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죽이려는 ‘임정 100년’ 푸닥거리
이승만 죽이려는 ‘임정 100년’ 푸닥거리
  •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
  • 승인 2019.04.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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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첫 대통령 이승만

임정 100주년 기념을 알리는 문재인 정부의 요란한 퍼포먼스를 지켜보면서 대체 우리에게 임정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해 본다. 우선 임정 100년 기념일을 4월 11일로 잡은 것이 적절했는가를 따져본다.

1919년 3월 1일 거국적인 비폭력 무저항의 만세 시위운동으로 독립의지를 표명한 이래 국내외에서는 임시정부가 여러 개 조직되었다. 4월 11일에는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고,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상해에 와 있던 대표자들은 국내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①상해와 노령(露領)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해산하고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서울정부(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임을 인정한다.

②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둔다.

③상해에서 설립한 정부가 실시한 행정은 유효임을 인정한다.

▲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1921년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이승만, 좌측이 이동휘, 우측이 안창호다.
▲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1921년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이승만, 좌측이 이동휘, 우측이 안창호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9월 11일 서울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임시정부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임시정부는 민주와 민본(民本), 민권을 추구하는 민주공화제를 기본이념으로 삼았고, 임시의정원이라는 대의기관을 설치하는 등 삼권분립 원칙에 의거한 민주공화제 정부가 출범했다.

전후좌우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임정 100년을 기념한다면, 당연히 그 날짜는 통합 임시정부가 세워진 9월 11일이 타당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문재인 정부는 4월 11일을 ‘임정 100년’이라고 이 난리굿판을 벌이는 것일까?

두 번째는 임정 100년을 논하면서 이승만은 철저히 제끼고 김규식, 여운형, 안창호 같은 인물들을 앞세워 세종로 일대를 도배질했다는 사실이다. 김규식과 안창호는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정적(政敵)으로서 이승만의 리더십을 공격하는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특히 안창호는 서북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기호파인 이승만 공격의 선봉 역할을 했다.

◆임정을 말아먹은 여운형

여운형 선생
여운형 선생

게다가 여운형은 임시정부와 무슨 인연이 있나? 그는 상해 임정 출범 과정에서 외무부 차장에 선출됐으나 몇 개월 만에 사퇴한 후 임정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후 공산주의 활동에 주력했고,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을 앞두고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여 정권을 이양했다.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에게 정권 이양의 조건으로 전국 각지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정치경제범 해선 및 식량 배급권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이를 수용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6일, 전국의 교도소에서 1만여 명의 1급 공산주의자들이 석방되었다.

이날 석방된 사상범들은 대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에 흡수되었고, 이들은 해방정국에서 행동대가 되면서 남한 사회는 순식간에 좌익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여운형이 임정 환국 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이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임정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을 임정 100년을 위해 기념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역사적 사실로 보나 타당하다고 보는가?

셋째는 임정 100년 기념을 위해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인물들 중 대부분은 3·1운동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다. 임정은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동양에서 표본적인 민주주의 문명국을 건설하려는 목적에서 결성된 것이다. 그런데 임정 건설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유관순, 안중근을 비롯하여 의열단원 등을 상징 인물로 내세웠다.

김상옥은 의열단원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암살단을 조직, 국내에서 일본 고관 및 민족반역자를 대상으로 테러, 살해활동을 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 활동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무장투쟁 앞세워 3·1운동의 비폭력·무저항 정신 훼손

이처럼 임정 100년을 상징하기 위해 내세운 인물들의 면면은 대부분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무장 투쟁론자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화끈하게 무장투쟁으로 무찌른다는 선명성과 선전선동에는 더없이 훌륭한 프로파간다가 무장투쟁이다. 하지만 무장투쟁을 입으로만 하나? 무기는 어디 있고, 병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임정은 광복군을 유지 운영할 만한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1941년 11월 19일 임정은 중국 정부와 협상 끝에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을 체결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중국 영토 내에서의 활동을 승인받고, 광복군의 훈련과 무기·장비·급여 및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은 중국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1항),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광복군의 통수권을 갖게 되었다(2항). 이때부터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군사원조에 대한 대가로 총사령부 내 참모장, 참모처장 등 요직을 중국군 장교들에게 내주었다. 그 결과 독자적인 군사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광복군은 의병전쟁과 독립군의 전쟁노선을 계승하여 조국 해방의 전위부대를 자처했지만, 현실은 소수의 병력으로 훈련·첩보·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보조군의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거창했던 창군 당시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1945년 4월 광복군의 규모는 541명(중국인 장교 65명), 종전 시점에도 682명에 불과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은 중국, 미국과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느라 72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장투쟁은 선명한 프로파간다의 이점은 있었으나 어떠한 현실성도 갖추지 못한 비참한 공리공론이었다. 그런 사정을 너무나 예리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이승만이었기에 자기의 프린스턴대학교 스승인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을 하여 국제연맹의 힘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임통치 청원을 물고 뜯고 씹어제낀 인물들을 임정 100년의 상징 인물로 내세워 이승만을 욕보이고 있다. 결국 무장투쟁을 앞세우면 3·1운동의 비폭력·무저항의 위대한 정신이 말살된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문재인 정부의 임정 100년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난리굿을 피우고 있는 것일까?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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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2019-04-12 00:42:19
북한의 역사왜곡을 탓할게 없네요. 가장 임정을 반대했던 인물들을 임정 100년에 앞장세우는 문 정부의 천박함이란... 임정 초대 대통령을 지우는 솜씨가 북한의 김일성이 박헌영, 김원봉 등 정통 공산주의자를 지우는 솜씨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문 정부, 제발 임정 공부 좀 하세요. 역사왜곡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