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상해의 이승만

상해체류 6개월은 좌절의 시간
임시정부 분열의 핵 ‘이동휘’
서북파와 기호파의 지역갈등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이념갈등
무장투쟁과 외교투쟁 노선갈등
자금책 현순도 이승만에 도전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 고별교서

류석춘
류석춘

1920년 6월 29일 오전 8시 호놀룰루 부두에 도착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하와이 교민들은 성대히 환영했다. 그러나 상해로 가야 하는 이승만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일본이 독립을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그냥 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은 이승만에게 여권도 발급해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배경으로 일본이 이승만에게 어떤 일을 벌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일본 정부는 이승만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본토 서해안에서 상해로 가는 배편을 이승만은 절대 이용할 수 없었다. 본토에서 출발하는 배편은 모두 일본을 경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놀룰루에서는 상해 직항 배편이 있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온 이유다. 이승만은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밀항을 준비했다.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 기념사진. 두 번째 줄 중앙의 점선 동그라미 속이 대통령 이승만이다. 이 사진에는 상해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당시 경무국장 김구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 줄 왼쪽 동그라미). 민족주의자 김구는 임시정부를 공산주의자로부터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이 상해에 체류할 당시 임시정부 요원의 숫자는 대략 70명 내외였다.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 기념사진. 두 번째 줄 중앙의 점선 동그라미 속이 대통령 이승만이다. 이 사진에는 상해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당시 경무국장 김구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 줄 왼쪽 동그라미). 민족주의자 김구는 임시정부를 공산주의자로부터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이 상해에 체류할 당시 임시정부 요원의 숫자는 대략 70명 내외였다.

상해에 있는 이승만 지지자들 예컨대 안현경과 장붕(長鵬) 등은 이승만이 상해로 오는 경우 부딪힐 문제를 미리 알려주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은 모두 숟가락을 빨며, 부자 나라 미국 교포의 독립성금을 걷은 대통령 이승만이 엄청난 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레닌으로부터 받은 거액의 독립자금이 대부분 공산주의 활동자금으로 넘어가면서 임시정부는 쥐꼬리만큼도 받지 못한 상황이 이승만을 더욱 압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상해로 출발했다. 장의사 사업으로 돈을 번 이승만의 친구 보스윅 (W Borthwick) 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1920년 11월 16일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하는 중국인 사체를 담은 관을 창고에 가득 실은 웨스트 히카 (West Hika) 호가 호놀룰루 항구를 떠났다. 보스윅의 부탁을 받은 선원 하나가 이승만과 임병직 두 사람을 관이 가득한 배 선창에 숨겨 주었다. 다음날 배가 영해로 진출하고 나서야 이승만과 임병직은 갑판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들을 뒤늦게 발견한 선장은 다행히 두 사람의 밀항을 눈감아 주었다.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과 임병직은 선장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선해 몸을 숨기고 지지자 장붕과 연락을 취했다. 몇 군데 호텔을 전전한 이승만은 프랑스 조계지 내의 미국인 선교사 크로푸트 (J.W. Crofoot) 목사의 집을 거처로 삼아 1920년 12월 12일부터 1921년 5월 28일 상해를 떠날 때까지 계속 신세를 졌다. 이승만은 12월 13일 역시 프랑스 조계지 내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해 각료와 직원을 처음으로 접견했다. 12월 28일 상해 교민단의 환영회 참석이 공개적 활동의 시작이었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11일 출범하면서 상해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서 효과적인 활동을 전개할 지도부가 될 것이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착시효과일 뿐이었다. 내부에서는 엄청난 갈등과 반목이 도사리고 있었다. 서북지방 출신과 기호지방 출신의 반목은 뿌리가 깊었다. 무장투쟁과 외교투쟁의 노선대립도 심각했다. 공산·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이념 갈등도 시한폭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갈등의 밑바닥에는 독립이라는 가시밭 길을 가는 명분과 그로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망명정부의 근본적 한계였다.

상해에 간 대통령 이승만은 이런 갈등의 한복판에 스스로를 내던진 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으로 주재한 1921년 1월 5일 국무회의부터 문제가 심각했다. 이동휘가 또다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문제 삼아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이어서 개최한 몇 차례 국무회의도 엉망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1920년 12월 28일 상해 교민단이 베푼 성대한 환영회 모습. 배경에 태극기가 보이고 그 위에 ‘대통령 리승만’이라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화환을 목에 건 이승만은 중앙에 위치했다. 이승만 왼쪽으로 이동휘, 이시영, 이동녕, 손정도 그리고 이승만 오른쪽으로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이다. 오른쪽 마지막은 미상.

바로 이어진 국무회의에서 이동휘는 대통령이 상해에 없어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 국무총리에게 결재권을 주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론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또 다음 회의에서 이동휘는 대통령제를 버리고 소비에트식 집단지도체제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이승만은 단호히 거부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급기야 이승만으로 하여금 이동휘에게 모스크바 자금문제까지도 추궁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동휘는 2021년 1월 26일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고 상해를 떠났다.

이 사태를 겪으며 안창호는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상해로 오게 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표했다. 지리멸렬한 국무회의에 치인 이승만은 2월 28일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을 소집해 ‘연두교서’를 발표하고, 행정쇄신과 예산절약 그리고 외교강화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큰 한 방을 기대하는 상해의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대응이었다. 정국을 타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4월 18일 국무회의에서 김규식은 이승만에게 독한 발언을 했다. "무슨 정략이 있어야 시국을 정돈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시일만 낭비할 필요가 없어요." 이승만이 물러나야 한다는 발언이었지만, 동시에 이승만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기도 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김규식도 사임했다.

이승만은 내각을 다시 짜야 했다. 안창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거절당했다. 법무를 맡은 신규식이 국무총리를 겸임토록 하고, 안창호가 맡던 노동은 재무를 맡은 이시영이 겸임토록 했다. 상해를 떠난 국방 노백린을 해임하고 협성회를 이끈 윤기섭을 임명했다. 김규식이 맡았던 학무에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김만겸을 임명해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견제하려 했지만 민족주의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슬슬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상해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즈음 미국을 떠나며 김규식의 후임으로 워싱턴 구미위원부 책임을 맡긴 현순마저 이승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가 보내주는 재미동포의 독립자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돈을 보내는 책임을 맡은 현순은 그 때문에 점점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했다.

1921년 4월 9일, 중국인 옷을 입은 상해의 이승만.
1921년 4월 9일, 중국인 옷을 입은 상해의 이승만.

급기야 현순은 1921년 3월 9일 대통령 이승만과 의논도 없이 자신이 스스로 주미공사가 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상해로 보냈다. 당황한 이승만은 서재필과 의논해 4월 18일 현순을 해임했다.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서재필을 임명했다. 상해의 이승만은 골치가 아팠다.

마침내 이승만은 4월 16일 저녁 회식 자리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이동녕이 발끈했다. "미국으로 가도 이곳 사람들이 당신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오정환, 2022, 『세 번의 혁명과 이승만』 pp. 224-5). 5월 17일 이승만은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을 이유로 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고별교서’를 임시의정원으로 보내고 잠적했다.

1921년 5월 28일 이승만은 콜럼비아 (Comumbia) 호에 승선해 상해를 떠났다.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 이승만은 하선해 기차로 바기오 (Baguio) 를 둘러보고 하와이로 가는 배 그레나이트 스테이트 (Granite State) 로 갈아탔다. 1921년 6월 29일 오전 8시 이승만이 탄 배가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자 하와이 교민들은 변함없이 이승만을 환영했다. 그러나 상해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되돌아보는 이승만의 마음은 무거웠다. 1차 세계대전 뒤처리가 만들어 준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3·1운동을 일으킨 민족의 염원이 결국 이렇게 사그라지는가 하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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