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천
이주천

전후 일본에서 8년 9개월 최장수 수상이던 거물급 정치인 아베 신조(68)가 암살을 당했다. 일본 열도가 큰 충격에 빠졌다.

아베는 외조부가 기시 노부스케로서 전범 리스트에 올라온 인물이고, 부친은 아베 신타로로 전후 외무장관을 역임한 경력을 가진 정치적 명문가에 속한다. 아베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한일간 역사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극우행보를 거듭했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와 징용공 문제를 둘러싼 한일합의서를 이끌어내는 통큰 결단력을 보이기도 했다. 외교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문재인 정부 당시 소원해진 한미관계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고, 함께 골프를 치는 등 미일관계를 강화했다. 퇴임이후에도 우익의 심볼로서 자민당내 최대 파벌을 이끌면서 대외정책에 영향력을 행세했다.

아베의 암살은 자민당 내부의 역학관계 변화와 민심의 우경화로 인해 일본의 대외정책에 크게 변화를 줄 수 있는 대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암살자의 살해동기로 통일교가 언급되면서 일본 내의 염한(厭韓) 분위기에 기름을 부어 한일관계의 정상화에 부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아베는 집권시절 대미외교를 강화해,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발언권을 확보하려고 노심초사했다. 또 일본의 군비재무장과 개헌을 통해서 ‘정상국가화’를 희구했다. 여기서 정상국가화란 일본의 평화헌법을 개정해 침공을 받았을 때 독자적으로 전쟁을 선언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자위대를 일본헌법에 명기하여 명실상부하게 일본군대로 원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개헌과 국내생산력 2% 이상 방위비 증액이 필요하다.

아베 암살 추모의 열기는 자민당의 압승으로 이어졌고 방위력 증강과 개헌선을 확보하게 됐다. 군사대국화의 빗장이 열린 것이다. 이런 행보가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길이 열렸는가에 대해 국내에서 우려의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헌법이 과거 태평양전쟁시처럼 군국주의 성격을 내포한 것은 아니고 군사대국화에 대해 견제장치가 마련되어있다. 그 이유는 주일미군이 일본의 행동반경을 견제하고 있고, 일본의 주적은 중국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미일 3각공조체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공통의 가치관으로 결속되어있다는 점이다. 한국이 중세 조선이 아니듯이 일본도 태평양전쟁시의 군국주의 일본이 아니다.

기시다 수상은 온건파로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고려하고 있지만, 그동안 아베의 입김 때문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직 아베의 계보에서 후계자가 정식으로 거론되지 못한 상태에서 기시다 수상은 장기집권을 통해 ‘자기정치’를 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자민당의 압승이 가져온 기시다의 자기정치가 반드시 한일관계의 복원과 순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베 암살 이후 추모의 무드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길게 진행될지 그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아베의 암살로 인해 한일관계의 정상화는 한국의 ‘조문정치’로 정상화의 물꼬를 틀 수도 있고, 일본 국내정치의 강경화에 함몰되어 장기간 표류할 수도 있다.

동북아에서 미국·일본·대만·한국 등 자유진영과 중국·러시아·북한 등 전체주의(공산주의)진영의 신냉전구도가 고착화되고 있다. 이미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일본 열도를 둘러싼 운항 위협으로 일본을 자극해왔다. 북한의 핵실험과 무분별한 미사일 발사도 일본의 안보위기를 촉발해왔다. 우크라이나전쟁뿐 아니라 대만-센카쿠가 3차대전의 화약고로 예상되면서 동북아의 안보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우리는 아베의 암살 이후 전개되는 정세변화에 국익의 관점에서 예의주시하고 현명하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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