵무새 놀음으로 이 농지개혁만큼 사실과 정반대로 알려진 것도 없다.

[농지개혁은 가장 확실한 친일파 청산]

전쟁 중 수행된 친일청산과 토지개혁. 김일성은 남침 후 친일파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이미 토지개혁이 이뤄진 땅을 재분배 하며 생색을 냈다.  
전쟁 중 수행된 친일청산과 토지개혁. 김일성은 남침 후 친일파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이미 토지개혁이 이뤄진 땅을 재분배 하며 생색을 냈다. 

해방 당시 토지는 남북한이 거의 같았다. 각각 약 200만 헥타르(200만 정보와 거의 동일). 한국은 논이 더 많았다는 차이 정도였다. 대신에 북한은 인구가 한국의 반밖에 안 되어 일인당 경지 면적에서 한국의 두 배나 되었다. 처음부터 북한은 굶어 죽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일본인이 갖은 명목으로 차지했던 농지가 남북한 합해서 40만 헥타르. 이 중에서 한국은 26만 헥타르로 북한보다 좀 많았다. 남쪽의 땅이 좀 더 기름져서 일본인들이 이남에서 더 많이 차지했을 것이다.

이것은 무상몰수하는 게 당연하다. 남북한 공히 그렇게 했다. 문제는 한국인 지주들이 가졌던 논밭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일정한 가격을 쳐주어야 한다는 설과 다짜고짜 빼앗아 버려야 한다는 설로 갈라졌다. 전자가 유상몰수설이고 후자가 무상몰수설이다. 소련을 비롯하여 중공과 동구 및 북한은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이것도 무상몰수해 버렸다. 증오에 입각한 복수였다.

가진 자라고 하지만, 그들도 천차만별인데 이를 싸잡아 악마로 몰아 버리는 증오심을 정의실현이란 말로 포장하고서 새로이 권력을 얻은 자들이 폭력으로 인간을 짓밟고 재산을 가로챘던 것이다.

가진 자로서의 잘못을 묻되, 그것이 복수가 아닌 정의가 되려면 그들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새 세상에서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지 않고 함께 살아 갈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시행된 유상몰수는 박애 정신에 입각한 정의의 실현 방법이었다.

얼핏 보면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농민을 위해 엄청나게 훌륭한 정책이었던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정의보다 복수에 입각한 것이어서 대체로 친일파와 겹쳤던 이전의 지주는 영원히 생매장되었다. 갈등의 씨앗이 항상 잠재되어 있어서 통제된 사회로 이들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국가 권력이 모든 개인 사생활을 철저히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은 토지를 무상분배 받아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배부르게 먹고살았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천만에! 여기서 백면서생들과 순진한 국민들이 깜박 속는다.

지주가 욕을 얻어먹은 이유는 무지막지한 소작료로 농민을 수탈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말과 고려 말과 조선 말에는 50% ~ 60%를 뜯어가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일제시대도 그랬다.

그래서 북한만이 아니라 소련, 중공, 동구의 공산주의자들은 저 유명한 3·7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30%만 걷어 가겠다는 말이다. 단 그것을 지주에게 맡기지 않고 국가가 걷어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상몰수 무상분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현물세라고 하여 25%를 책정했다.

그러나 이것도 명목뿐 갖은 구실로, 일제의 공출제(供出制) 대신 성출제(誠出制)란 허울로 40%까지 걷어가곤 했다. 30% 이상을 뜯어갔다. 겨우 입에 풀칠하는 농민에게 세금을 무려 30% 이상 뜯어간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이것을 한국의 역사와 비교해 보면, 공산당이 그렇게 비난하는 봉건 왕조보다 훨씬 못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백성이 지주로부터 수탈되는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는 것을 국정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은 세금을 공산당이 뜯어간 것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10%만 걷어갔다. 10분의 1세였던 것이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상적인 세율로 만인이 공감하던 바였다. 세종대왕은 이 10%의 반밖에 안 되는 5%를 걷었다. 고려와 조선의 태조, 그리고 세종대왕은 그래서 위대한 인물이다. 공산주의자들보다 적어도 3배 내지 6배 위대한 성군이다.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후 모든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서 토지개혁 하였고, 특히 <5년에 150% 상환>이라는 대원칙을 내세워 단 5년만 30%씩 내면 그 땅을 영원히 농민들이 소유하게 만들었다. 사진 = 구글이미지 

한국의 이승만은 왕건이나 이성계, 세종대왕보다 위대한 일을 했다. 대부분 지주계층이었던 당시의 여당과 야당 의원이 일치단결하여 반대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공산주의자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하여 200만 정보의 농지를 200만 농가에 1정보씩 골고루 나눠주었다.

정전제라든지 균전제라든지 동양에서 3000년 동안의 이상이었지만, 그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것을 획기적인 방법으로 실현한 것이다. 정전제나 균전제는 어디까지나 왕족과 귀족의 몫으로 왕창 떼어놓고 나머지를 농민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세금을 10%만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새로운 권력층을 비롯하여 그 어떤 자도 대토지 소유자로 단 한 명도 인정하지 않고 전 농지를 농민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만약 이렇게 했더라도 세금을 10% 이상 걷었다면, 그것은 왕건이나 이성계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조봉암은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했지만, 현물세를 30% 걷는 것은 농민을 다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라는 단일 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것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농지개혁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 물러갔지만, 이승만의 용단으로 거의 조봉암의 안대로 농지개혁을 완결 지었다.

그것이 바로 <5년에 150% 상환>이라는 대원칙이었다. 즉 북한에서는 30%씩 영원히 새로운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30%씩 단 5년만 내면 영원히 그 땅을 자신이 소유하여 자손에게도 길이 물려 줄 수 있게 한 것이다. 1년에 50%~ 60% 소작료를 바치던 일제시대와 비교하면,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영원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30%씩 5년이 아니라 500년을 내도 그 땅은 자기 땅이 안 되었던 것이다!

사진=구글이미지

문제는 하나 더 남는다. 지가를 상환한 다음에 국가에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는 것이다. 만약 농지세를 10% 이상 걷어 가면 고려 초나 조선 초보다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자료를 알 수 있는 것이 1950년의 ‘임시토지수득세’이다.

이해에 정부는 200만 정보의 농지에 대해서 140만석의 농지세를 걷기로 했다. 이것으로 세율을 계산해 보면 한국의 농지개혁이 농민에게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알 수 있다. 1950년 곡물 생산이 345만 톤 곧 2156만석. 140만석을 2000만석으로 나누면, 0.07 곧 세율이 7%였다. 성군인 세종조의 세율과 비슷하다. 북한에서는 세율이 30%이고 한국은 7%였던 것이다! 고추와 마늘, 배추와 무 등에 대해서는 따로 걷지 않은 걸 감안하면 6% 정도였을 것이다.

국민 대부분이 전혀 세금을 낼 형편이 못 되어 1950년 당시 총세입 중 조세수입은 17%밖에 안 되어(나머지는 대부분 미국의 원조) 조세부담률이 2.6%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농민들에게는 이 7%도 매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1956년 신익희가 한강 백사장에 모인 30만 군중 앞에서 이 토지수득세를 성토하여 크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내 땅을 갖게 된 것이 너무 좋아서, 이론가들이 5년 만에 지가를 상환하는 것이 농민들에게 가혹하다고 혹평했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대개 3년 안에 다 갚아 버렸다. 1957년까지는 100% 갚았다.

또한 1956년부터 PL480에 의해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지원 받기 시작하면서 나라 사정이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5·16 이후에는 농산물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서 1966년에는 1956년의 340만 톤에 비해 두 배가 넘는 703만 톤을 생산했다. 1978년에는 821만 톤까지 늘어났다. 1990년 이후에는 600만여 톤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양곡 소비가 많이 줄었고 쌀 외에는 곡물 생산이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농지세는 1960년대만 해도 지방세의 약 40%를 차지했지만, 2000년 현재 지방세의 0.01%밖에 안 된다. 1962년 지방세가 52억 원일 때 농지세는 20억 원이었지만, 2000년 지방세가 20조 원으로 늘어나는 사이 농지세는 31억 원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거의 대부분 면세 대상이란 뜻이다. 이것은 농민들이 상대적으로 못 산다는 말도 되지만, 옛날에 지주에게 소출의 50%~60% 수탈당하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도 북한은 협동농장이란 미명하에 농민들이 그 이상으로 국가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얼마나 위대한 개혁이었는지 절로 알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대부분 내용을 살피지 않고 형식만 갖고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에 대해 저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주먹으로 제 가슴을 꽝꽝 친다. 청맹과니가 따로 없다.

[북한의 기만적인 농지개혁 그 후]

북한의 협동농장김일성은 토지개혁 이후 전국의 농민들을 강제로 협동조합에 들게 하여 땅을 다시 국가에 반납하게 만들었다. 이후 농민 계급의 이동을 제한하고 농민계급에서 노동자계급 또는 타 계급으로의 계급이동을 철저히 막았다. 즉 북한의 농민계급은 김일성에 의해 완전히 노예로 전락하게 됐다. 즉 협동조합 강행 후 북한 농업은 완전 망한 상태이고 기술 전진도 없는 형편이다.  사진=구글이미지
북한의 협동농장김일성은 토지개혁 이후 전국의 농민들을 강제로 협동조합에 들게 하여 땅을 다시 국가에 반납하게 만들었다. 이후 농민 계급의 이동을 제한하고 농민계급에서 노동자계급 또는 타 계급으로의 계급이동을 철저히 막았다. 즉 북한의 농민계급은 김일성에 의해 완전히 노예로 전락하게 됐다. 즉 협동조합 강행 후 북한 농업은 완전 망한 상태이고 기술 진전도 없고, 농기계도 없는 형편이다. 사진=구글이미지

북한은 그나마 30%의 현물세를 걷어갈 때만 해도 일제시대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1958년에 전 농지를 협동농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내 땅'이 원천적으로 부정되었다. 아무런 의욕이 날 리가 없었다. 생산성은 급격히 떨어졌고 가져가는 것도 급격히 적어졌다. 50% ~ 60%의 세금을 내는 것 이상으로 착취당했다.

그 결과 허리를 가장 많이 졸라매었던 일제 말기에 한국인은 일일 평균 756g의 식량을 섭취했지만, 북한 주민은 1996년에 겨우 540g을 섭취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못 살던 철종 시대의 수준이라고 한다. 반면에 199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는 육류를 식량으로 환산해서 계산하면 일일 평균 1200g 정도를 섭취한다.

북한 주민은 60년 동안 대부분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되었다. 90년대 이후 몇 년이 아니었다. 무려 60년 동안 그러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3대가 나란히 서면 할아버지가 제일 크고 그 다음에 아버지, 그 다음에 20살 넘은 아들이 크다. 북한 군인들은 평균 신장 162cm, 군화 사이즈 245mm로 한국의 중2 정도밖에 안 된다.

인구 당 경지 면적이 한국의 2배나 되지만, 북한 주민은 한국인보다 평균 10cm 작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산다는 말이다. 한국은행이나 통계청에서 북한의 1인당 GNP를 800달러 정도로 잡는 것은 웃겨도 보통 웃기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 800 달러 중 700 달러가 동족을 말살시키려는 무기 생산으로 올린 GNP일 뿐이다. 실질 국민소득이 1년에 100달러도 안 된다. 전 세계 최빈국이다.

2002년 7월 1일 <경제개선조치> 이후 배급도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다는 의사가 겨우 3000원을 받는다. 이것도 다 받지 못한다고 한다. 경제개선조치를 발표하면서 쌀의 판매가(배급가)를 8전에서 44원으로 무려 550배 올렸지만, 이미 시중에서는 300원으로 치솟았다. 의사 월급으로 쌀을 겨우 10kg밖에 못 산다.

한국은 외국인 근로자도 일본과 더불어 세계서 제일 비싼 쌀을 한 달 월급으로 무려 400kg을 살 수 있다. 북한에선 의사도 부수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환자는 하다못해 의사한테 옥수수 하나, 고구마 하나라도 찔러줘야 수백 번 소독해서 쓰는 일회용 주사기로 주사 한 대 맞을 수 있다. 공식 환율은 1달러에 150원이지만, 시중 환율은 무려 1300원. 달러로 환산하면, 겨우 2~3달러밖에 못 받는다.

공식 환율로 쳐도 20달러. 노동자들은 공장의 80% 이상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월급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평균 연봉 4만 달러 내지 5만 달러의 한국인 노동 귀족들이 노동절을 자축한다며 평양에 가서 북한의 노동자들과 잔치를 벌인 것은 희대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노동자 농민들은 100평 정도 되는 스스로 개간한 개인소유의 뙈기밭에서 생산한 걸로 겨우겨우 살아간다. 헐벗은 산이 더욱 헐벗을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의 본을 받아서 1950년처럼 한국과 똑같은 식의 농지개혁을 단행하면, 북한은 2~3년 이내에 식량을 완전 자급하고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중국과 월남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300만이 굶어 죽고도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지원하자 농지를 개혁할 생각을 전혀 않고, 김씨 가문이 유일무이한 대지주로 군림하면서 전 농민을 뼛속까지 착취하기 때문에 북한의 전 주민이 굶주린다.

스스로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한국의 빛나는 농지개혁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혹시 '삐칠까' 봐, 아무 소리 않고 수백 만 톤씩 식량을 갖다 바치니까, 김정일은 개혁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것이다. 도리어 한국의 지식인들과 위정자들은 한국의 농지개혁을 실패한 것이라 욕하고 북한의 농지개혁을 성공한 것이라 부러워하고 있다.

[누가 친일파인가?]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경관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경관들

일제시대의 명사 중에는 친일파로 낙인찍히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아직도 이들의 언행을 찾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국가를 바로 세우겠다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17대 국회에서는 일제청산법이 기어코 제정될 것 같다. 그들이 지탄하는 사람들이 친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친일하지 않았던가.

한국은 몇몇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독립투사들을 빼고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친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친일도 경중이 있다. 일제는 영원한 식민 지배를 위해서 그들이 권력자이자 지주로 군림하면서 한국의 양반 지주층을 마름으로 부려먹었다. 그들에게 기득권을 대부분 인정하면서 친일파로 끌어들였다. 일제 시대에 잘 먹고 잘 산 사람들,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체로 상대적으로 정도가 심한 친일파였다.

이들 중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이 나왔다. 여당인 자유당보다 오히려 야당인 한민당에 대지주가 더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농지개혁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하더라도 지가를 충분히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그대로 기용했다고 하지만, 기용하되 철저하게 그 죄를 물었다. 단지 감옥에 안 보냈을 따름이다. 그것이 바로 친일파의 생명 줄이었던 농토를 헐값으로 빼앗아 친일파에게 시달렸던 농민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던 농지개혁이었다. 이것은 겨우 5년간 적의 치하에서 나치 앞잡이 역을 담당했던 자들을 처단한 드골보다 수십 배 강력하고 광범위한 친일파 척결이었다.

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차남이다
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차남이다

그렇게 한 다음에는 더 이상 너나없이 일제 침략의 희생자였던 한민족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지금도 끝없이 증오가 증오를 낳는 복수의 사슬을 이어가는 북한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친일파를 척결했던 것이다.

북한은 철저히 형식과 명분에 얽매였지만 한국은 내용과 실질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은 평등의 지옥사자를 앞세워 증오의 칼을 휘둘러 한민족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봉건왕조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는 터전을 마련했지만, 한국은 자유의 여신을 앞세워 박애의 횃불을 높이 들어 한민족 역사상 가장 평등한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일본, 일본인]

우리 민족이 핍박받던 일제강점기, 일본의 여성들
우리 민족이 핍박받던 일제강점기, 일본의 여성들
우리 민족이 핍박받던 일제강점기, 일본의 여성들
우리 민족이 핍박받던 일제강점기, 일본의 여성들
우리 민족이 핍박받던 일제강점기, 일본의 여성들
일제강점기의 목욕탕
일제강점기의 목욕탕

친일파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악독한 일본인을 어떻게 정의의 추에 매달까. 해방 후 우리는 이에 대해서 친일파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가는 것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노력해야 했다. 이 점에서 한국은 지식인들과 위정자들이 서로 달랐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지식인들과 전혀 달랐다. 그는 실질을 숭상했고 지식인들은 명분을 숭배했다. 박정희 시대만 해도 한국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부모가 잘 살던 사람 곧 지주 계급 출신으로 친일파 후손이 많았다.

그와 반대로 박정희를 비롯한 5·16 주역들은 부모가 대체로 소작인 출신으로서 일제시대에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 양쪽으로부터 핍박받은 사람들이었다. 어떤 굴욕도 참고 때로 친일파란 욕을 얻어먹으면서 웅지를 품고 개인의 노력으로 일제시대든 해방시대든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군대에 들어가서 신분 상승을 꾀하며 새 시대에 대비해서 꾸준히 능력을 배양했던 사람들이다. 과학기술을 배우고 조직을 배우고 사회정의를 배우고 애국을 배웠다.

5·16 이후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한국과 북한은 전혀 달라졌다. 그 결과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정의 실현에서도 겉보기와는 달리 한국이 북한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나았다.

형식상으로 보면 북한은 일본과 아직 정식으로 수교도 안 했으니까, 배상금 몇 푼 받고 일본과 수교하여 일본에게 해마다 무역적자를 갱신하는 한국보다 자존심을 잘 세우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미래 지향적인 박정희와 과거 지향적인 김일성]

일본에 대한 외교에서는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대동소이했다. 단호했다. 아예 상종을 안 했다. 일방적으로 그어 놓은 동해안의 평화선 안으로 일본 어선이 들어오면 사정없이 잡아서 물고를 냈다. 통쾌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외세를 빌어 동족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본에 전쟁 특수를 선물하여 일본이 선진국으로 일어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치욕스러운 일제시대에 대해 분개할 줄만 알았을 뿐 거기서 교훈을 전혀 얻지 못했다.

그 교훈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끼리 싸우면 이웃 나라 좋은 일만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말로 싸우다가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갔는데, 이제 그는 외세를 빌어 탱크를 앞세우고 총칼을 들고 동족을 학살하러 온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철저하게 망하려고 작정하지 않고는 저지를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삼국 통일 후 1300년 만에 동족상잔을 벌여서 일본인은 한 명도 못 죽이고 동족을 300만이나 죽였다. 삼천리금수강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쟁 후에도 남북이 휴전선 건너의 동족을 간악한 일본인보다 수십 배 불신하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망해야 마땅한 일본은, 한국을 짓밟은 업보로 미국의 일개 장군에게 신과 동격으로 알았던 천황이 비루먹은 개처럼 절절 매는 것을 보게 된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후에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뒹굴던 일본은 김일성 덕분에 2000년 역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이승만도 일본인을 미워할 줄만 알았지 일제시대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그 교훈을 박정희가 잘 알았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민간인 신분에서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게 된 한때 남로당에 가담했던 박정희가 잘 알았다. 그 당시 경이롭게도 문맹이 전무했던, 외국 유학파가 외무부보다 많았던, 효율적인 행정을 행정부보다 월등히 잘 알았던, 애국심이 넘쳤던, 전 국가의 힘을 다 동원한 것보다 막강한 힘을 가졌던 군대의 별이 된 박정희가 잘 알았다.

그 교훈은 바로 국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일본보다 잘 사는 것이었다.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우는 것이었다.

국력을 기른다는 것은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부터 뜯어고치는 데서 시작됨을 그는 잘 알았다.

첫째는 공산주의의 선전선동에 속지 않는 것이었다.

둘째는 500년 명분 숭배 사상을 실질 숭상 체질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 둘을 간단하게 두 마디로 표현했다.

첫째, 반공을 국시로 한다.

둘째, 잘 살아 보세. 이 단 두 마디로 그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저마다 딴소리를 하는 한국인의 99%를 하나로 묶었다. 99% 한국인에게 그것은 당장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일으키려면 과학기술과 자본과 자원이 있어야 했다. 한국에는 이 셋 중 아무 것도 없었다. 외국으로부터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국가 예산의 90%까지 지원하던 미국이었지만, 이 셋을 위해서 도와주지는 않았다. 거지에게 동냥하는 식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교육이었다.

계획은 이미 민주당에서 만들어 놓았다. 그걸 일부 고치면 되었다. 그러나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한 어린이가 서울대 합격할 계획을 세우는 데는 5분이면 된다. 그러나 실천하는 데는 10년 이상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 소득 2만 불 달성 계획도 한 달이면 다 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10년이 지나도 아직 1만 불 주위에서 맴돈다.

[문제는 실천]

문제는 실천이다. 아무도 과학기술에 대해서 모르고 아무도 과학기술에 대해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일제는 한국인에게 과학기술을 의도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고 한국인은 유교사상에 찌들어 과학기술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해방 후에도 그랬다. 너도나도 정치학이나 법학, 외교학, 철학, 사학, 문학을 하려고 들었을 뿐이다. 그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산업자본을 대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해방 후 미국이 국가 예산을 다 대어 주다시피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산업화할 줄 몰랐다. 농지개혁은 잘했지만, 그걸로는 골고루 입에 풀칠할 수 있을 뿐이다. 해마다 식량이 태부족했다. 미국의 원조는 잉여농산물을 비롯하여 소비재가 78%나 차지했다. 이렇게 먹고살기에 급급해서는 이미 2차 대전에 비행기를 만들었던 일본은 영원히 따라가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미국은 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려고 했다.

[미국의 힘으로 해방되어 우리는 일본에 배상금을 받을 수 없었다]

1965년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1965년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1960년대 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0불로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원조자금마저도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개발을 추진하려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자금을 받아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하여 8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자금으로 포항제철 등 국가 기간산업을 건설하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다.

기댈 곳은 미우나 고우나 일본뿐이었다. 그들에겐 과학기술도 있었고 자본도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호락호락 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1959년 한국은 농산물과 광산물 중심으로 겨우 1916만 달러를 수출했다. 수입은 7852만 달러.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일제 35년을 생각하면, 그 당시 돈으로 100억불을 받아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일본이 줄 리가 없었다.

이유는? 해방을 우리 힘으로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힘으로 일본인으로부터 해방되고 일본인을 일본으로 다 쫓아냈기 때문에 우리는 배상금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원조하더라도 절대 배상금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북한이 아직도 미몽에 빠져 대일 수교의 대가로 배상금을 요새 돈으로 100억불 정도 받아내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일본은 절대 안 준다. 김일성이 겨우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 순사 한두 명 죽인 것밖에 없는데(이것도 진짜 김일성으로부터 가로챈 것이지만), 무슨 배상금은 배상금!

왜병을 100만 명쯤 죽여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켰다면, 그들은 두말없이 1945년 기준으로 배상금을 100억불이라도 주겠다고 약정하고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더라도 그 돈을 냈을 것이다. 배상금은 주더라도 미국에게 주지 한국이나 북한에는 줄 리가 없다. 일본으로서는 천만다행하게도 미국은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미국 점령군에게 개보다 더 비굴하게 꼬리를 흔든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현실적 선택을 했다. 시간이 돈이었다. 승전국이 아닌 상황에서 아무리 밀고 당겨 봐야 소용이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기회비용이 훨씬 더 커질 게 뻔했다. 1964년에 수출 1억불을 달성했으니까, 1965년 일본과 수교하면서 대일 배상금이 아니라 대일 청구권으로 약속 받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총 9억 달러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이중의 1억 7천만 달러로 전 세계로부터 걱정 어린 충고를 받고 싸늘한 비웃음을 사면서 포항제철을 건설했다. 그 후에 우리는 싸우면서 건설하고 배우면서 건설하여 세계 제1의 종합제철공장을 만들었다.

반드시 해야만 할 일도 욕 얻어먹는 것이 두려워 무사안일로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재임 중에 적당히 넘어가고 '대과가 없었습니다.'라고 이임 인사를 하는 게 500년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온 나라에서 박정희는 분명 이단아였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욕을 얻어먹지만, 일반 서민들은 그를 누구보다 존경한다.

지식인은 양반이고 서민들은 상민이라 명분이 아닌 실리를 추구한 박정희를 지식인은 끝내 이해하지 못하지만, 서민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잘 이해하는 듯하다. 괴이하게 많은 지식인들은 인류 최악의 독재자인 김일성 부자는 욕할 줄 모른다. 친일파 척결, 평등, 평화, 노동자 농민, 주체, 민족, 자주--이런 명분에 선전선동에 요모조모 따져보지 않고 너무도 쉽게 잘 넘어간다.

이제 10년 이상 명분파들이 정권까지 잡게 되면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이런 거짓이 대세를 장악하게 이르렀다. 전 국민이 김정일의 노예가 되기 일보 직전이다. 전쟁을 회피하려다가 도리어 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미국을 능가하는 자유와 평등을 다 얻으려다 일제시대보다 못한 자유와 평등을 얻게 되기 일보 직전이다.

박정희는 과학기술도 없고,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는 3무에서 시작하여 99%의 국민을 한데 모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일자리를 무려 1천만 개 이상 창출하여 90%가 적빈층이었던 국민을 70% 이상 중상층으로 끌어올렸다.

새마을운동으로 농가 소득을 도시 가구 소득과 역전시키기까지 했다. 1977년에는 신년사에서 당당히 북한에게 쌀을 무상으로 원조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미군을 이용하여 군비를 줄임으로써 경제건설을 우선시하여 국부를 비약적으로 늘린 결과 1979년에는 불과 GNP의 6%로 자주국방도 거의 달성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라는 명분에 밀렸다. 그래서 산업화라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장렬하게 죽는다. 연필 하나 지우개 하나 제대로 못 만들던 나라에서 그는 일본을 턱밑까지 쫓아가서 그 다음에 누군가 비전 있는 지도자가 나오면 일본을 능가할 초석을 놓았다. 그는 과학기술과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꿈같은 KIST를 세우고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 그리고 한양대 공대를 오늘날 의대보다 더 인기 있는 대학으로 키웠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해도 95% 반대하는 고집불통 최형섭 박사를 믿고 맡겨(*), KIST 소장으로 또는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그를 1978년까지 중용하여 일본을 두렵게 만든다.

(*1965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을 만나러 가면서 박정희는 연구소장들 앞에서 스웨터를 2천만 달러나 수출한다며 자랑했다. 이때 최형섭은 이렇게 말했다.

“그 참 기특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전자 제품만으로 이미 10억 달러를 수출합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기술개발에서 옵니다.”

박정희는 존슨을 만난 후 원조 받은 5천만 달러 전액을 KIST를 설립하는 데 쓴다.)

그의 사후 과학기술 정책은 거의 실종했지만, 다행히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서 체신부에서 오명이 차관과 장관으로 10여년 근무하면서 IT 산업의 기반을 확실히 닦아 두었다. 그 후에는 민간 기업에서 이건희가 삼성전자에 박사급만 해도 서울대보다 500명 많은 2천여 명을 모아 정부 전체의 연구개발비에 맞먹는 연구개발비를 투자하여 일본의 전자회사 전체를 합한 것보다 많은 순익을 올리게 하였다.

지리멸렬한 과학기술 정책은 앞으로 비전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비로소 꽃이 필 것이다. 그러면 바둑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순식간에 일본과 중국을 능가하여 10여 년간 세계 1위로 군림하고 있듯이 두뇌 싸움인 과학기술에서 일본을 능히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일제를 완벽하게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 부자의 일제 계승]

김일성, 김정일 북한 독재자들
김일성, 김정일 북한 독재자들

김일성은 김씨 왕조를 세우기 위해 전 국민을 증오심으로 새파랗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일본과 미국과 한국에 대한 증오를 국민 정신개조의 기본 틀로 삼았다. 기껏 갑산파와 힘을 합쳐 보천보에서 일본인 한두 명 죽인 걸로 곧 1%의 진실로 99%의 거짓을 만들어 일본을 홀로 무찔렀다고 소학교에서 고등중학교까지 정규과목으로 김일성 김정일 과목을 각각 일주일에 한 시간 배우게 하고 국어 교과서의 소재 40%를 김일성 부자의 일화로 채우고 공산주의 도덕 과목에서도 온통 김일성 부자 이야기로 채운다. 음악도 노래의 반이 김일성 김정일 찬양가이다.

일반인도 누구나 학습 총화에서는 김일성 어록을 달달 외워서 시험을 봐야 한다. 김씨 부자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삼아 전 국가를 동원해서 전 세계로부터 외교 축전을 받으며 크리스마스보다 더 성대한 생일잔치를 벌인다.

심지어 1996년부터는 개학일도 9월에서 4월로 옮겨 졸업과 개학에 맞춰 2월과 4월의 두 명절을 축제 분위기로 띄운다. 이른바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 후에 바뀐 것은 배급 제도를 철폐한 것뿐이다. 배급 체제가 와해된 지 오래 되었지만, 2002년에야 국민을 먹여 살릴 아무 대책 없이 경제개선조치란 그럴 듯한 말로 이를 공식화한 것이다. 농지는 여전히 협동농장으로 개인책임제가 아닌 분조관리제이다. 일할 공장도 없다. 노동자 농민이야 굶어 죽든 말든 군대만 챙길 뿐이다. 무기 생산에 전력을 기울일 뿐이다.

그래서 예비전력 745만 명도 100% 개인화기가 있다. 이젠 미사일과 핵폭탄과 생화학탄 개발에 전력을 기울인다. 핵폭탄을 능가하는 땅굴도 휴전선에서 몇 개 발각되었다 하여 잔뜩 겁을 먹고 안 팔 리가 없다.

1945년 9월 16일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의 신분으로 북한에 들어온다. (한국에 이승만이 미군 장교로 들어왔다고 해 보라. 아마 그는 죽자마자 부관참시되었을 것이다.) 그의 무리는 소련군 88여단 소속으로 왕년의 빨치산파 중에서 만주파로서 겨우 50여 명. 그러나 이들 50여명이 북한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 힘은 소련군에게서 나왔다. 이때 소련군은 무려 4만 명. 평양이 어딘지 몰라 함흥으로 갈 정도로 소련군은 당시 조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싸움 한 번 않고 어벙한 미국 덕분에 북한을 공산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일성은 이 소련군 4만 명을 뒤에 엎고 권력의 정상으로 단숨에 올라간다. 먼저 친일파를 청산한다며 김일성보다 독립운동을 10배, 100배나 더한 조만식을 비롯한 우익 민족세력부터 제거한다. 이어서 차례로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마침내 1948년 2월 8일 인민군을 창설하여 그 최고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힘을 빌지 않고도 능히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6·25를 통해 남로당을 제거하고 소련군이 불러들인 허가이 등 소련파, 김두봉 등 연안파, 박금철 등 갑산파까지 1967년까지 차례차례 제거한다.

1969년에는 50여명의 만주파 안에서도 그와 동지관계에 있었던 자들을 군부 강경파로 몰아서 일거에 제거하여 유일 지도체제를 세운다. 한참 아래의 오진우를 끌어올려서 김정일의 후원 세력으로 키운다. 오로지 김일성 가문만 남긴다. 2000만 북한 주민 전체를 김일성 가문의 종복으로 만든 것이다. 기껏해야 마름을 몇 명 내세울 뿐이다.

총리를 하던 사람도 여차하면 지방으로 좌천시켜 버리거나 교화소에 보내어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든다. 김일성-김정일과 김정일의 동복동생 김경희 그리고 김정일의 아들딸이 있을 따름이다. 곁가지라 하여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도 안 되고 그 소생으로 김일성의 후계자로 떠오르던 김평일도 안 된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도 현재 북한의 2인자로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도 콩밥을 한 번 이상 먹였다.

이것이 일제를 청산했다는 북한의 실상이다.

북한 공군의 모체가 된 신의주항공학교 학생들과 金日成(앞줄 가운데). 오른쪽은 일본군 출신으로 북한 공군사령관이 된 이활.
북한 공군의 모체가 된 신의주항공학교 학생들과 金日成(앞줄 가운데). 오른쪽은 일본군 출신으로 북한 공군사령관이 된 이활.

김일성은 일제를 기가 막히게 잘 계승했을 따름이다.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환상을 쫓으며 천황을 신으로 받들고 오로지 전쟁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듯이, 북한은 오로지 남조선 해방이라는 환상을 쫓으며 김일성을 살아생전이나 죽은 후나 신으로 모시고 동족상잔으로 300만 명을 죽이고 그도 모자라 300만 명을 굶어 죽이고도 민생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러와 식량을 챙기기 위해 개혁개방은 시늉만 내고 전쟁 준비에만 골몰하며 입만 열면 평화와 민주와 민족을 외친다.

되풀이하지만 김일성은 일본 덕을 제일 많이 보았다. 무엇보다 일본은 패망하면서 이남보다 10배나 많이 세웠던 공장과 발전소를 고스란히 삼팔선 이북에 남기고 갔다. 이것을 김일성이 100% 차지했다. 일본인 1000명을 남겨 노력영웅이라며 특별대우하여 공장과 발전소를 쌩쌩 돌렸다. 과학기술이 순식간에 발전했다. GNP가 절로 쑥쑥 올라갔다. 그의 인기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반면에 이승만은 일본인들이 철도 외에는 남겨 놓은 게 없어서 일본으로부터 덕 본 게 거의 없었다.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받아 국민들을 간신히 먹여 살렸다. 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청사에 길이 남을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도 철저히 왜곡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배운 자들과 토지를 빼앗긴 자들이 그를 독재자라고 규탄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는 공장과 발전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자본도 받았다. 자원도 풍부했다.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살려 선진 조국을 만드는 게 아니라 김일성은 오로지 제 권력을 유지하고 동족을 침략하여 통일 국가의 태조대왕으로 등극할 꿈을 꾸느라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일제 청산을 하려면 일본보다 나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하고 일본보다 나은 기업을 만들어야 하고 일본보다 나은 농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곶감 빼먹듯이 일본이 남긴 것을 전혀 발전시키지 않고 주체 기술이네 뭐네 하면서 기술을 점점 퇴보시켜 해방 당시 유럽 수준의 공업 국가를 아프리카 수준의 농업국가로 전락시켰다. 도로 하나 철도 하나 제대로 부설하지 않았다.

일제 청산을 하려면 일본보다 더 화기애애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서로를 불신하고 증오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믿고 사랑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김일성 부자는 북한 전체를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 차게 만듦으로써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고 자기를 해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고 아예 관심 자체도 거의 없는 일본과 미국을 악마보다 더 미워하게 하여 증오의 대상을 불행의 원천인 자신들에게 돌리지 못하게 했다.

북한보다 10배가 아니라 100배는 잘 살아 거인족이 된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로 신음하느라 미군과 이에 빌붙은 친일파 후손과 군사독재 주구와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와 강남 부자만 호의호식할 뿐, 노동자 농민들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도 가지 못하고 껌이나 팔고 있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반복 학습시켜 자신들의 불행을 행복으로 알고 조국 해방을 위해서 군인을 110만 명이나 유지할 뿐만 아니라 14세 이상 60세 이하 745만 명의 예비전력을 확보하여 일 년에 군사 훈련을 160시간에서 500시간씩 받게 한다.

오로지 미제국주의를 물리친다며 300만 명을 굶겨 죽이고도 군수 산업만 발전시키지만, 주민들은 1년 365일 준전시 상태에서 바짝 긴장하여 어디선가 지켜볼 눈이 무서워 집집마다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걸어놓고 먼지 한 올 묻지 않게 하고 가슴마다 자랑스럽게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단다.

일제를 청산하려면 우상숭배를 배격해야 한다. 국가 지도자가 시원찮으면 사석에서는 마음껏 욕할 수 있어야 하고 공석에서는 선거로 내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일제시대에 천황 숭배하는 것 이상으로 김일성 부자를 숭배해야 한다. 절대 그들에게 욕할 수 없고 절대 그들을 선거로 내쫓을 수 없다. 대를 이어 충성할 수 있을 뿐이다.

일제를 청산하려면 일본에게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 일본과 대등하게 교역할 수 있어야 한다. 수출도 하고 수입도 하여 그로써 국민이 나날이 잘 살게 되어야 한다. 일본 제품에 혼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북한은 겉모양과 달리 철저히 일본에 종속되어 있다. 조총련에서 흘러 들어간 돈이 없으면 나라를 이끌어가지 못할 지경이다.

이제 일본인 납치자 문제로 일본은 하나하나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을 차단하고 있다. 주고받아야 하는데, 수출할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조총련의 애국심을 미끼로 돈을 갈취해 갈 뿐이다. 이제 한국은 웬만한 일제를 보아도 국산보다 낫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지만, 북한에서는 그 어떤 것이든 일제만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김정일은 아이스크림도 일본 것을 비행기로 공수해서 먹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50년대도 그보다는 나았다. 아직까지 일본보다 많이 뒤떨어진 한국이지만, 한국에서 제일 값싼 식품인 라면도 구호식품으로 보내면 너무 맛있어서 한국에 대해 거짓으로 선전선동한 것이 들통 날까 봐 나눠 주지 못하고 공산당원끼리 갈라 먹는다.

일제 청산하려면 전 국민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전국 어디나 돌아다닐 수 있게 해야 하고 누구든 감시감독하면 안 된다. 그러나 북한은 통행증이 없으면 어디도 나다닐 수 없다. 전 세계에서 이제 이런 나라는 북한 한 나라밖에 없다. 한민족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일제 청산하려면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일제는 교육에서 철저하게 한국인을 차별했던 것이다. 장기적으로 교육보다 무서운 체제 도전 세력을 키우는 게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말은 무상교육이라고 하지만, 교육 내용이 김일성 우상화 교육이 제일 많고 그나마 대학은 성분이 친일파 지주 자본가 월남 가족 월북 가족이면 아무리 똑똑해도 갈 수 없다. 직업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선택 아닌 선택을 해야 한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배가 고파 학교에 장기 결석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꽃제비로 전국을 떠돈다. 만주를 헤맨다.

일제 청산하려면 전통을 살려야 한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이순신, 정약용도 봉건주의자라며 욕한다. 오로지 김일성 가문만 있을 따름이다. 북한에는 전통이 거의 사라졌다. 최대 명절은 김일성 김정일 생일로 바뀌었다.

절도 없고 교회도 없다. 명절도 없고 제사도 없다.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도 다 없어졌다. 명절이나 제삿날 또는 부모님 생일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다 모여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미풍양속도 다 없어졌다. 뇌물 공화국에 권력 왕국으로 전락했다. 뇌물 안 주면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고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한다.

일제 청산하려면 인권유린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일제라면 치를 떠는 가장 큰 이유가 인권유린이 수시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법은 멀고 몽둥이는 가까웠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아예 인권이란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민족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모른다. 마침내 전 세계가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조용한 외교란 것을 60년이나 지속했지만,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여 마침내 전 세계가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일제시대라고 하지만, 이렇게 전 국민을 감시 감독하면서 20만 명을 상시로 수용소에 가둬 둔 적이 없다. 1만 명을 그렇게 한 적도 없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만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되놈과 한통속이 되어 보이는 족족 잡아들여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고문을 자행한 적이 없다. 일제시대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조선인을 일제도 그렇게 붙잡아 고문을 자행한 적이 없다.

김일성 부자는 일제를 충실히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독재에 연산군의 폭정을 접목하여 이를 심화 발전시켰다.

[독립 유공자와 친일파]

사진=구글이미지 캡쳐
사진=구글이미지 캡쳐

독립 유공자의 자손은 못 살고 친일파 후손은 잘 산다. 이것은 일제 청산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거의 수학의 공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연 그런가.

대부분의 친일파는 이미 지적한 대로 그들의 생명 줄인 토지를 헐값으로 빼앗겨 가난뱅이로 전락했다. 그 대신 절대다수의 일제시대에 핍박받았던 사람들에게 그 토지를 주어서 그들이 아쉬운 대로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 그다음에 잘 사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달렸다.

전에는 양반으로 지주 계급이 아니면 자식에게 교육을 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농지개혁 이후 농민들도 웬만하면 자식을 초등학교는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때맞춰 1960년대 이후에는 공장이 줄줄이 들어섰기 때문에 너도나도 취직할 수 있었다.

임금 착취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데,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이후 늘 상위 20%의 소득이 하위 20%의 소득보다 5배에서 7배 사이였기 때문에 그런 가설은 억측일 뿐이다. 선진국 수준에 조금 못 미치는 소득분배였다. 지금도 국민 소득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임금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소득이지만, 평균 임금은 83%나 된다.

2003년 11월, 미국의 통계를 인용하여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시간당 노동비용이 9.16달러로 우리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나 되는 싱가포르의 7.27달러보다 오히려 더 높다. 우리보다 1.5배 잘 사는 대만은 5.41 달러. 싱가포르나 대만에 비해서 고정급, 상여금, 복지후생비 등을 포함한 시간당 노동비용으로 우리 기업은 국민 소득을 감안하면, 두 배나 지불한다는 말이다.

물론 친일파 후손은 토지는 빼앗겼지만, 유리하긴 했다. 그들은 대체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누군가. 대부분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일제 시대처럼 나쁜 짓으로 그런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대부분 나라와 사회와 회사에 크게 기여했다.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았다.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 다 같이 잘 살게 되었다. 또한 이들만 새로운 지배층으로 올라선 게 아니다. 90%를 차지했던 일반 서민들의 자식들 중에 새로이 농토를 지급 받은 농민의 자식들 중에 출세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 역대 대통령과 재벌이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면 하나 같이 아전이나 순사 노릇도 못할 사람들이 우르르 대통령이 되고 재벌이 되었다.

독립 유공자 후손은 못 살고 친일파 후손이 잘 산다는 이론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배운 사람들인데, 이들 자신이 바로 친일파 후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양반 지주의 후손이 아니었으면 1950년대만 해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고 양반 지주는 대개 친일파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독립 유공자 자녀들은 국가에서 나름대로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지금도 입증만 되면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 못지않게 국가에 공헌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6·25 참전 용사와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너무도 소홀했다. 월남전 용사들에겐 오히려 여기저기서 배웠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들에게 불명예를 안겨 준다.

북한은 독립 유공자라는 것은 오직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앞잡이로 들어선 50여 명뿐이다. 이들이 백두산 줄기이다. 처음에는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을 우대했지만, 권력을 공고히 한 후에는 결국 다 제거해 버렸다. 물론 그 자손도 숙청했다. 한국과 전혀 다른 게 있으니, 그게 바로 6·25 참전 용사의 유자녀들이다. 이들은 낙동강 줄기로 분류하여 교육이든 직업이든 특별대우를 받는다. 이들은 이에 감격하여 친위대로서 김일성 부자를 결사옹위한다.

한국에서는 독립 유공자나 그 유가족 또는 전사자의 유가족이나 상이군인과 그 자녀에 비해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형평성에 심히 어긋난다. 그것은 바로 광주사태에서 희생된 시민과 민주화 운동가들이다. 이들은 정말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정치권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판 백두산 줄기요, 한국판 낙동강 줄기인 셈이다.

[나오며]

우리 문화는 조선 중기 이후 과거 지향적이고 감정적인 명분 문화로 바뀌었다. 그래서 과거의 어느 시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흑백으로 선명하게 가른다. 이 흑백론이라는 정통성의 잣대로 모든 사람을 재단한다. '내 편'이면 아흔아홉 번 친일하고 딱 한 번 독립 운동하고 해방 후에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영원히 위대한 사람으로 떠받들어야 하고, '네 편'이면 아흔 아홉 번 독립 운동하고 딱 한 번 친일하고 해방 후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영원히 악인으로 낙인찍힌다.

친일파보다 일본인이 수십 배 나쁘지만, 일본인을 어떻게 하여 이길 것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누가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충실함으로써 일본을 조금씩 조금씩 따라가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친일파의 행적을 쫓는 데에 일생을 바친다. 일본을 욕하는 데에 평생을 바친다.

사진=구글이미지 캡쳐
사진=구글이미지 캡쳐

북한의 선전선동이나 한국 지식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한국이 일제를 잘 청산하고 북한이 일제를 잘 계승했다. 한국은 이승만의 농지개혁과 박정희의 산업화로 일본에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게 되었다. 후에 민주화도 달성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갔지만, 민주화 이후에 온통 과거에 얽매이고 북한을 저들이 선전선동하는 대로 너그럽게 봐 주는 바람에 거짓이 진실을 가리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여 대일 무역적자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보다 산업화를 한 20년 먼저 한 덕분에 지금도 산유국과 일본 외에는 중국을 위시한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흑자를 보고 있다. 이제 그 한계에 다다랐다. 우리가 과거 타령을 하면서 10여 년 동안 일인당 국민소득 1만 불에서 맴돌고 있는 사이에 중국이 연평균 8%~9%의 성장으로 과학기술 수준에서 이제 불과 우리에게 2년 내지 3년밖에 안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중국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기만적 농지개혁과 파멸적 협동농장화 그리고 김정일의 선군정치로 일제시대보다 훨씬 못한 나라로 전락했다. 오로지 김씨 가문만 존재할 따름이다. 김씨 부자는 일제시대 천황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갔다.

이제 김정일은 한국 국민들을 친김정일파와 반김정일파로 나눠 싸우게 만드는 민족분열책에 지나지 않는 것을 민족공조란 말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전 국민을 현혹시켜 머잖아 한국을 통째로 접수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의 통일전선에 속아서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할 동족상잔을 또 한 번 겪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전혀 경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10년 불황으로 허덕이는 일본만 좋아지게 생겼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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