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합천 황강 마실길

수변산책로 걷다 보면 만나는 느긋하고 다정한 풍경
강과 길 사이엔 들판과 습지·숲길·꽃밭...'4가지 코스'
대장경테마파크에서 팔만대장경 보고 만지며 체험
써니·암살·전우치 등 촬영 영상테마파크로 시간여행도

여름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황강.
여름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황강.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고령을 지날 무렵, 세찬 소나기가 내렸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우당탕탕 굵은 빗줄기가 퍼부었다.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구름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합천에 들어섰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들판과 가로수는 싱그러운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국의 초록은 지금이 가장 예쁘다. 20년 동안 이 땅을 취재하며 알게 됐다. 초록은 7월에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낸다는 것을. 읍내를 지나 황강 가에 차를 세우고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속 깊이 맑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희미하게 오이 향이 나는 듯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강의 향일 것이다.

황강길 따라가는 느긋한 발걸음

합천에 온 이유는 황강 마실길을 걷기 위해서다. 황강은 합천 읍내를 가로지르는 강이다. 경남 거창 삼봉산(1,254m)에서 발원해 도도산과 매화산·청계산의 깊은 골짜기를 흐르고 흘러 합천 읍내를 지나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길이는 약 111km에 달한다. 황강 마실길은 황강이 빚어내는 느긋하고 다정한 풍경을 옆에 두고 내내 걸을 수 있는데 강과 길 사이에는 들판과 습지·숲길·꽃밭 등 때로는 소박한, 때로는 게으른 풍경이 놓여 있다. 마실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길의 품새는 느긋하고 편안해서 운동화에 반바지 차림이면 충분하다.

연호사.
연호사.

황강 마실길은 모두 4가지 코스로 구성돼 있다. 가장 짧은 구간은 25분, 긴 구간도 1시간 40분 정도면 충분하다. 황강과 합천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구간은 1구간이다. 합천문화예술회관에서 시작해 함벽루를 지나 공설운동장에서 끝난다. 총길이 2.78km의 수변 산책로인데, 황강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합천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풍경도 만날 수 있다.

길을 걷는다. 바람이 등을 지그시 밀어준다. 자전거를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황강 마실길은 자전거를 타기에도 좋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합천 8경 중 하나인 ‘함벽루’를 만난다. 1321년 고려 충숙왕 8년에 세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우암 송시열 등 조선의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들의 글이 누각 현판에 걸려 있는데, 이것만 봐도 이곳에서 마주하는 황강의 풍경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누각에는 할머니 두 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자식 이야기, 시장 물가 이야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친구 이야기 등등. 강바람은 이런 이야기를 실어서 강에 떠 내려보낸다.

누각 뒤로 연호사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해인사보다 무려 150년 앞서 창건된 고찰이다. 이곳에 서면 함벽루와 어우러진 황강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아침 무렵 은은한 물안개가 필 때도 좋고 저물 무렵의 노을이 산 그림자와 함께 슬금슬금 내려올 때도 그때만의 운치가 있다.

건너편은 황강레포츠공원이다. 남정교를 건너면 닿는데 이곳에는 캠핑장도 조성돼 있다. 드넓게 펼쳐진 모래톱에는 드문드문 텐트가 쳐져 있다.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며 신나게 논다. 여름은 어른에게는 무더운 계절이지만 아이에게는 신나는 물놀이의 계절이다. 합천에서 태어난 박태일 시인은 황강 연작을 썼는데, 그의 시를 읽어보면 황강이 예전 풍경이 어땠는지 희미하게나마 그려진다.

천년고찰 해인사.
천년고찰 해인사.

‘황강 물 굴불굴불 황강 옥이와 귀엣말 즐겁습니다, 황강 모래 엄지 검지 발가락 새 물꽃 되어 흐르듯이, 간지러운 옛말이 들리는 봄, 재첩 볼우물이 고운 옥이 마을, 이모와 고모가 한 동기를 이루며 늙어간 버들골로, 물안개는 디딜 데 없이 아득하였습니다, 호르르르 물잠자리 홀로 물수제비 띄우고…’(‘황강9’ 중에서)

구불구불 흐르는 고운 모래밭, 그 모래밭에서 이모와 고모가 어울려 놀며 살며 늙어가는 풍경. 황강은 합천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안고 오늘도 흐르고 있다. 실제로 황강을 따라가다 보면 합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핫들 생태공원을 지나는 3구간도 꼭 걸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봄이면 작약이 만개하고 가을이면 메밀 꽃이 눈이 내린 듯 하얗게 핀다. 4구간은 수변 산책로 징검다리가 하이라이트다. 갈마산~황강레포츠공원~군민생활체육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인데, 갈마산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 이름 붙었다.

찬란한 세계문화유산

가야산 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곳으로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대 사찰로 손꼽힌다. 해인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으로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무려 16년에 걸쳐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했다. 장경각은 소금과 숯을 흙에 같이 버무려 바닥을 다져 무균 상태를 유지하고 숯으로 공기와 습도를 조절해 대장경을 보존한다. 장경각은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고려대장경판은 해인사 다른 경판과 같이 2007년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대장경테마파크는 우리의 가장 찬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지며 그 우수성을 체험하고 경험해볼 수 있는 곳이다. 팔만대장경의 제작 동기와 과정, 보관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쉽고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도와준다.

4코스 징검다리.
4코스 징검다리.

1층 원형전시장엔 경판으로 벽면이 가득 차 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대장경 로드실·신비실·보존과학실·이해실 등이 나온다. 대장경 로드실은 대장경의 기록과 전파 과정을 소개하는 곳이다. 신비실에서는 대장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산벚나무를 바닷물에 1~2년 담갔다가 소금물에 삶고, 한지를 만들어 글씨를 써서 다시 붙여서 글자를 새기고, 오탈자를 확인하는 등 장경판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눈물겨운 과정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그 시절 교복 입고 사진 한 컷

중년의 여행자들이 좋아하는 곳은 합천영상테마파크다. 1920~80년대 서울 길거리를 충실히 재연한 오픈 세트장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평양 시가지 전투 장면을 촬영한 세트장이 인기를 끌자, 좀 더 다양한 세트를 만들어 테마파크로 조성했다. 세트장의 규모가 무려 8만 3,000㎡(약 2만 5,000평)에 달한다. 넓은 부지에 150여 채 건물과 거리가 조성되어 전체를 둘러보려면 족히 2~3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1920년대 경성 거리와 1960~70년대 서울의 주요 건물과 거리 풍경을 감상하며 다니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다.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평양도 재현해놓았다. 2004년 개장한 이후 영화 ‘써니’ ‘암살’ ‘전우치’ ‘모던보이’, 드라마 ‘각시탈’ ‘에덴의 동쪽’ 등 50편이 넘는 영화와 80편 이상의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일제시대·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대부분 합천영상테마파크를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주한옥마을이나 서울의 고궁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 찍는 게 유행인데, 이곳에선 교복과 교련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는 다시 함벽루다. 누각 기둥에 등을 기대어 앉아 황강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먼 산 너머 뭉게구름이 어떤 부질없는 생각처럼, 헛된 물음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걷다 보면, 걸으며 이런저런 풍경을 만나다 보면 사는 게 참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거창한 목표나 원대한 꿈을 이루는 것도 좋지만 강 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누각 기둥에 기대어 앉아 강바람에 실어 보내면 그만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어쩌면 그게 인생의 전부일 지도 모른다.

[여행 정보]

합천 돼지국밥.
합천 돼지국밥.

합천은 돼지국밥이 맛있다. 국물은 잡내가 전혀 없고, 고기는 쫄깃하고 부드럽다. 읍내 왕후시장 입구의 중앙식육식장(055-931-2246)은 합천군민이 즐겨 찾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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