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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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지시할 바보 국정원장이 아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CBS 라디오에서 한 말이다. 그는 2020년 발생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의 첩보 관련 보고서를 무단 삭제한 혐의로 국정원으로부터 고발당한 상태. 현재 국민의힘은 문재인 정권이 실족 후 북으로 표류해 간 공무원 이대준 씨를 남북관계를 의식해 ‘월북’으로 몰아갔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박 전 원장이 국정원 문건을 삭제함으로써 월북몰이를 도왔다는 게 그가 고발당한 이유다. 박 전 원장은 억울해한다. "모든 첩보, 에스아이(SI, 중요 정보라는 뜻) 문서는 국정원이 생산하지 않고 공유할 뿐"이며 "(첩보를) 삭제를 했다고 하더라도 국정원 메인 서버에는 남는다." 그런데 자신이 뭐하러 삭제를 지시하겠냐는 게 그의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지난 5월 한동훈 법무장관 청문회가 떠오른다.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김경율 회계사는 우리나라 좌파들이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 대처하는 3단계 매뉴얼이 있다고 했다. "첫째, 은폐합니다. 두 번째, 조작합니다. 3단계에서는 이를 조사하는 조직들을 무력화시킵니다." 그가 예로 든 것은 바로 대장동 사건, "처음에는 단군 이래 최대 치적이라 합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한 여러 언론과 시민단체의 지적에 의해 은폐한 게 드러나게 되니까 이제부터 조작을 합니다. 대장동의 주범은 윤석열이다. 이런 뜬금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 대목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고성을 질러 이야기가 중단됐지만, 우리는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문 정권이 자신의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검수완박을 통과시킴으로써 대장동 사건을 조사할 검찰을 무력화시켰지 않은가? 김경율은, 이런 사례를 얼마든지 더 댈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김경율의 말을 떠올린 것은 이런 패턴을 공무원 월북몰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단계, 은폐. 공무원 이대준 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살됐을 때, 문 정권은 이씨가 월북하다 죽은 것처럼 발표했다. 실종 다음 날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추락으로 추정되는 사고가 있었고, 북측 해역에서 우리 국민이 발견됐다’는 서면보고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이건 노골적인 월북몰이로 보인다. 유가족들이 당시 상황을 알려달라고 하자 문 정권은 정보공개를 거부했고, 유족이 정보공개 청구소송에서 승소하자 이에 따르는 대신 항소해 버린다. 그리고 문 정권은 퇴임 직전 이 자료를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함으로써 향후 15년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2단계, 조작. 정권이 바뀌고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민주당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 민생이 급한데 이런 거나 조사하냐, 감청내용을 공개하면 국가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국민의힘도 월북에 동조했다 등등이었다.

박지원 전 원장의 말도 조작의 일환, 자신이 삭제한 문서는 공유된 문서일 뿐, 국정원이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국정원에 따르면 그가 삭제한 건 국정원이 자체 생산한 문서였고, 삭제가 이루어진 것도 청와대 지시가 있은 뒤였다. 아마도 그 문서엔 ‘표류’로 짐작하게 만드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국정원이 박 전 원장을 고발할 때 ‘첩보 보고서 무단 삭제’ 혐의를 적용한 것은 강도 높은 내부감찰을 통해 관련자의 증언을 확보했기 때문이리라. 박지원이 "물가나 잡지 왜 나를 잡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걸 보면, 자기가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석이 어지간히 없는가보다.

이렇게 본다면 정권교체가 된 게 정말 다행이다 싶다. 이재명이 당선돼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면 바로 3단계, 즉 수사기관 무력화에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국정원의 감찰기능을 없애는 건 당연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국정원 해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간첩 잡는 역할도 경찰에 넘긴 정권이니, 국정원을 없앤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리라. 윤석열 대통령 취임 두 달,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다음을 가정해 보시라. "윤대통령 없었으면 지금 대통령이 이재명인데?" 현재에 좀 더 만족하게 되는 것은 물론, 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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