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근, 통일운동가 아닌 김일성 인정 北거물간첩.
최백근, 통일운동가 아닌 김일성 인정 北거물간첩.
  • 유진
  • 승인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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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근 대남공작원을 추모하는 2006년 7월 북한 잡지 "조선" 기사. "그날의 당부를 가슴에 안고"는 최백근을 공화국영웅으로 칭하고 있으며 남조선혁명에 파견된 공작원으로 김일성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사진=The 자유일보

지난해 12월 21일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최백근 57주기 묘역 참배행사가 열렸다. 지난 해 4월 망우리 묘역에서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한 후 처음으로 열리는 추모행사였다.

이날 추모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최백근 선생은 참으로 걸출한 지도자였다"였다고 했다. 이들은 또 ”선생님에게 어느 해 보다도 보고드릴 사안들이 많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자인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 균형이 이뤄지자 어쩔 수 없이 북미대화에 나서고 있으나, 그들의 침략본성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북미대화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선생의 후학들인 우리들이 나서 자주통일세상을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은 또 “그런 분을 마소 같은 놈들에게 빼앗기고, 억울해서 독재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을 대항하여 싸워왔는데 아직도 선생이 원하던 세상은 도래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분통을 터뜨리고는 “하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아메리카 제국주의 종말을 고하는 책을 내고 있는 상황이다. 멀지 않은 시기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곧 도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추모한 최백근은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국가보안법 변형)’을 제정(1961.6.22)하면서 제6조에 ‘특수 반국가행위죄’를 두어 반국가행위자를 대대적으로 검거할 때 중앙사회당 조직위원장 신분으로 특수 반국가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1961년 12월 21일 처형된 인물이다.

앞서 마석모란공원에서 추모행사를 벌인 이들이 추앙하는 최백근은 민족통일운동가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한 북한의 간첩인가? 그는 누구인가?

최백근의 묘비

◇김일성이 직접 최백근 유가족 접견하고 기념사진 촬영

2006년 7월 북한 잡지 "조선"은 최백근이 남조선혁명의 영웅이며, 김일성의 명령을 목숨으로 관철한 우수한 통일전사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1993년 1월 최백근의 아들 최병건을 비롯한 가족들이 김일성을 접견한 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The 자유일보

여기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월간 화보지 '조선'(2006년 7월호)에 실린 것으로, 김일성이 1993년 1월 최백근의 아들 최병건을 비롯한 유가족을 접견한 후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관련 기사에서 북한은 최백근을 공화국영웅이자 '조국통일상' 수상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난 4월 11일 재야단체 인사들이 추모한 인물은 북한으로부터 공작임무를 받고 남파되어 활동하다 우리 수사당국에 검거되어 처형된 거물간첩 최백근이었던 것이다.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는 최백근의 묘비. 북한은 최백근을 남조선혁명 조직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최백근은 북한에서 공화국영웅칭호와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사진=구글

전직 대남공작요원들의 전언에 의하면 김일성이 말년에 회고록을 쓰면서 과거에 자신과 특별한 연고를 맺고 있었던 인물이나 유가족들을 찾아 만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대남공작과 관련된 유가족은 성시백, 박정호, 이현상, 그리고 최백근 등 네 가족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최백근이 평범한 공작원이 아니라 대남공작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 성시백과 박정호, 그리고 지리산빨치산 대장이었던 이현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상당히 비중 있는 남파공작원, 거물간첩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914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최백근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직후에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들어가 건준 총무부장이던 최근우 밑에서 일을 했다. 한편 최백근은 서울에서 남조선신민당을 결성했다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등과 합당해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창당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백남운의 측근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활약하다 검거 처형된 북한의 거물급 남파간첩 성시백과 조직적 연계를 가지고 활동한 공작원이었고 북조선노동당의 일원이었다. 최백근은 북한 공작지도부와 성시백의 지시에 따라 남한의 주요 인사들이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도록 적극 설득해 회의를 성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백근은 자신의 측근이자 남북협상파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백남운이 1948년 8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월북한 이후에도 남한에 남아 공작활동을 계속하다가 6.25때 월북했다. 그가 언제 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북한에는 그의 아들딸 5남매가 살고 있다.

◇최백근, 1955년 다시 지하당 재건 위해 남파

2006년 7월 북한 잡지 "조선"은 최백근의 아들 최병건 가족이 모여있는 사진을 기사와 함께 공개했다. 잡지 '조선'은 기사에서 최백근의 자녀들은 북한에서 북한군부, 보안성(대한민국의 경찰청 격), 국가보위부(대한민국의 국정원 격)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대남공작원이었던 할아버지인 최백근이 북한의 공화국영웅이며, 김일성이 총애하던 대남공작원이었다는 사실에 가슴벅차하며 적화통일의 일선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다고 밝혔다.  사진=The 자유일보

백근이 다시 공작원으로 발탁되어 남파된 시점은 북한 대남공작지도부가 전후의 복잡한 틈을 타 남한 내에 지하당조직 재건공작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던 1955년이다.

당시 지하당조직 재건 임무를 받고 남한에 침투한 최백근은 자신의 월북사실과 간첩신분을 은폐하기 위해 먼저 군 특수부대(HID) 고급장교로 있는 학교동창을 찾아갔다. 그 다음 동창이자 친구인 군 고급장교에게 자신이 그동안 부역관계로 피신생활을 해왔으나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어 해당기관에 자수하여 과거를 깨끗이 털어놓고 용서를 빌고 새롭게 출발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간청을 받아들인 군 고급장교의 도움을 받아 최백근은 관계기관에 자수하게 되었고 재판에서도 친구인 군 고급장교의 신원보증으로 비교적 짧은 2년 단기형을 받았다. 형무소에서 2년 만기 복역을 마친 최백근은 출소와 함께 합법적인 남한사람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이 사진은 2006년 7월 북한 잡지 "조선"에 소개된 최백근의 대남공작을 다룬 기사가 소개됐던 표지 사진이다. 사진=The 자유일보

형을 마치고 나온 최백근은 서울에 정착한 후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끊겼던 북한 공작지도부와의 연락관계를 복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을 시도하였다. 먼저 북한에서 남파공작을 위한 준비를 할 때 미리 약속한 대로 일정기간 동안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해당 주파수를 맞추고 방송을 들어보았으나 약정된 신호와 암호전문이 나오지 않았다.

이와 함께 북한 공작지도부에 보고할 내용을 적어 이미 약정한 대로 서울근교의 무인포스트에 묻어놓고 수개월을 기다려보았으나 연락물이 그대로 묻혀있는 등 북한 공작지도부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계속>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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