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스파이 세계에선 불가능이란 없다. 국익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도덕도, 사랑도, 이념도 거칠 게 없다. 동서고금 모든 정보기관의 가장 강력한 수단은 사랑이었다. 인간을 조종하고 협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섹스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섹스를 스파이 활동에 가장 완벽하게 활용한 정보기관은 동독의 슈타지(STASI)였다. 1960년부터 1990년까지 80여 명의 로미오(Romeo)가 서독에 침투했다. 헬무트 콜 수상 비서, 바이체커 대통령실 행정관, 미국 대사관 통역사, 연방정보국(BND) 부국장, 유럽경제공동체(EEC) 행정 보좌관, 외무성 공무원 등 최소 40명 이상의 줄리엣(Juliet)이 포섭됐다. 줄리엣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였다. 슈타지는 ‘줄리엣 한 명이 남자 외교관 10명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통독 직후 미국의 시사 주간지 ‘U.S.뉴스&월드리포트’는 슈타지를 냉전시대 가장 효율적 정보기관으로 선정했다.

슈타지의 타깃(target)은 서독의 기업·정부·의회·군대·정보기관에서 비밀정보에 접근 가능한 독신여성이었다. 주변 친구가 전부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지켜본 여성, 인생에 남자 한 명 없이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 이상적인 줄리엣이었다. 슈타지는 줄리엣의 상대역으로, 25세에서 35세 사이 지적이며 신사적 매너의 로미오를 선발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좋아하는 음식, 자주 가는 장소, 학창시절 짝사랑한 선생까지 연구했다. 버스정류장·식당·영화관·책방, 파티 모임 등에서 우연을 가장해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접근했다. 순진한 시골처녀가 카사노바에게 걸려들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니 백전백승(百戰百勝)이었다.

‘로미오의 왕(King of the Romeos)’이라 불리는 볼프(Markus Wolf)는 1997년 자서전 <얼굴 없는 남자>(Man Without A Face)에서 성공한 로미오의 특성으로 호감 가는 인상(Was likeable), 분위기 메이커(Knew how to make himself the center of attention), 경청하는 태도(Listened well)를 꼽았다. 단계별 포섭 테크닉도 소개했다. "당신이 먼저 그녀에게 가지 말고, 그녀가 먼저 당신을 찾도록 만들어라. 파티 참석자들에게 술과 음료를 사고, 스스럼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라. 그녀는 어느새 당신 곁에 와 있을 거다. 첫 만남 후 관계가 깊어지면 프러포즈를 하고, 스파이라고 당신의 신분을 당당히 털어 놓아라. 단, 이때도 캐나다나 덴마크 같은 우방국 스파이로 신분을 위장해라. 마지막 단계로, 당신과 헤어지기 싫은데 실적이 부진해서 본국으로 소환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라. 이제 당신은 그녀가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해 줄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눈 하나 깜짝 않고 115명이 탑승한 민간 항공기를 폭파했다. 백주대낮 세계인이 지켜보는 외국 공항에서 최고 집권자의 형을 살해했다. 그러면서도 77년 역사에서 목표와 전략이 단 한 차례도 바뀐 적 없는 전문가 집단이 있다. 바로 북한의 정보기관이다. 이런 기관이 슈타지의 로미오 공작 같은 섹스 공작을 못할 이유가 없다. 2018년, 미인계로 미국 보수정치권에 접근을 시도한 러시아 스파이가 검거됐다.

2022년 초, 역시 미인계로 영국 의회에 접근을 시도한 중국의 스파이 활동이 탐지됐다. 러시아가 하고 중국이 하는 섹스 공작을 북한 정보기관이라고 자제할 이유가 없다. 정치인·종교인·언론인·사업가·시민단체 활동가·교육계·문화·군인·공무원·대학생, 심지어 정보기관원까지 북한의 섹스 공작에서 완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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