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4.19 혼란 틈타 침투, 가족을 간첩으로
北, 4.19 혼란 틈타 침투, 가족을 간첩으로
  • 유진
  • 승인 201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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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대남공작 70년사

 

남파공작원들이 쓰던 무기와 단파 라디오, 그리고 암호전문

북한은 4.19를 계기로 남한내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기존에 구축되어 있던 지하당조직(간첩망)을 급속히 확대하기 위해 해당 조직을 만들었던 공작원들을 다시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대남공작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충남 당진출신 남파공작원 김연길에 의해 만들어졌던 형제 간첩단 사건이다.

김연길은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6.25때 월북하여 정치대학을 졸업한 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하던 중 북한이 대남공작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던 1958년 초에 공작원으로 선발된 인물이다. 그는 공작원으로 임명된 후 초대소에서 대남침투 및 공작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연고관계를 이용해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라는 공작임무를 받고 1958년 7월 아산만으로 침투해 친동생들인 두 명을 접선, 포섭하는데 성공하고 같은 해 11월에 북한으로 복귀하였다.

◇당진의 김연길 형제 간첩단 사건

북한으로 복귀해 초대소에서 재교육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던 김연길은 4.19를 계기로 혼란스러운 정세가 조성되자 1차 침투하여 구축한 지하당조직을 확대하라는 임무를 받고 1960년 7월 재침투했다. 재침투 후 동생들을 접선해 지도하던 중 동생들이 “북한에 가 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북한 공작지도부에 보고해 승낙을 받은 다음 같은 해 9월에 두 동생을 대동하고 북한으로 복귀했다.

형을 따라 입북한 두 동생은 1개월 정도 평양에 머물면서 사상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10월 말 남해안으로 침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재침투할 때 받은 임무는 고향을 중심으로 어부들을 포섭해 당조직을 확대하는 동시에 어선을 구입해 연락공작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김연길은 몇 년 동안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간첩망과의 연락임무를 띠고 여러 차례 침투하여 동생을 통해 공작임무를 수행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받고 중앙당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연고공작을 통해 구축했던 남한 내 형제간첩망은 1973년 수사당국에 적발되어 일망타진 되었다.

이 외에도 1950년대 후반에 1차로 남파되어 연고자들을 포섭한 후 복귀했다가 4.19 직후 다시 침투해 기존에 만들었던 간첩망을 점검 확대하는 등 공작활동을 했던 사례는 상당히 많다. 4.19 직후에 북한은 남한 내에 연고가 있는 새로운 인물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해 필요한 교육 및 훈련을 시킨 다음 남파시켜 간첩망을 구축하기 위한 공작도 동시에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남 진도 출신 공작원 박영민과 그가 진도에 만들었던 간첩망이 적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남 진도 출신의 박영민은 6.25때 입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직업총동맹에서 간부로 재직하던 중 4.19 직후인 1960년 5월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초대소에 들어가 대남침투와 간첩망 구축과 관련된 훈련과 교육을 받은 박영민은 고향인 진도에 침투한 후 구 남로당 관계자들을 탐색 접촉해 노동당원으로 포섭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진도지역 지하당조직을 구성하는 동시에 내륙 지하조직과의 연락거점도 구축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와 함께 향후 간첩망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조직책임자를 대동 복귀하라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전남 진도의 박영민 간첩 사건

이러한 임무를 받고 같은 해 9월 말경 안내원들의 안내를 받아 진도해안으로 침투해 고향에 잠입한 박영민은 가족들과 접촉해 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여동생의 남편(매제)을 집중적으로 교양해 노동당에 가입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포섭한 매제를 대동하고 1960년 11월 말경에 북한으로 복귀했다.

대동 월북한 박영민의 매제는 약 2개월 동안 평양에 체류하면서 초대소에서 사상교육과 함께 공작활동에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그 후 공작지도부로부터 진도를 중심으로 지하조직을 확대발전시켜 튼튼한 연락거점을 구축하고 내륙과의 침투 및 연락임무를 수행하라는 공작임무를 받고 1961년 2월 초에 진도로 돌아와 주변 인물들을 포섭해 간첩망을 확대하는 등 공작활동을 했다.

박영민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남한에 재침투하여 기존에 구축해놓은 간첩망을 점검하고 지하당조직 관계자들을 대동 복귀시키는 등 남파공작 임무를 수행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연락부 지도원으로부터 과장, 부부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해외공작을 전담하는 부서로 옮겨 유고 자그레브 공작거점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박영민이 매제를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놓았던 간첩망은 수사당국에 적발되어 일망타진되었다.

물론 이 외에도 남한출신자들이 4.19이후 새롭게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교육 및 훈련을 받고 남파된 후 연고자들을 포섭해 간첩망 구축에 성공한 사례는 많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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