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남한보다 먼저 단독 정부 세웠다
김일성, 남한보다 먼저 단독 정부 세웠다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9.0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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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혈통 뿌리 김일성 바로알기 [11]
평양에서 열린 광복 3주년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이 연설하고 있다. 뒤에 그려진 인물은 스탈린과 김일성
평양에서 열린 광복 3주년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이 연설하고 있다. 뒤에 그려진 인물은 스탈린과 김일성

9월 9일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은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인 10월 10일과 함께 북한의 사회주의 5대 명절 중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1946년 2월 8일에 이미 수립되었다.

1946년 2월 8일 ‘북부 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각 행정국, 각 도 ‧ 시 ‧ 군 인민위원회 확대협의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북조선의 중앙행정기관으로 ‘북조선 임시위원회’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다음 날인 2월 9일에 ‘북조선 인민의 의사를 대표할 위원 선거’에 들어가 김일성을 포함 23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 확대협의회가 열린 첫날인 2월 8일에 김일성은 조직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오늘 북조선에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완전히 성숙된 과업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통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이런 기관으로 되어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할 목적으로 북조선의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 단체 지도자들은 발기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소련군 사령관도 발기 위원회의 의견을 지지하였습니다.”

◇1946년 2월 8일, 이미 북조선 중앙주권기관 설립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 NARA / 박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 NARA / 박도

이 말은 통일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단순한 중앙 행정 기관 역할뿐만 아니라 주권 기관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즉 북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내세운 것이다. 이 위원회는 다음해인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되고 그 다음해인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다.

당시 남한 인사로서 제일 먼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언급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이에 대해 처음 말문을 연 것은 1946년 6월 3일의 이른바 ‘정읍 발언’이다. 이 정읍 발언 때문에 북한과 한국 사학계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민중사학계는 지금까지도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의 원흉이 이승만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민중사학계 학자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 인식으로 대부분의 중고교 검인정 역사 교과서를 집필해왔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있기 4개월 전에 북한에는 이미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 단독 정부 수립 의지 천명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보다 6개월이 앞선다.

1945년 12월 17일부터 열린 ‘조선 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위원회’에서 ‘진정한 인민 정부 수립을 위하여’라는 김일성의 보고도 있다.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에 관한 규정’ 제3조를 보면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있어서의 중앙 행정 주권 기관으로서 북조선의 인민 사회 단체 국가 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 발표할 권한을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중앙 행정 기관으로서 법령을 제정하고 발표한다는 것은 바로 정부를 세운다는 말이다.

◇김일성 단독정부 천명, 이승만 정읍발언보다 6개월 앞서

▲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 간부 일동(앞열 중앙 김일성)
▲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 간부 일동(앞열 중앙 김일성)

북한은 남한보다 2년 6개월 이상 앞서 실질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반면 남한은 1948년 8월 14일까지 미군정 아래 남아 있었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일자를 대한민국보다 25일 늦은 1948년 9월 9일로 잡은 속셈은 따로 있었다. 남한이 먼저 단독 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북한은 어쩔 수 없이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즉 단독 정부 수립, 분단 책임을 이승만과 대한민국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처음 열린 것이 1946년 3월 20일이다. 그런데 소련의 꼭두각시였던 김일성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되기 전인 2월 8일에 서둘러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권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북한 단독 정부 수립이었고 여기서 한반도의 분단이 시작되었다. 왜 김일성은 이런 반민족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 의문의 실마리는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93년에 와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한소 수교 이후,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독 정권을 수립하도록 지시한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암호 지령문’이 뒤늦게 공개된 것이다. 이 암호 지령문의 발신자는 소련군 최고 사령관 스탈린 및 안토노프 총참모장이고 수신자는 극동 전선 총사령관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최초로 내린 지시 문서였던 이 전문에는 북한 점령에 대한 7개 항목의 지시 사항이 열거되어 있다. 그 제2항목에 “북조선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 조직의 광범위한 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독 정부 수립 지시였다. 즉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한반도에서도 관철시키라는 지시인 것이다.

◇북한에 단독정부 지시한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 암호지령문

이 지시에 따라 1945년 10월 10일에서 13일까지 평양에서는 ‘조선 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이 대회에서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했고 12월 17일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부터는 스탈린의 지령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북조선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쓰면서 김일성을 책임 비서로 등장시킨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북조선 공산당의 첫째가는 과업은 “북조선을 통일된 민주주의적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강력한 민주 기지로 전변시키는 일”이라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민주 기지 구축’은 ‘공산 기지 구축’이란 뜻이다. 즉 ‘북한을 민주 기지로 삼는다’라는 것은 ‘북한을 한반도의 공산 통일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는다’라는 뜻이다.

쉬킨 보고서 (다음은 졸고,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과정과 정치적 함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4집 2호, 2013.2, 104~105쪽 내용을 전재한 것임. )
쉬킨 보고서 (다음은 졸고,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과정과 정치적 함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4집 2호, 2013.2, 104~105쪽 내용을 전재한 것임. )

◇남한 386그룹이 이어받은 김일성의 민주기지론

그것은 우선 한반도를 통일보다는 분단된 상태로 그냥 두고 우선 북한을 먼저 튼튼한 공산 기지 교두보로 만든 다음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전략이다. 지금 현실정치권에 이미 진입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386그룹의 학생 운동 시절 이념이 바로 이 ‘민주기지론’이었다. 이미 민주 기지로 만들어져 있는 북한을 기지로 삼아 남한을 해방시킨다는 논리였다.

해방 전후사에서 스탈린과 그의 꼭두각시 김일성은 ‘선 분단 후 남한 병탄 통일’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단독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평양으로 왔을 때 이런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안타깝게도 김구 선생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이런 비밀 전략을 알아차릴 만한 안목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20일에 스탈린이 암호 지령문으로 ‘북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군과 김일성에게 지시했다는 것은 소련 비밀 문서 해제를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국내 일반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또 국내 역사학계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민중사학계 학자들은 소련 외교 문서로 드러난 스탈린의 북한 단독 정부 수립 지령, 김일성과 스탈린의 6·25전쟁 도발 등을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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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김일성, 남한보다먼저단독정부를세웠다

Kim Il-sung established an independent government before South Korea.

YoungJae Choe Journalist

September 9 is the day to celebrate the establishment of the North Korean regime in 1948. This day is considered one of the five socialist holidays of North Korea along with the 10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Joseon Labor Party.

The North Korean regime was already established on February 8, 1946. On February 8, 1946, the leaders of the social organizations of each party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each administrative agency, the council for the expansion of provincial, city, and county people's committees were held in Pyongyang.

The meeting decided to establish a "temporary committee for North Korea" as the central administrative agency of North Korea. On February 9, the next day, the committee members were elected to represent the doctors of the North Korean people and elected 23 members including Kim Il-sung.

On February 8, the first day of this enlargement meeting, Kim Il-sung made the following speech on the organization issue. "Today, organizing a central sovereign authority in North Korea is a fully mature task. We admit that until the establishment of a unified government in our country,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should become such an institution.

For the purpose of organizing central sovereign institutions, democratic political party leaders in North Korea organized an erection committee. The Commander of the Soviet Army also supported the opinion of the erection committee. "This means that until the unification government was established,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was not only a central administrative agency but also a sovereign authority.

In other words, it clearly stated the intention to establish a sovereign government in North Korea. This committee became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in the next year, February 1947, and on the 9th of September, 1948, the sign changed to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t that time, the first person to mention South Korean sole proponent was Lee Seung-man. It was the so-called 'Jeong-eup remarks' of June 3, 1946, when he first spoke about this. The People's University of Education, which accounts for more than 70 percent of North Korea and the Korean private sector due to Lee Jeong-eup’s remarks, has accused the government of establishing a separate government and division as Lee Seung-man. And these scholars of folk scholars have written most of the history textbooks of middle and high school scholarship based on facts not based on facts.

However, four months before Lee Seun-man 's "Jeong-eup Remarks," North Korea already had a sovereign government. Kim Il-sung's willingness to form a sole government in North Korea was six months ahead of Lee Seung-man's 'Jeong-eup remarks'.

There was also a report about Kim Il-sung, "For the Establishment of a True People's Government," at the Third Expansion Committee of the North Korean Branch of the Communist Party of Korea held on December 17, 1945.

Article 3 of the "Provisions on the composition of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stipulates that "the People's Committee shall have the authority to announce the provisional act to be executed by the national organ of the people society group as a central administrative sovereign body in North Korea" is. As a central administrative agency, it is the government that establishes and publishes laws and ordinances.

North Korea has established a substantial government more than two years and six months ahead of South Korea. South Korea remained under the US military rule until August 14, 1948. North Korea had set a date for the establishment of their government on September 9, 1948, 25 days later than the Republic of Korea.

Because South Korea first established a sovereign government, it was in order to make an excuse that North Korea had inevitably established a sovereign government. In other words, it was to overthrow Lee Seung-man and the Republic of Korea in establishing and separating the sole government.

It was on March 20, 1946, that the Smile Joint Committee was held for the first time. However, Kim Il-sung, a tool of the Soviet Union, hastily created a de facto regime called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February 8 was the establishment of a sovereign government in the North, where the division of the peninsula began. Why was Kim Il-sung forced to do such an anti-national act?

The clue of this question came to a close in about half a century in 1993 and began to be solved. After the diplomatic tie-up, it was later revealed that the Stalin cipher directive of September 20, 1945, which ordered North Korea to establish a sole bourgeois democratic regime. The ciphers were sent by Soviet Army chiefs Stalin and Antonov, and the recipient was the military commanding officer of the Far Eastern front line.

Stalin's first direct instruction to the Soviet Army, which Stalin poured into North Korea shortly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contains seven directions for North Korean occupation. The second item was "to establish a bourgeois democratic regime based on a broad coalition of anti-Japanese democratic parties and organizations in North Korea". It was a bourgeois democratic independent government order. In other words, it is an indication that Stalin's "national socialism" line should be implemented on the Korean peninsula.

In accordance with these orders, on the 10th and 13th of October, 1945, in Pyongyang, secretaries and enthusiasts were held in secret. In this conference, the 'Joseon Communist Party North Korea Sub-country' was established, and on Dec. 17, Stalin's directive began to be formulated from the 'Third Extension Committee of the North Korean Subcommittee.'

From that time on, Stalin used Kim Il-sung as a responsible secretary, writing his nickname "North Korean Communist Party." Kim Il-sung spoke at this meeting that the first task of the Communist Party of North Korea was "to transform North Korea into a strong democratic base for the unified democratic independent state".

The communist 'democracy' is like 'communism'. Therefore, "building a democratic base" means "building a communist base". In other words, 'making North Korea a democratic base' means 'making North Korea a forward base for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First, the Korean peninsula should be divided rather than unified, and then North Korea should be made a strong base for communist bases and then communalized. It is this "democracy theory" that was the ideology of the student movement of the 386 groups that have already entered the real political world. It was the logic of liberating South Korea based on North Korea, which had already been established as a democratic base.

Stalin and his puppet Kim Il-sung had a strategy of unification of South Korea after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However, Kim Il-sung completely hid this fact when he came to Pyongyang in opposition to establishing South Korea alone and insisting on inter-Korean negotiations. Unfortunately, Kim Koo was not aware of the secret strategy of Stalin and Kim Il-sung.

It was revealed on September 20, 1945, that Stalin ordered the Soviet army and Kim Il-sung, who pitched North Korea to "establish a sole government of North Korea alone" as a cipher text, by releasing a Soviet secret document.

However, this fact is hardly known to the general public in Korea. In addition, scholars of scholarly scholars who occupy more than 70% of domestic historical scholarship have rejected Stalin's North Korean sovereignty and Kim Il-sung and Stalin's war against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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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国より先に単独政府を樹立した金日成

崔寧宰 記者

1948年9月9日は、北朝鮮政権の樹立を記念する日だ。同時にこの日は、朝鮮労働党創建の日である10月10日と共に北朝鮮の社会主義5大名節のうちの一つである。実は北朝鮮政権は、1946年2月8日にすでに樹立されている。この日、平壌で「北部朝鮮各政党社会団体指導者、各行政局、各道・市・郡人民委員会拡大協議会」が開催され、北朝鮮の中央行政機関となる「北朝鮮臨時委員会」を樹立することが、この場で決議されたのである。翌2月9日には「北朝鮮人民の意思を代表する委員選挙」を行い、金日成を含めて23名の委員を選出した。

この拡大協議会の初日である2月8日に、金日成は組織問題について次のような演説を行った。「今日、北朝鮮に中央主権機関を組織することは、完全に機が熟している課業です。我々は、我が国に統一政府が樹立されるまで、北朝鮮臨時人民委員会がそうした役割を果たす機関にならねばならないと認識しています。中央主権機関を組織するという目的で、北朝鮮の民主主義的政党社会団体指導者たちは発起委員会を組織しました。

ソ連軍司令官も発起委員会の議決を支持しました」。この言葉は、統一政府が樹立するまで、北朝鮮臨時委員会が単に中央行政機関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だけでなく、主権機関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ことを明らかにしたものだ。つまり、北韓の単独政府を樹立するという趣旨を明らかにしたものである。この委員会は翌年、1947年2月に「北朝鮮人民委員会」となり、その翌年である1948年9月9日に「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内閣という看板が掲げられることになる。

当時、南側の人物で一番最初に南韓単独政府樹立について言及したのは、李承晩(イ・スンマン)であった。李承晩がこの件について最初に口にしたのは、1946年6月3日、いわゆる「井邑(ジョンウプ)発言」であった。この「井邑発言」のために、北朝鮮と韓国史学会の70%以上を占める民衆史学界は、現在にいたるまでも単独政府樹立と南北分断の元凶は李承晩にあると非難している。そして、これら民衆史学界の学者たちの事実とはかけ離れた歴史認識により、中学・高校の歴史教科書の大部分が編纂されてきた。

しかし、李承晩の「井邑発言」の4ヶ月前に、北朝鮮にはすでに単独政府が樹立していた。金日成が北朝鮮単独政府樹立の意向を明らかにしたのは、李承晩の「井邑発言」の6ヶ月前のことだった。1945年12月17日から開催された「朝鮮共産党北朝鮮分局第3次拡大委員会」に、金日成の「真実なる人民政府樹立のために」という報告がある。

「臨時人民委員会構成に関する規定」第3条をみると、「北朝鮮人民委員会は北朝鮮の中央行政主権機関として、北朝鮮の人民社会団体、国家機関が実行する臨時法令を制定・発表する権利を持つ」と規定している。中央行政機関として法令を制定・発表するというのは、まさに政府の樹立を意味する

 

北朝鮮は、南韓より2年6ヶ月以上早く、実質的な政府を樹立した。反面、南韓は1948年8月14日まで米軍政の統治下にあった。北朝鮮が、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政府樹立の日を、大韓民国より25日遅い1948年9月9日にしたのには理由があった。南韓が先に単独政府を樹立したために、北朝鮮はやむを得ず単独政府を樹立したと弁明するためだ。つまり、単独政府樹立と南北分断の責任を李承晩と大韓民国に押し付けるためであった。

米ソ共同委員会が初めて開催されたのは、1946年3月20日のことだ。ところがソ連の傀儡であった金日成は、米ソ共同委員会構成前の2月8日に、急に「北朝鮮臨時人民委員会」という事実上の政権を樹立した。それはまさしく北朝鮮単独政府の樹立であり、ここから韓半島の分断が始まるのである。なぜ金日成はこうした反民族的行為を犯さざるを得なかったのか。

この疑問に対する糸口は、その時からほぼ半世紀が過ぎた1993年になって解け始めた。韓ソ修交以後、北朝鮮にブルジョア民主主義の単独政権を樹立するよう指示した「1945年9月20日付けのスターリン暗号司令文」が、遅ればせながら公開されたのだ。この暗号司令文の発信者はソ連軍最高司令官スターリンとアントノフ総参謀長で、受信者は極東前線総司令官沿海州軍官区軍事評議会であった。

第2次世界大戦直後に、スターリンが北朝鮮に進駐したソ連軍に対して最初に送ったこの指示文書には、北朝鮮占領に対する7項の指示事項が列挙されていた。その第2項目目に、「北朝鮮に反日的民主主義的政党・組織の広範囲な連合を基礎とした、ブルジョア民主主義政権を確立」とある。これはブルジョア民主主義単独政府の樹立を指示するものであった。つまり、スターリンの「一国社会主義」路線を韓半島でも貫こうとする指示内容だ。

この指示に従って、1945年10月10日から13日まで、平壌で「朝鮮共産党西北5道党責任者、及び熱誠者大会」が秘密裏に開催される。この大会で「朝鮮共産党北朝鮮分局」を設置し、12月17日の「北朝鮮分局第3次拡大執行委員会」からはスターリンの司令が具体化し始めた。この時からスターリンは、「北朝鮮共産党」という党名を使用し、金日成を責任書記に任命した。

共産主義者がいう「民主主義」は、「共産主義」と同義だ。従って「民主基地構築」は「共産基地構築」という意味となり、「北朝鮮を民主基地とする」は、「北朝鮮を韓半島の共産統一のための前線基地とする」という意味となる。その内容とは、いったんは韓半島を「統一」より「分断」状態で維持し、まず北朝鮮を共産基地の橋頭堡として確立した後に南韓を共産化しようという戦略だ。現在、現実的に政界で多数を占めている386グループが学生運動時代をしていた時の理念が、まさにこの「民主基地論」であった。すでに民主基地となっている北朝鮮を基地として南韓を解放させるという論理である。

       

解放前後の歴史において、スターリンと傀儡・金日成は、「分断後の南韓併呑統一」戦略を立てていた。しかし金日成は、金九先生が大韓民国単独樹立に反対し、南北協議を主張する立場で平壌を訪ねた時、この事実を徹底して隠した。残念ながら金九先生には、スターリンと金日成のこうした秘密戦略を見抜くだけの眼目がなかった。

1945年9月20日、スターリンが、北朝鮮に進駐中のソ連軍と金日成に、暗号司令文で「北韓の単独政府樹立」を指示したのは、ソ連の秘密文書解除により事実である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しかしこうした事実を韓国の一般の国民たちはほぼ知らないでいる。また、韓国の歴史学界の70%以上を占める民衆史学界の学者たちは、ソ連の外交文書で明らかになった、スターリンの北朝鮮単独政府樹立司令や金日成とスターリンの6.25戦争挑発等の事実を完全に無視しているのが実状である。  

sopulg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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