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서 발굴한 세 인간 보석: 반굴, 관창, 원술랑
《삼국사기》서 발굴한 세 인간 보석: 반굴, 관창, 원술랑
  • 최성재 교육문화평론가
  • 승인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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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 중 가장 한미(寒微)하던 신라가 600여년 전란시대를 끝내고 통일대업을 이룩하고 더 이상 동족상잔이 없는 평화시대를 연 것은 국론이 분열된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국익이 곧 가족이나 개인의 이익이 되는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귀족들이 솔선수범하며 희생한 대표적 예가 좌우 두 장군의 어린 아들 반굴(盤屈 우장군 김흠순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카)과 관창(좌장군 품일의 아들)이 차례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향해 단기필마로 뛰어들어 통일 제단(祭壇)에 스스로 목숨을 제물로 바친 일이다. 대장군 김유신은 이때 아들이 너무 어려서 심부름꾼으로도 못 데려갔지만, 후에 그의 아들 원술랑이 그와 비슷한 일을 담당했다.∥

[조선 중기 이후와 ‘민주화’ 이후의 한국, 되풀이되는 역사]

조선시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양반이고, 양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위선(僞善)이다. 양반은 백성 요새 식으로 말하면 국민 내지 민중과 유리되어 딴 세계에서 살았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양반은 세금도 거의 안 냈고 군대도 안 갔다. 전쟁이 나면 남 먼저 도망갔고 전쟁이 끝나면 전쟁에 참여한 장군들을 헐뜯었다.

의병을 일으킨 양반은 대개 권력에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화살 하나 못 쏘고 칼 한 번 못 휘두르는 주제에 양반 관료들은 오랑캐와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며 명분에 휩싸여 주화파(主和派)를 공격하였다. 그런 강성 발언으로 다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초에는 양반의 자제도 군에 갔지만, 16세기 이후에는 양반들은 전혀 군에 가지 않아서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는 것이 바로 군 입대 여부가 되었다.

지난 1997년의 대선 때부터 아주 기이하고 우려스러운 현상이 하나 발생했다. 후보자나 후보자 아들의 현역 입대 여부가 어떤 정책 대결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그보다 기이하고 우려스러운 문제는 그렇게 해서 당선된 대통령 2명과 그 이념을 같이하는 대통령 1명이 공통으로 ‘나 홀로’ 평화 무드를 조성하며 군 복무 기간을 무섭게 단축하거나 군 병력 자체도 확 축소하여, 북핵으로 상징되는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의 비대칭에 이어 군 병력에서도 심각한 비대칭을 육이오 남침의 원흉 북한에 헌납한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여야 없이 입대 비율이 현저히 떨어질 뿐 아니라(YS와 DJ와 MB의 공통점은 영문 이니셜을 좋아한다는 것과 군 미필자라는 것), 그들이 그렇게 입에 달고 다니는 국민이나 민중과 별세계에 살고 있다. 광팬이 아닌 한 여든 야든 정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없다.

이제는 정치 지도자만이 아니라 관료, 공기업 사장, 기업가, 은행장, 검사, 판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교수, 의사, 노조간부, 시민단체간부에까지 전 국민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듯하다. 실지로는 이들 중에 훌륭한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들은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아, 도매금으로 국민들은 그들에게 불신의 눈을 던진다. 하여간에 자기편만 이기면 그만인 막장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게 민주화 이후의 한국 현주소이다. 안보의 비상등이 켜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걸 밤무대의 사이키 조명 보듯 하며 다들 천하태평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민족은 늘 그랬을까.

천만에, 그렇지 않다. 삼국시대 특히 통일 무렵의 신라는 지도자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었었다. 이제 《삼국사기》의 역사 광산에서 인간 보석들을 캐 볼까 한다.

[김춘추가 먼저 구원을 요청한 나라는 당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김춘추. 사진=연합뉴스
김춘추. 사진=연합뉴스

신라의 왕위 서열 1순위 김춘추가 같은 겨레의 나라 고구려로 직접 들어가 손을 마주잡고, 파상적이고 집요한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구할까 하여 연개소문에게 애걸하다가 도리어 감옥에 갇히게 되자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서기 642), 고구려에게 처참하게 패하여(645) 이를 보득보득 갈고 있던 당을 설득하러 바다 멀리 당나라까지 가서(648), 마침내 나당(羅唐) 두 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멸하기로 한다(660).

이때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은 좌장군 품일, 우장군 김흠순과 함께 사기충천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와 황산벌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반굴과 관창의 희생]

백제의 계백 장군은 신라군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결사대 5천을 이끌고 이 신라군을 맞이하여 초전에 연전연승한다. 그 이유는 백제에서 벌어지는 전투라서 지형을 잘 이용한 탓이다. 세 군데로 진군하는 신라군을 맞이하여 계백은 유리한 고지 세 곳을 선점하여 신라군이 맥을 못 추게 만들었던 것이다.

4번의 전투에서 4번 다 백제가 이겼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용맹한 신라군이 10배의 군사력으로도 속수무책이었다. 급격히 사기가 떨어졌다.

(*그는 50년 전장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경이적인 기록을 갖고 있다.)

이때 저 유명한 관창이 나타난다. 아니, 사실은 관창이 먼저가 아니다. 반굴(盤屈)이 먼저이다. 그는 김유신 장군의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이었다. 김유신의 조카였다. (김유신은 이때 전쟁에 나갈 만한 아들이 없었다.) 장군 김흠순이 아들을 불러 일렀다.

“신하 노릇을 함에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함에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이러한 위급한 사태를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성과 효도를 다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이재호 역 (이하 같음)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반굴은 이 말을 듣고 즉시 나아가서 힘써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는다. 그러나 아직 신라군의 사기는 살아나지 않는다.

좌장군 품일이 이때 지체 없이 아들 관창을 부른다.

“우리 아이는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표적이 될 수 있겠지요?”

(吾兒年 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이에 관창은 단 한마디, '예!'하고는 즉시 창을 높이 치켜들고 말을 달려 홀로 적진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이내 사로잡혀 계백 장군 앞으로 끌려간다. 연이어 두 번이나 무모하게 필마단기로 신라병이 덤비는 것을 본 계백 장군은 의아하여 그 투구를 벗기게 한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이 숨을 헐떡거리며 매섭게 계백 장군을 노려본다. 계백 장군의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한기가 흘러내린다.

“신라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사들이랴!”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壯士乎)

계백 장군은 이상한 예감을 느꼈지만, 차마 소년을 죽일 수 없어서 그를 돌려보낸다.

관창은 살아서 돌아온 것이 부끄러웠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머리도 베지 못하고, 깃발을 빼앗지도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吾入敵中 不能斬將 旗者 非畏死也)

관창은 이어 맨손으로 푸아푸아 물을 떠먹고는 다시 말을 몰아 먼지바람을 자옥이 날리며 적진으로 뛰어간다. 이를 보고 신라군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서서히 피가 끓기 시작한다.

계백 장군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차마 들판에 버리지는 못하고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낸다. 품일 장군은 그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에 옷깃을 적시면서 말한다.

“내 아들의 얼굴은 산 것 같구나. 능히 나라의 일에 죽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幸矣)

이를 본 신라군의 눈에서 피눈물이 난다. 가슴이 용암처럼 들끓는다. 사기가 하늘을 꿰뚫는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불완전한 통일을 했다고 해서 우습게 여기는 신라가 조선이나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하여 얼마나 위대한가를 엿볼 수 있다. 지도자의 솔선수범--이것이 바로 신라의 가장 큰 힘이었다.

[젊은 시절의 김유신, 단기필마로 전세를 뒤집다]

▲  신라군의 전투 장면.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5권.
▲ 신라군의 전투 장면.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5권.

김유신 장군도 일찍이(629) 나이 서른다섯에 중간급 장교로 참여한 고구려와의 낭비성(현재의 청주) 전투에서 패전의 기색이 완연할 때, 칼을 높이 뽑아들고 단기필마도 뛰어들어 종횡무진으로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 적의 장군을 목 베어 전세를 역전시켜 승전으로 이끈 적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김서현 앞으로 나가 싸움을 자청했었다.

“우리 군사는 패전했습니다. 제가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 마음속에 기약했사오니, 싸움에 임하여 용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듣건대 옷깃을 정돈해야만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겨야만 그물이 펴진다고 했사오니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蓋聞振領 而正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가 몸을 사리고 아랫사람을 질책하고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 위기는 점점 커진다. 천 리 밖의 전쟁 소식을 듣고 천험의 요새인 한강과 어디보다 든든한 성곽을 갖춘 도성을 버리고 허둥지둥 한밤중을 틈타 도망간 선조를 생각해 보자.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호기롭게 북진통일을 외치다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인민군에 혼비백산하여 말로는 '서울 사수'를 외치고는 시민 몰래 도망가고 그 시민들이 나중에 사실을 알고 한강교에 개미떼같이 달라붙은 상태에서 다리를 폭파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보자.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의 장군들은 단지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이름 없는 병졸을 내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속보이는 짓을 하지 않았다. 장군들은 다름 아닌 자기 아들을 전쟁에 데려갔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다. 세 장군 중에 두 명이나 그렇게 했다.

김유신 대장군은 이 당시 장성한 아들이 없어서 두 장군 중에 자기와 더 가까운 장군인 동생 흠순의 아들 곧 사랑하는 조카를 먼저 내보냈다. 이를 보고 또 다른 장군인 품일이 아직 전쟁에서 심부름이나 할 나이인 아들 관창을 내보낸 것이다.

사실 이런 소년을 전쟁에 데려갔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효보다 충을 앞세워 아들을 사지로 내보낸 것이다. 이를 생생히 지켜본 신라의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생사를 돌보지 않고, 네 번 싸워 네 번 다 패한 것도 다 잊어버리고 지옥사자 계백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를 향해 화살에 설맞아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간 것이다.

[원술랑에게 무한책임을 지운 김유신 부부]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김유신 장군에게는 아들이 여섯(서자 한 명 포함)에 딸이 넷이었다. 이 중에 둘째 아들이 흔히 원술랑이라고 불리는 저 유명한 김원술이다.

음험한 속셈을 드러내는 당 나라와 역시 당을 교묘하게 이용한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싸울 때보다 더 치열한 8년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원술도 마침내 장성하여 초급장교(비장)로 한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패하게 된다. 이때 원술은 싸워서 장렬히 죽으려고 했지만, 그의 부관 담릉이 개죽음을 말라고 말고삐를 잡고 매달리는 바람에 뜻을 못 이루게 된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을 가리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죽어서 성공함이 없다면 살아서 훗날의 성공을 도모함만 못할 것입니다.”

(大丈夫非死之難 處死之爲難也 若死而無成 不若生而圖後效)

이 말을 듣고 원술은 이렇게 안타까워 했다.

“사내는 구차스럽게 살지 않는 것인데, 내가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겠느냐?”

(男兒不苟生 將何面目吾父也)

이 당시 후방에 있었던 김유신 장군은 문무왕에게 패전을 수습할 대책을 일러 주고 이어 오직 한 사람 원술을 벌할 것을 간한다.

“원술은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정의 훈계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但元述不惟辱王命而亦負家訓 可斬也)

그러자 문무왕이 그가 일개 초급장교에 지나지 않음을 들어 홀로 그에게 중벌을 내릴 수 없다고 하여 원술을 용서한다. 그러나 원술은 이때부터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673)에야 어머니 지소부인에게 뵙기를 청한다. 그러나 지소부인은 매정하게 거절한다.

“원술이 같은 자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께 자식 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若元述者 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其母乎)

마침내 원술은 675년 매소천성(현재의 양주) 전투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무찌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소부인은 끝내 그를 만나 주지 않는다. 원술은 그래서 벼슬도 마다하고 한평생을 쓸쓸하게 살았다.

도대체 왜 김유신 부부는 전쟁에 대해 아무런 죄도 없는 요새 말로 하면 소대장밖에 안 된 아들을, 왕이 나서서 비호하고 용서한 아들을 이렇게 모질게 대했을까?

지도자의 솔선수범은 위기를 맞이하여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한다. 말로만 앞장을 서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자기 목숨이나 자기 자식의 목숨도 위기 상황에서 먼저 내놓아야 한다. 법률적으로는 죄가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 상위의 도덕에 비추어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야만 아랫사람이, 병사가, 사원이, 국민이 그 권력에 굴복하여 육체의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그 권위에 자진하여 마음의 무릎을 꿇는다.


연합뉴스. 경주시 황성공원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

김유신 장군은 비록 젊은 시절 패전의 위기에서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을 목 벰으로써 승리로 이끈 적도 있었지만, 신라 역사상 가장 큰 전투였던 황산벌 싸움에서 두 장군이 한 명씩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들을 희생할 수 없었다. 비록 아이가 코흘리개여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것은 마음에 큰 짐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빚을 갚을 사람이 바로 원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전쟁에서 비록 지위가 낮았다고 하지만 살아서 돌아왔다. 반굴이나 관창처럼 장렬하게 죽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계기를 마련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패전한 전투에서 살아온 것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실지로 이때 장렬히 죽은 부자가 있었다. 이 일화로써 살아서 돌아온 원술에 대한 신라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거열주(현재의 거창)의 대감인 일길간 아진함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상장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들은 힘써 빨리 가시오. 나는 나이 벌써 일흔 살이니 산들 얼마나 살겠소. 이때야말로 내가 죽을 때이오.”

그는 곧장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거침없이 나아가 죽으니, 그 아들도 또한 뒤따라가서 죽는다.

신라인들은 누구나 건곤일척의 황산벌 싸움에서 두 장군의 아들이 희생된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김유신은 원술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너무나 잘 안 지소부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원술이 마침내 나라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아들의 가슴에 질책의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속으로 김유신 부부는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이런 김유신 부부를 신라인이 얼마나 우러러 보았겠으며, 또한 임금과 귀족들을 얼마나 마음속으로 따랐을까.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마저 치지 않은 것을 은근히 나무라는 당나라의 고종에게 소정방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라는 비록 나라는 작지만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귀족과 서민이 모두 하나로 똘똘 뭉쳐 있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謀也)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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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애국당 2019-04-24 08:18:1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신라의 힘은 거기에 있었군요

전미진 2019-04-24 09:51:51
비교를 625때 김일성이 아들들 중국으로 피난보내고 본인도 튈려고했던거랑 비교해주시면 더 좋았겠습니다. 이승만대통령님의 경우는 좌익들이 악의적으로 모함,유포했을 가능성이 커서 저는 믿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