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서울역 회군과 5.18에 대한 반성(낭만주의 학생운동 비판)

신군부, 저항세력 대대적 검거...학생운동을 지하로 숨게 만들어
1980년 '서울의 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반성적 논쟁 진행
무림 '현장준비론' 비판에 직면...학림 '선도적 투쟁론'이 힘얻어

'선도적 투쟁론'을 내세운 '학림'은 1981년 봄 학기 동안 전국적으로 20여 건의 시위를 만들어냈고, 노동현장과 연계를 강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사진은 서울 혜화동 일대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
'선도적 투쟁론'을 내세운 '학림'은 1981년 봄 학기 동안 전국적으로 20여 건의 시위를 만들어냈고, 노동현장과 연계를 강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사진은 서울 혜화동 일대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학생운동을 비롯한 저항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을 색출한 무림사건(1980년 12월)을 비롯해 노동자와 학생운동을 연계하려 했던 학림사건(1981년 5월), 부산지역 학생운동 조직을 검거한 부림사건(81년 9월) 등 ‘림’자 돌림의 사건뿐 아니었다. 대전 충남지역 교사들의 모임인 한울회 사건(81년 3월), 아람회 사건(81년 7월), 금강회 사건(81년 7월), 광주지역 재야운동가들의 횃불회 사건(82년 3월), 전북과 군산지역 교사들의 모임인 오송회 사건(82년 11월) 등을 잇달아 만들어냈다.

사실, 이러한 조직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것으로 이름조차 수사기관에서 붙인 것이다. 즉, 무림사건은 80년 12월 ‘반파쇼 투쟁 학생선언문’ 살포를 계기로 서울대 학생운동 언더(지하) 조직 활동가를 대대적으로 검거하면서 만든 이름이다. 사건의 실체가 종잡을 수 없다고 해서 안개 무(霧)자를 붙여서 ‘무림사건’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학림사건은 이태복, 이건복 형제 등 학생운동가와 노동자가 연계된 전민노련, 전민학련 조직을 반국가단체로 만든 조직사건이다.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자주 만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부림사건은 부산지역 재야와 학생운동가들을 엮은 조직사건이다. 학림사건의 이태복과 광주의 윤상원 등은 서로 알고 있었지만, 부림사건은 학림사건과 연계성이 없었다.

또, 한울회, 아람회, 금강회, 횃불회, 오송회 사건들은 학생운동 출신의 교사나 재야 운동가들의 모임을 반국가단체로 만들어낸 사건들이다. 아람회 사건은 아람이라는 아이의 돌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사건이다. 오송회 사건은 소나무 다섯 그루가 있는 동산에서 4.19과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술잔을 기울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듯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각종 시국사건을 만들어내며 반정부 운동 조직을 ‘반국가 단체’로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반국가 단체를 색출하면 1계급 특진을 시켜주는 포상을 했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조직을 억지로 엮은 경우가 많았다.

신군부 검거선풍, 학생운동 지하화와 반체제 논쟁 촉발

이러한 검거 선풍은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을 더욱 더 지하로 숨게 만들었고, 민주화운동을 넘어 반국가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79년 YH신민당사 농성과 김영삼 제명, 부마항쟁, 10.26 박정희 시해, 11.24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12.12신군부 군권장악, 80년 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한 반성적 논쟁이 진행되었다.

그 첫 번째가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준비론적 경향을 보인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른바 ‘무학논쟁’이다. 무림-학림 논쟁은 5.18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후반기부터 1981년 학림 사건까지 1년 남짓 일어났던 운동권의 사상과 투쟁에 대한 논쟁이다.

주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이후 학생운동을 지도해 온 주류(무림)와 ‘혁명적 민주주의의 선봉’으로서 학생운동의 역할을 중시하는 신조직(학림)의 대립이다. 이 논쟁에서 중심은 학생운동의 역할 문제였다. 하지만 야당과의 협력문제, 노동자 등 민중과의 결합문제, 혁명 지도부 문제까지 관련되어 있었다.

1980년대 초 부산의 대학에서 있었던 반정부시위. 당시 부산 지역의 재야와 학생운동가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조직사건이 '부림사건'이다.
1980년대 초 부산의 대학에서 있었던 반정부시위. 당시 부산 지역의 재야와 학생운동가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조직사건이 '부림사건'이다.

이러한 논쟁은 박정희 시해와 서울의 봄,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본격적인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야당이 아니라 민중이 주도권을 잡는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집단인 ‘학림’은 "어떻게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열기를 끌어올려 혁명적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가?"란 것을 실천적 과제로 삼았다.

반면 1차적으로 보수야당의 집권을 통한 자유민주주의적 개량이 주요한 정치적 과제라고 생각해왔던 ‘무림’은 "어떻게 유신잔당의 발호를 억제하고 보수야당을 집권시킬 수 있는가?"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무림의 ‘현장 준비론’, 학림의 ‘선도적 투쟁론’

서울역 회군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채의식, 전두환 신군부의 조직사건 검거 선풍을 겪으며 학생운동이 치열한 논쟁에 빠져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동원 금지령을 내리고,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무림의 ‘준비론’이 투쟁을 방기하는 것으로 비쳐졌기에 이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었다.

무림의 주화론적 경향과 서울역 회군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끈 학림계열의 윤상원과 들불야학 투사들과 비교되었다. 광주에서 목숨을 다 바쳐 투쟁한 투사들에 비해 공수부대가 관악산을 넘어 서울대로 진주한다는 루머가 퍼지자 학교를 비우고 귀가한 무림 지도부,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무림 지도부는 너무도 비겁하게 비쳐졌다.

그리하여 서울대 학생 운동권에서도 80년을 지나며 학림노선 동조자들이 많아졌다. 그에 따라 무림의 일방적 우세였던 학생 운동권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정파투쟁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 영향으로 학림계열은 전국민주노동자연맹에 이어 ‘전국민주학생연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편 무림조직에서는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 "시위를 자제하고 조직 역량을 보존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구속과 처벌이 두려운 것 때문이 아니다"는 점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것이 80년 12월 11일 "반파쇼 학생 투쟁 선언문"을 작성하여 살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법당국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고, 무림사건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반면 학림은 서울대에서 조직적 토대가 약했다. 그 때문에 80년 서울역 회군에서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역 회군 이후 서울대에서는 ‘무림으로부터의 학림계열로 넘어온 개종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1981년 봄 학기에 서울대 시위를 주도했다.

80년대 초반을 휩쓴 선도적 투쟁론

또 학림은 이 기간 내에 전국적으로 약 20여 건의 학원시위를 만들어 냈고 노동현장과 연계를 강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것이 6~8월에 걸쳐 집중수사를 받아 학림사건과 ‘부림사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때 나온 팜플릿이 ‘야학비판’에 맞선 ‘학생운동 전망’이라는 팜플릿이다.

‘학생운동 전망’을 쓴 ‘소준섭’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82년 초, 광주학살의 어두운 그림자가 자욱했다. 전두환의 철권 정치가 사람의 가슴을 짓누르는 가운데 사회 전체에 공포와 패배주의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선봉대격인 학생운동조차 잠잠하기만 했다.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당시 ‘야학비판’이라는 팸플릿이 읽히고 있었다. 그 주요 논리는 군사독재에 맞서서 투쟁을 해봤자 희생만 늘어날 뿐이며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사회운동, 특히 노동운동 지도부로 이전하는 장기전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현장준비론’이었다. ‘노동대중 조직’이란 명분으로 당면 투쟁과 희생의 임무를 회피하는 논리였다. ‘야학비판’ 팸플릿의 논리는 의외로 심각해 전두환 군사독재의 압제와 함께 운동이 장기적 침체기에 놓일 수 있었다.(중략)

‘학생운동의 전망’은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선도적 투쟁체로서 정치투쟁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학비판’의 준비론에 대해 "학생운동 지도부가 그대로 사회운동으로 이전하여 사회운동 지도부를 형성한다는 논리는 전체 운동의 현실과 학생운동의 현실을 혼동하는 것으로서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비판했다.

1988년 10월 종로성당에서 열린 석방인사 환영회에서 석방된 이태복 씨가 같은 집안인 이창복 민통련 부의장을 감싸안고 있다. 이태복 씨는 1980년대 초 전민노련·전민학련을 조직, 반국가단체를 만든 혐의를 받은 '학림사건'의 중심인물이다.
1988년 10월 종로성당에서 열린 석방인사 환영회에서 석방된 이태복 씨가 같은 집안인 이창복 민통련 부의장을 감싸안고 있다. 이태복 씨는 1980년대 초 전민노련·전민학련을 조직, 반국가단체를 만든 혐의를 받은 '학림사건'의 중심인물이다.

아울러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선도체로서의 정치투쟁을 요구받고 있으며, 시위는 학생운동의 최고 형태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특히 ‘전망’은 가두시위를 강조하면서 "정치투쟁의 장소는 가두로서 전민중적 항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학생운동의 전망’의 주장과 논리가 "1980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독재의 탄압으로 수세에 몰린 학생운동의 패배주의를 극복했다"고 자평한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민청련 등 청년운동도 신속하게 활성화됐으며, 전체 민주화 진영이 전열을 정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무림사건=서울역 회군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깊은 패배주의에 젖어있었다. 특히 준비론적 입장을 지닌 서울대 운동권은 소모적인 시위 만능주의를 배격하고 민중들의 조직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문’을 12월 11일 발표하였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선언문의 내용을 문제 삼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사건으로 몰고 갔다. 수사당국은 남명수, 현무환, 김명인 등 100여 명에 이르는 재학생, 군복무자 등을 소환하여 고문하고 조사했다. 그 결과 9명을 구속하고 90여 명을 강제 입대시켰다.

주로 뚜렷한 조직 활동이 있었다기보다는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언더 지도부와 서클들을 엮어서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으로 만든 것이다. 무림, 학림, 부림 등 전두환 정권 초반의 반국가단체 조직사건들은 대부분 그랬다. 공동의 이름과 강령을 가진 조직들이라기보다는 운동권 서클들의 인맥관계를 엮어서 조직사건을 만들었다. 조직 이름도 수사기관이 붙여준 것이다.

이런 조직사건, 시위의 주동자급은 구속되고, 중간 간부나 적극참여자는 강제징집된 경우가 많았다. 그 중 강제징집된 학생들은 군의 보안사에서 의식 개조사업(일명 녹화사업)을 받고 운동권 친구의 정보를 수집해오라는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 그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정신질환을 앓거나, 목숨을 끊는 경우가 생겼고, ‘군 의문사’가 생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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