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 반으로 요약된다
배부름은 첫술에 요약되어 있다
어떤 술도 그 맛은 첫잔과 마주한 사람이 나누어 좌우한다
귀뚜라미는 소리로서 그 존재를 간단히 요약한다
평행한 햇살을 요약하여 업은 잎사귀 하나 아래로 처지고 있다
방향은 가늘게 요약되어 동쪽은 오로지 동쪽만을 묵묵히 담당한다
요란한 것들을 집합시켜 보면 사소한 것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서해는 서해를 찾아드는 모든 강의 이름을 요약한다
목숨은 요약되어 한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하루살이는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산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

이갑수(1959~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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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이나 국문학을 전공해야 시인과 소설가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그렇지 않다. 글을 잘 써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 중에는 문학과 관련 없는 공부를 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문학만 아는 사람보다 세상을 보는 눈 하나가 더 있다. 문학인이 되고자 하는 비전공자들은, 그러므로 문예창작이나 국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무학(無學)이 더 유리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길들이는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자유로워 보통 사람들과 달리 상상력의 고삐가 애당초 없거나, 있더라도 먼저 풀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드물긴 하지만 예술계에 제도권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 혜성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이갑수 시인은 식물학을 전공한 과학도였다. 그는 다른 시인들이 가지지 못한 과학의 눈 하나를 더 가졌다. 이 시에도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바,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는 대목은 과학도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이다. 사실 ‘요약’이라는 제목은 문학적이라기보다 학술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 제목을 다는 데 어떤 제약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요약은 문자 그대로 간추리고 단순화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삶의 바람직한 어떤 형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삶이란 ‘요약’될 수 있는데, 이걸 달리 말하면 단순화시킬 수 있다는 것. 시인은 사물의 단순화를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화가 몬드리안처럼 인생을 단순화시켰다. 말이 쉽지 단순화 작업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견주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렵다. ‘물질이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았듯’,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듯’ ‘하루살이가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살았듯’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는 것. 이 마지막 문장을 쓰기 위해 시인은 그토록 장황한 은유와 ‘요약’이란 학술적 용어까지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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