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직접 심문한 CIA마이클 리 黃파일[1]
황장엽 직접 심문한 CIA마이클 리 黃파일[1]
  • 마이클 리
  • 승인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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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명 당시 비행기 트랩에서 만세를 부르는 故황장엽 선생과 김덕홍 씨.

1997년 2월 12일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한 사건은 1986년의 신상옥-최은희의 북한탈출과, 1987년의 대한항공-858기 폭파사건과, 1994년의 김일성 사망에 버금가는 대형뉴스였다. 황장엽과 같은 거물급 인사의 망명은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 체제하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치르면서 국내사정이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의 일 이였기 때문에 북한의 체제유지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그러면 황장엽의 미국정부 담당 심문관이었던 나는 지금부터 황장엽이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무슨 이유로 망명을 단행했는지, 서울에 와서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떻게 생애를 마감했는지 정리해 보겠다. 국내 언론에서 그의 망명동기를 지금까지 많은 추측과 과장 및 비약적인 각도에서 언급했다. 나는 그를 직접만나고 심문한 심문관의 한사람으로서 객관적인 자료에 의거 이 글을 발표한다.

◇ 망명동기

학자풍의 황장엽은 유독 김용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학자풍의 황장엽은 유독 김용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황장엽은 1923년 2월 17일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본의 중앙대학교 법과에서 수학하였고 소련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유학했다. 그는 평양에 있는 김일성 종합대학교의 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84년 4월부터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역임했고, 1993년 12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말년에는 그가 창시한 주체사상의 창달과 국제보급에 전념을 다 하였다. 그는 험 잡을 데 없는 깔끔한 학자였고 김일성 생존 시에 그를 최대한으로 떠받든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으며 학자로서의 그의 위상과 정치적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1990년 5월에 김용순이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고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되었다. 김용순은 1990년 9월에는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에서 조선노동당과 일본자민당과 사회당의 3당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북한 측 주역을 했다. 그는 1992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아놀드 캔터 국무부 차관과 미북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김용순은 1992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되었고 1992년 12월에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면서, 1991년 5월에 허담이 사망해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되었다. 1993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4년 6월에는 김영삼 김일성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으로 남한의 통일부총리 이홍구와 만났다.

황장엽과 김용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탈북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김용순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술 잘 마시는 사교적 인물이었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친절하여 대인관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생활에서는 김정일과 손발이 척척 맞는 패거리였고, 기쁨조 파티에는 거의 빠지는 일이 없는 단골손님이었다. 김정일과 술자리를 같이하는 사람들 중에 음주의 최강자를 뽑으라면 장성택, 김용순, 계응태, 김기남 등이 있었으나 춤과 노래에는 아무도 김용순을 따를 자가 없었다.

◇김용순과 황장엽의 라이벌 의식

김용순(왼쪽)과 황장엽(오른쪽)
김용순(왼쪽)과 황장엽(오른쪽)

공무에서도 김정일의 비위를 아주 잘 맞추는 김용순을 간부들 사이에서는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그를 <아첨꾼>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황장엽도 그중의 하나였다. 특히 황장엽과 김용순은 11세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며, 당의 국제담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직을 역임한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학자풍의 황장엽은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김용순은 체질적으로 바람기가 있었으며 숱한 염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 사이에 오랫동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이혼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김용순은 김경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장엽은 김일성에게 고하여 김용순을 질책하고 근신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황장엽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김용순과 김경희는 황장엽에게 애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워낙 깔끔하고 빈틈이 없는 황장엽에게는 걸고넘어질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황장엽은 자기를 신임하던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공허했고 김정일의 통치스타일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장엽, 김경희와 김용순 불륜 김일성에 고하다.

나란히 사진을 찍은 김일성과 황장엽
나란히 사진을 찍은 김일성과 황장엽

소외감을 느낀 황장엽은 주체사상 창달과 전파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던 중, 모스크바 주체사상 강연회에 가서 심혈을 기울인 강연과 토론에서 많은 교수와 학자와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위대한 주체사상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사실을 파악한 김용순은 김경희와 합세하여 김정일에게 황장엽을 거세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들은 “주체사상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가 제창한 철학이며 통치이론이지 어째서 황장엽의 학설이 될 수 있는가. 황장엽은 일개 학자로서 우리 아버지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위대한 수령을 모독했으며 그분의 명예를 가로챈 반역자이다” 라고 하면서 황장엽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김정일이 그를 숙청하기 위해 더 결정적인 약점을 노리고 있을 때, 황장엽은 위기감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97년 2월 12일에 그 결심을 결행했다. <계속>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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