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로 마음을 찢다 : ‘에스더기도운동’ 이용희 교수
“전세계 북한만큼 불쌍한 나라 없는데, 우리는 왜 북한위해 더 기도하지 않나”

1992년 기도모임 시작...2007년 3000명 참석한 ‘에스더 단식성회’서 지금까지
“전도인으로 살려 했는데 기도인으로 살게 돼...예수님 본받아 기도를 훈련했죠” 
“먼저 깨끗한 그릇 되기위해 거룩운동 해야 하고, 동성애와 낙태 등을 막아서야”

이대 다락방 전도 수련회 참석 중 주님 영접...“방학 때마다 농어촌 전도 다녔죠”
군시절 금식기도하며 교회건물 지어...‘교회는 기도로 짓는거구나’란 믿음 생겨
하나님께 전도 간다 기도하니...깐깐한 상사가 1년도 안된 신입 휴가 그냥 내줘
침체된 대학 선교단체 총무로 다시 돌아와...모임 살리고 전도팀만 20개 만들어

“우리가 북한 위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나...그게 제 부르심이자 사명”

지난 7일 오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야외 벤치에서 자유일보와 인터뷰 중인 이용희 교수(에스더기도운동 대표). 그는 이날 "북한구원과 복음통일이 가장 우선순위"라고 강조했다. /김석구 기자
지난 7일 오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야외 벤치에서 자유일보와 인터뷰 중인 이용희 교수(에스더기도운동 대표). 그는 이날 "북한구원과 복음통일이 가장 우선순위"라고 강조했다. /김석구 기자

“하나님은 저를 지으신 창조주(성부)이시고, 죽어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성자)이시고, 제가 부르심대로 살 수 있도록 지도하시고 동행하시는 나의 인도자(성령) 이십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은 명확했다. 7일 오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야외 벤치에서 만난 이용희 교수(가천대,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의 첫인상은 마치 ‘선한목자’처럼 보이는 온화한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다. 이날 오전 서울시의회 앞에서 ‘퀴어축제 반대 국민대회’ 기자회견을 막 마치고 서둘러 인터뷰 장소로 이동해 온 그의 목소리에서 부드러움으로 감싸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운동을 이끄는 대표 다운 교회를 향한 매서운 질타도 서슴치 않았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는 왜 동족의 핏값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까"라며 한탄했다. /김석구 기자
이 교수는 "한국교회는 왜 동족의 핏값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까"라며 한탄했다. /김석구 기자

“한국교회도 그렇고 에스더기도운동도 그렇고 해야 할 일이 참 많은데, 저는 북한구원과 복음통일이 그 중 가장 우선순위라고 믿습니다. 전 세계에 북한만큼 불쌍한 나라가 없는데, 우리는 왜 북한을 위해 더 일하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성경의 유대민족도 바빌론에 70년 지배를 받은 뒤 풀려났는데 북한은 분단 후 현재 70년이 지났는데도 전 세계 각종 자유지수 마다 꼴등, 노예지수는 세계 1등입니다. 한국교회는 왜 동족의 핏값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까요. 저는 이런 면에서 딤전5: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말씀에 한국교회가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2년 이화여대 다락방 기도모임으로 시작해 2006년 신촌에서 조그만 건물의 7층을 빌려 ‘종일종야 기도모임’을 진행하던 그와 몇십명의 멤버들은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 연도이자 대통령 선거가 있던 2007년 1월 첫주 교회와 나라가 이렇게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북한동포의 해방과 자유, 복음을 위해 우여곡절 끝에 오산리 금식기도원을 3일간 빌려 3000여명이 참여한 ‘에스더 단식성회’를 열었다. 현재의 ‘에스더기도운동’의 시초가 된 모임이었다. 사실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기도와 사역을 해 온 것은 훨씬 더 이전부터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때 월요기도모임을 하면서 북한의 상황을 들으며 북한 후원운동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탈북민들과 북한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94년부터는 월요모임에서 북한 기도에 대한 비중이 더 높아졌어요, 당시 월요기도모임은 목사님들도 계셨고 분야별 전문가들과 교수 친구들도 왔고 저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20여명 정도 모이다가 30~40명까지 모이게 됐죠. 거기서 북한 구원운동을 하면서 헌금도 하고 탈북민 구출사역도 했었어요.” 

이후 에스더기도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탈북자 구출 사역을 했다. 중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구출조를 만들어 중국에 있던 탈북민들을 동남아 국가들의 우리나라 대사관으로 넘기는 방식이었다. 여러 해 사역동안 구출조가 감옥살이도 하고 추방당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현재는 직접 구출사역 보다는 후원을 위주로 하고 있단다. 그렇지만 북한 동포를 위한 기도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이다. 청년시절부터 문제가 생기면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를 했었다는 그는 처음부터 기도의 용사였을까.

이 교수는 "처음에는 전도를 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이 필요해서 기도했다"고 말했다. /김석구 기자
이 교수는 "처음에는 전도를 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이 필요해서 기도했다"고 말했다. /김석구 기자

“처음에는 전도를 위해 기도했어요. 전도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이 필요해서 기도했는데, 지금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운동을 하게 돼 제가 생각하지 않았던 그림이 됐습니다. 전도인으로 살려고 했는데 기도인으로 살게 된 거죠.(웃음)

저는 기도는 ‘훈련’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군대에서 교회건축을 위해 모금하기 전에 40일을 밤마다 1시간씩 기도했었어요. 그러다 기도가 더 필요하니까 기도시간을 2시간으로 늘렸죠. 처음엔 힘들었지만 곧 익숙해지고 더 어려운 때는 3~4시간도 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훈련입니다. 운동처럼 ‘기도의 근력’을 키워 나가야 해요. 중보기도학교를 한다면 강의만 하면 안되고 1시간씩 이라도 기도를 함께 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산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하고, 성경적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도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는 기도현장에서 가르쳐야죠.”

딤모데후서 2: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말씀을 언급하면서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했다.

“하나님은 깨끗한 개인과 교회, 민족, 나라를 쓰시는데 우리가 음란이나 낙태 등의 죄들로 타락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가 현재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낙태법 등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다음세대도 하나님이 쓰실 수 없어요. 우리가 거룩해야 복음통일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거룩운동을 해야 하고, 동성애와 낙태 등을 막아서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공식적으로도 같이 힘을 쏟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거룩할 때 복음통일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음은 이날 이용희 교수와 자유일보의 일문일답.

-어떻게 처음 예수님을 만나게 되셨나요.

“모태신앙인데, 실제로 주님을 만난 건 대학 2학년 여름방학때 였습니다. 초교파적 선교단체인 이대 다락방 전도 수련회 참석 중에 주님을 영접했어요. 어려서부터 모태신앙으로 중·고등부 회장도 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었지만 그전까지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었었거든요. 그 수련회 이후 여름방학 때마다 농어촌 전도를 다녔습니다. 이후 초신자들을 초청해 수련회 진행을 하다가 성령체험도 하고 방언도 받았습니다. 대학시절 이대 다락방 활동은 하나님에 대해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됐죠.”

대학시절 이용희 교수(앞줄 가운데)가 1978년 7월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 농촌전도팀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용희 교수 제공

-군 복무시절 이등병 때부터 군종병을 하셨고, 군 교회 건물을 짓고 나오셨다고요.

“농촌전도를 열심히 하다가 대학교 졸업 후 사병으로 군대를 늦게 갔어요. 강원도 철원에 있는 부대였는데 비무장지대에도 경계근무를 들어가는 곳이었어요. 너무 춥고 힘들어서 첫 겨울에 무좀·동상·치질이 한꺼번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산악을 타니까 겨울에도 발이 땀에 젖었는데 그대로 다시 서 있으면 동상과 무좀이 함께 걸렸고, 치칠도 왔어요. 그런데도 돌이켜보면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참 감사합니다. 전방에서 군생활을하면서 군인정신으로 무장됐던 것 같아요. 

당시 저는 대대군종이었는데 저희 대대에는 군종목사님이 한달에 두 번밖에 안 오셨기 때문에 제가 새벽예배와 주일예배, 수요예배와 군종모임까지 완전히 목회자처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내식당으로 쓰던 저희 예배당이 너무 공간도 작고 추워서 530여명 대대병력 중 40명 이상이 못 들어갔어요. 게다가 찬 돌바닥이라 그 인원 중 겨울에는 믿음없은 병사들은 잘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군종계통으로 교회건물을 증축하려고 보고를 올렸는데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대대장님이 기독교인이셨는데 제가 모금을 해서 교회를 지을테니 지휘건만 막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허락해 주셨습니다. 

말년휴가를 나와서 모금을 했는데 가족과 친척들이 준 돈으로 150명이 들어가는 교회 건물을 결국 증축하게 됐습니다. 이후에도 건축이 완료될 때 까지 제대 말년에 기도하면서 잠들었습니다. 건축자재가 안 오면 3일 금식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때 ‘교회는 돈으로 짓는게 아니라 기도로 짓는거구나’라는 믿음이 생기더라구요.”

이용희 교수와 당시 군종 목사, 김태구 백골부대 제3대대장 부부, 후임 군종(앞줄 왼쪽부터)이 1983년 9월 3일 군대교회 헌당예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희 교수 제공

-대학 졸업 후 영국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셨었는데요.

“하나님께서 직장생활을 통해 많이 훈련시키셨고 무역실무와 금융업무 등에 대해 많이 알려주신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도 마음에는 계속 전도를 다니고 싶었습니다. 취업한 해에 대학 청년부를 인솔해서 전도를 가야하는 상황이었는데, 원래 취업 후 1년이 지나야 휴가가 가능했는데 그냥 휴가를 올려놓고 금식기도를 했어요. 

그랬더니 깐깐한 상사가 바로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휴가도 못 나눠쓰게 돼 있었는데 여름·겨울로 일주일씩 쪼개서 올린 것이 회사 규정에도 안 맞는데 결재를 해 주더라구요. ‘하나님 좋아하는 건(전도) 다 해 주시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유학 후 돌아오셔서 평신도로 이화 다락방 총무도 맡게 되셨습니다. 

“이대 다락방을 통해 은혜를 참 많이 받았는데 유학을 다녀와 보니 당시 대학생 모임이 너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보통은 목사님들이 총무를 하셨는데, 당시 평신도인데 저를 추천하셔서 제가 그곳에서 받은 은혜에 빚갚는 마음으로 자비량으로 섬기게 됐어요. 

당시 대학생들의 떨어진 신앙과 줄어든 모임수를 늘리고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이 힘을 쏟았습니다. 함께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하고, 강사님들을 모셔서 은혜도 받게 하고, 전도 수련회도 하고 하니까 모임이 서서히 살아나서 나중에는 전도팀만 20개가 만들어져 나가게 하시더라구요. 무엇보다 당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기름부어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용희 교수가 1997년 5월 이화여대 다락방 전도협회 총무 시절 전재옥 사무총장(앞줄 왼쪽 두 번째), 협회 간사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희 교수 제공

-에스더기도운동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교회에서 저에게 아프리카와 캄보디아, 북한 중 어디 선교를 후원하면 좋겠냐고 자문을 구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만약 자신의 가족과 부모님이 예수님을 안 빋으면 누구를 먼저 전도하냐구요. 북한선교는 우리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가장 우선순위 입니다. 하나님은 북한 땅을 보면서 오늘도 피눈물을 흘리십니다. 북한 동포들은 이 땅에서 노예처럼 살다가 죽어서도 진짜 지옥에 가는데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무덤덤할까요. 저는 이부분에 있어 더 외치고 마음을 찢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청년들이 주님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찬양하면서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너희들 부흥 달라고 기도 안 해도 돼. 북한 동포 살려달라고 기도하면 부흥이 오는거야. 주님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 사랑하는 것을 구해야지.’

제가 저희 가족 5남매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저를 많이 사랑하셨어요. 제가 어려운 일 있을 때 어머니가 울면서 금식기도 해 주셨어요. 사랑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도 같이 우는게 사랑입니다. 주님이 정말 견딜 수 없어 하는 북한 동포들에 대해 애끓는 마음이 있습니까. 자꾸 엉뚱한 것을 구하지 말고 북한에 대해 구하자는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일에 나서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서겠습니까. 우리가 북한을 위해 나서지 않으면 누가요. 저는 그게 제 부르심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에스더기도운동이 앞으로 많은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북한의 우리 동족들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북한에서는 교회도 못가고요. 옛날 미국의 흑인 노예들보다 더 불쌍합니다. 흑인 노예들은 적어도 예수믿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거든요. 우리 동포들은 신앙의 자유도 없고 예수 믿는게 발각되면 바로 감옥에 갑니다.”

이 교수는 "우리(북한) 동포들은 신앙의 자유도 없고 예수 믿는게 발각되면 바로 감옥에 간다”며 안타까워 했다. /김석구 기자
이 교수는 "우리(북한) 동포들은 신앙의 자유도 없고 예수 믿는게 발각되면 바로 감옥에 간다”며 안타까워 했다. /김석구 기자
이용희 교수는...

1958년 서울 출생.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워싱턴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예일대학원에서 국제개발경제학 석사를 취득한 뒤 영국 그린드래이즈은행 서울지점과 UNDP(유엔개발계획) 내셔널컨설턴트로 근무했다. 이후 국제교류협력기구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가천대 교수,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바른교육교수연합 대표를 맡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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