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먹는 하마

 

어서, 하마를 치워야 할텐데
저 하마를 밖으로 끌어내야 할텐데

늦장마 끝나고 서늘한 바람 분다
커튼을 갈아끼우다 문득 떠올린
하마 사냥

장롱 속, 창문도 없는 독방에
켜켜로 쌓아놓은 이부자리, 베개들
햇살 대신 물먹는 하마 한 마리 들여놓고
짐짓, 눈 감아버렸다
하루에 두어 번, 하마의 안부를 확인할 뿐
여름 늦장마 견디고 있었다

누군가의 속을 열어보면 저럴까
보이지 않게 젖어 있던 속내
눈물로 차올라 있구나
소리 없이 일가를 이루던 곰팡이
지독한 슬픔의 감옥이었구나

제 몸 안에 늪을 가두고
물소리를 듣고 있던 하마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웃고 있구나. 그래도…

강문숙(1955~ )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마철 장롱 안처럼 어둡고 습습한 ‘슬픔의 감옥’ 같은 게 있지 않을까. 마음 한구석이 젖어 곰팡이가 피고, 그래서 물먹는 하마 한 마리쯤 키우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물 먹은 하마는 스스로 물기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어둡고 습습한 ‘지독한 슬픔의 감옥’에서 흘린 눈물은 ‘몸 안에 늪을’ 만들었지만 그만 자기연민에 빠져버려 하마는 물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하마는 노상 물속에 있으면 안 된다. 가끔씩 물 밖으로 나와서 놀거나 햇빛을 쬐고 풀도 뜯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물을 먹을 수 있다. ‘지독한 슬픔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 짐짓 애써 ‘웃고 있는’ 물먹는 하마의 의지가 눈물겹다.

내 마음속 하마에게 말하고 싶다. 억지로 명랑한 표정 지으려 할 것 없다고. 억지로 ‘지독한 슬픔의 감옥’을 벗어나려 할 것 없다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고. 마음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자신도 모르게 물 밖으로 나와 싱싱한 풀을 뜯는 하마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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