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동북공정 맞설 강력무기 김부식 [삼국사기]
中동북공정 맞설 강력무기 김부식 [삼국사기]
  • 최성재 교육문화평론가
  • 승인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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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삼국사기』 제대로 읽기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 세 나라를 당당히 똑같은 황제국으로 기술함으로써 중국의 역대 정통왕조와 동급으로 다뤘다. 중국의 집요하고 음험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고구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으로 다뤄 1차적으로 북한을, 2차적으로 한국을 중국에 복속시키려는 뻔뻔한 수작인데, 이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역사 무기’가 바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이다. 나아가 미국과 벌이는 세계패권 경쟁에서 머잖아 중국이 그로기 상태에 빠질 게 뻔한데, 그때 만주를, 드넓은 고구려의 고토(故土)를 전광석화처럼 자유통일 대한민국에 편입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역사적 근거 또한 『삼국사기』이다.∥

편저자: 김부식(1145 고려 인종 23년) 번역: 이재호 (1997)

◇무령왕릉의 발굴과 삼국사기

백제 무령왕 50대 얼굴 공개
백제 무령왕 50대 얼굴 공개

1971년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다. 무덤을 통째로 파헤치기 전에는 무덤의 주인공에게 다가갈 수 없는 신라의 왕릉과는 달리 백제의 왕릉은 연도(羨道: 무덤의 주인공이 안치된 묘실로 통하는 길)가 있어서 그 입구만 발견하면, 그것을 통하여 곧바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 일확천금할 부장품을 털어갈 수 있기 때문에, 백제의 왕릉은 온전한 게 없었다. 조선 이전 고려시대에 이미 백제의 왕릉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적적으로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 5호와 6호에 인접해 있었지만, 그 입구가 1400년 이상 도굴꾼에게 머리카락 한 올 들키지 않았다가, 송산리 고분 6호의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삽날에 부딪히는 바람에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부장품 2906점 가운데 역사학자들을 가장 흥분시킨 것은 묘지석(墓地石)이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

놀랍게도 『삼국사기』에 적힌 그대로였다. <<삼국사기>>에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麻)라고 시호는 무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더군다나 무령왕 21년(서기 522년)에 중국 양나라 고조가 무령왕을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동쪽 나라들을 평안[安寧]하게 만드는 대장군)으로 삼는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무령왕릉 내부 공주 무령왕릉 내부 복원 모형. 중국에서는 무령왕릉과 남조
무령왕릉 내부 공주 무령왕릉 내부 복원 모형. 중국에서는 무령왕릉과 남조

아마 여기서 무령(武寧)이란 시호가 유래했을 것이다. ‘무(武)’는 ‘대장군’, ‘녕(寧)’은 ‘영동(寧東)’을 의미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무령왕은 재위 23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는데, 묘지석에도 정확히 계묘년 5월에 운명[붕도(崩到)]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삼국의 모든 왕 가운데 최초로 그 실제 여부도 의심스러웠던 평범한 어느 왕의 생몰연대가 정확히 입증되는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식민사학과 민족사학 양쪽에서 맹렬히 공격 받아 땅에 떨어졌던 『삼국사기』의 위상이 불사조처럼 훨훨 날아올라 당시 청와대의 태극기처럼 힘차게 휘날리게 되었다. 그 후 여러 유물과 유적을 통해 『삼국사기』의 객관성은 더욱 빛을 발했다.

◇누가 『삼국사기』를 폄하하는가

고려시대 문신 김부식과 [삼국사기]
고려시대 문신 김부식과 [삼국사기]

안타깝게도 아직껏 『삼국사기』라면,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신라 위주로 기술한 부끄러운 역사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요상한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고대사든 현대사든 자국의 역사 왜곡에 도가 튼 한국의 자학(自虐) 사학자들이 이에 앞장서 있는지라, 국사 교과서에도 하나같이 그렇게 나와 있다.

처음에는 일제시대(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한국의 식민지 숙명론을 퍼뜨려 한국인에게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심어 주기 위해 그랬지만, 후에는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사학자들이 식민사학에 그렇게 반대한다면서 그들과 사실상 똑같은 논리로 김부식 대신 그의 정적이었던 묘청을 부각시키고 신라 대신 고구려를 드높여 민족의 기상을 일으켜 세우려고 그랬다. 해방 후에는 이것 외에 북한의 주체사관과 이촌(二寸:형제)뻘인 민중사학이 이를 한껏 부추겼다. 내가 보기에, 신채호는 『삼국사기』를 읽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따 왔다. 『사기』는 중국 사서(史書)의 아버지다. 이전에도 『서경』과 공자의 『춘추』 등 중국에는 사서(史書)는 많았지만,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 5백 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진(秦)과 곧 그 뒤를 이은 한(漢)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선입견이 가득한 윤리적 잣대를 앞세우지 않고 학자적 이성과 양심으로 곧 선입견이 배제된 객관적 잣대로 일목요연하게 담은 『사기』야말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라운 본격 사서이다.

『사기』에는 본기(本紀)와 세가(世家)와 열전(列傳) 등이 있는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본기와 열전이다. 이 두 단어에서 기전체(紀傳體)란 말이 나왔다. 공자의 『춘추(春秋)』는 조선왕조실록처럼 연도별로 기록되어 있어서 편년체(編年體)라고 한다.

본기는 황제국의 역사인데, 『사기』에서는 중국의 통일왕국인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뿐 진나라도 나란히 본기로 다뤘다. 선악 가치관이나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을 떠나, 진나라가 통일왕국을 건설했으므로 그게 바로 정통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것이 《항우項羽본기》와 《고조[유방劉邦]본기》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신하였지만, 적대국이었던 초나라의 항왕(項王)도 똑같이 황제로 기술한 것이다.

◇신라본기, 백제본기, 고구려본기의 의미

『삼국사기』도 마찬가지다.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통일왕국인 신라에 있다. 그래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기록하지만, 김부식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순으로 기록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라고 당당히 기록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신라와 나란히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대등하게 <본기>라고 부름으로써 삼국을 모두 황제국으로 대우한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 중원의 패자(覇者)이자 두 황제국이었던 금나라와 송나라에게도 보냈을 것인데, 당당히 배달민족의 삼국을 황제국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 점은 『고려사』와 선명히 대조된다. 『고려사』는 조선 세종대의 작품인데, 고려의 왕은 제후로 보아 《세가(世家)》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김부식보다 훨씬 사대주의적이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런 식이라면 『삼국사기』는 일고(一考)의 가치 정도는 있지만 『고려사』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단 말인가.

세종이나 김부식이나 누구보다 민족적 자부심과 주체성이 강했던 사람이다. 세종은 국익을 위해서 사대주의 외교를 감내했지만, 국익과 사대주의가 상충할 때는 과감히 사대주의를 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명나라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여진을 토벌하여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국경을 넓힌 역사적 쾌거이다.

김부식도 역사를 왜곡한 게 아니라 당시에 구할 수 있는 국내외의 사서를 두루 살피고 요약하여 핵심을 그대로 기록했다. 그래서 통일 이전으로 따지면 고구려의 역사가 오히려 신라의 역사보다 더 길다.

깔끔하게 번역한 이재호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본기》는 박혁거세부터 고구려 멸망(668)까지의 문무왕 전편(前篇)은 제1권 33페이지에서 253페이지까지 총 221페이지다. 반면에 《고구려본기》는 제2권 15페이지에서 278페이지까지 총 274페이지다. 고구려에 대한 기술이 신라보다 53페이지나 많다.

제3권 《열전》에 보면 <김유신金庾信>이 제41권에서 제43권까지 총 3권이나 되는데, 그 길이는 번역본으로 261페이지에서 324페이지 총 65페이지에 걸쳐 있다. <태종무열왕> 20페이지의 3배다. <문무왕> 79페이지에만 미치지 못할 뿐 어떤 왕의 내용보다 많다.

김유신도 식민사학과 민족사학과 주체사학과 민중사학에 의해 뭇매를 맞지만, 아마 그 사람들은 대부분 『삼국사기』를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더라도 자신들의 우스꽝스러운 사관에 꿰어 맞춘 것이리라. 삼대 세습공산왕조와 어쩌면 한 목소리 한 몸짓으로 통일신라의 정통성에 흠집 내는 신파극을 연출한다.

◇중국에 주체적이었던 김유신과 김부식, 중국에 사대적인 촛불세력

신라 장군 김유신(595∼673)을 바라보는 두 시선,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48)는 상이한 평가를 하고 있다.
 

김유신과 김부식의 사대주의를 꼬집고 개탄하는 세력일수록, 한국의 사학 전공자들일수록, 그들을 산하에 거느린 정치 세력일수록 어찌 하나같이 현재의 중국에 대해서는 그리도 사대적(事大的)인지!

점잖은 미국과 일본과는 아무리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각을 잘 세우면서, 막상 무지막지한 깡패대국 중국에게는 어찌도 그리 알아서 슬슬 기는지!

중국에서 미세먼지가 어린이의 맨눈으로 봐도 아무리 뿌옇게, 새까맣게 날아와도 찍 소리 한 번 못하고,

위풍당당한 세계 8대 선진강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민’자도 모르는 공산당 일당 독재국에서 혼밥을 질리도록 ‘드시어도’ 그저 ‘천자의 나라’를 황해처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장강(長江)처럼 유장하게 찬양하기 바쁘고,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용 사드 배치에도 중국 또는 북한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중국이 아무리 적반하장 격으로 치사하고 야비하게 무역보복을 가해도 ‘황공무지로소이다’라며 일사불란한 꼬리 흔들기와 징그러운 보조개 짓기에 열과 성을 다할 따름이다.

낯설고 물 선 나라에서 바친 3만5천 미군의 시산혈해로 자유민주를 지켜 준 자유대한의 은인 맥아더 장군의 동상은 끌어내리며 손뼉치고! 《애국가》 대신 《임의 행진곡》을 떼창하고!

◇소정방을 개처럼 굴복시킨 김유신

대당의 장수 소성방 그는 당나라에서 사망하여 고향에 묻힌 것으로 중국의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으나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고 한다. 오직 우리역사에서만 소정방이 당시 당나라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병사나 노사한 것이 아니라 신란의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결사대의 전략에 의해 당교라는 곳에서 즘새즙을 탄 술을 마시고 독살되어 부하장종들과 함게 당교에 묻혔다는 것이다. 이 큰 대관료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당나라 조정은 이를 쉬쉬하고 숨겼다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사진=구글 이미지 캡쳐

『삼국사기』를 통해서 본 김유신은,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평생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김유신은 지혜와 애국심과 주체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과 겨레에 대한 애정이 중국의 어떤 위인보다 돋보인다.

그중에서 황산벌 싸움 직후의 장면이 압권이다. 사기충천한 대오정연한 5만의 군대를 거느린 김유신은 사비성을 치기에 앞서 안하무인이었던 소정방(蘇定方)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소정방이, 여차하면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를 차례차례 집어삼키려고 13만 오합지졸을 거느리고 황해를 건너 ‘해외여행’ 온 소정방이 격렬한 황산벌 전투는 생각도 않고 약속에 늦었다는 너무도 사소한 이유만으로 신라의 김문영(金文颕) 장군을 목 베려 하자,

66세의 김유신 대장군이 바로 서부의 총잡이보다 빠르게 0.4초 만에 칼을 빼들고 소정방에게 정면으로 겨누며 먼저 시건방지고 허접스러운 당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나서 백제를 멸하겠다고 노기충천(怒氣衝天)하는 장면은 과히 압권이다. 그러자 허장성세의 소정방은 바로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짓고 이내 기생처럼 배슬배슬 웃으며 개처럼 꼬리를 똘똘 만다. 이 부분은 《태종무열왕》에 나온다.

이병도 등이 번역한 것도 있지만, 이재호 번역본이 가장 원문에 충실하다. 한문 원문도 뒤에 제시되어, 함께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원문을 먼저 보고 번역본을 읽으면 더 좋고.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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