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워싱턴 군축회의

1921 이승만 ‘대한인동지회’ 결성
하와이 자중에도 외교무대가 불러
동포들의 엄청난 후원과 성금 답지
외교 드림팀 이승만·서재필·정한경
승전 강대국 한국독립의제 또 외면
사회주의 물결이 독립운동의 대세로

류석춘
류석춘

29살 때인 190412월 밀서를 품고 미국으로 가서 45살 때인 192012월 임시정부 대통령직 수행을 위해 상해로 가기까지, 청년 이승만의 삶은 도전그리고 승리의 연속이었다. 16년 동안 그가 이룩한 업적을 대충이라도 살펴보면 이를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은 한인 최초로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독립을 호소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하와이로 들어가 저술과 교육 그리고 교회 설립으로 명성을 얻었고, 1차대전 종전이라는 세계질서의 재편을 활용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염원을 담은 임시정부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2012월부터 19215월까지 6개월간 머문 상해에서의 대통령직 수행은 이승만에게 난생처음으로 처절한 실패를 맛보게 했다. 서북파와 기호파의 갈등, 무장투쟁과 외교투쟁의 갈등,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갈등은 임시정부를 끝없는 분열로 몰고갔다. 이 모든 분열의 한복판에 있던 고려공산당 상해파 이동휘는 이승만을 집요하게 흔들었다.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물주 역할까지도 해야 한다는 기대 또한 이승만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1921 11 11 워싱턴 군축회의 참석을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외교 정장 차림으로 나서는 이승만과 서재필. 왼쪽의 이승만은 46세, 오른쪽의 서재필은 57세다.
1921 11 11 워싱턴 군축회의 참석을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외교 정장 차림으로 나서는 이승만과 서재필. 왼쪽의 이승만은 46세, 오른쪽의 서재필은 57세다.

이승만은 결국 고별교서를 남기고 하와이로 돌아갔다. 실패의 원인을 곰 씹으며 그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무조건 자신을 지지할 동지들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임시정부 내부에 있는 이동휘의 고려공산당 상해파, 안창호의 흥사단은 물론이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지도 않은 박용만의 대한독립단 등이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조직 대한인동지회19217월 하와이에서 출발한 이유다.

동지회를 발족시키고도 이승만은 자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전개되는 국제정치의 현실은 이승만을 다시 독립운동의 무대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윌슨의 뒤를 이어 19213월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하딩 (Warren G. Harding) 1차대전의 원인이 된 건함(建艦) 경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승전국을 상대로 군비를 축소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태평양에서의 해군력 감축이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일명 워싱턴 군축회의혹은 태평양회의라 불린 이 회의는 192111월부터 이듬해인 19222월까지 이어졌다. 이 회의 개최 소식에 가장 먼저 대응이 필요함을 역설한 사람은 서재필이었다. 그는 19217월 상해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 이 회의에서 한국의 생사도 작정될 터라 말하며 동포들의 모금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가 맞장구를 쳤고, 상해 임시정부도 거드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오정환, 2022, p. 226).

서재필이 책임을 맡고 있던 구미위원부 모금 활동이 다시 활성화됐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는 물론이고 멕시코 및 쿠바 그리고 식민치하의 국내에서도 후원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고려공산당 상해파 국내부도 후원에 동참했다.

고무된 서재필은 하와이의 이승만이 이 문제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승전국을 상대로 독립을 얻고자 하는 외교적 노력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비록 상해를 떠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임시정부 대통령인 자신이 들끓고 있는 동포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음도 알고 있었다.

고심 끝에 이승만은 다시 나서기로 결단을 내렸다. 당시 사정을 생생히 전하는 기록이 하나 남아있다. 미국 유학 경력이 있는 김동성 기자가 1922211일 동아일보에 쓴 기사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재정리해 최근 (2020 8 18) 이진 기자 이름으로 특집기사 동아플래시 100: 냉대받은 이승만,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를 내보냈다. 이진 기자의 재정리를 인용한다.

“192192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9회 임시의회가 열렸습니다. 임시의정원은 지금의 국회입니다. 이 회의에서 1111일 개막하는 화성돈(華盛頓 [워싱턴])회의에 파견할 대한민국 대표단을 임명했죠. 화성돈 회의는 열강 9개국이 참가한 워싱턴 군축회의를 말합니다.

워싱턴 군축회의 참석을 위해 현지에 도착한 이승만과 정한경이 환영 꽃다발을 목에 걸고 있다. 왼쪽의 정한경 30세.
워싱턴 군축회의 참석을 위해 현지에 도착한 이승만과 정한경이 환영 꽃다발을 목에 걸고 있다. 왼쪽의 정한경 30세.

대표단은 단장 이승만, 부단장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프레드 돌프 [Frederic A, Dolph, 변호사], 특별고문 찰스 토머스 [Charles S. Thomas, 19203월 미 상원에 한국 독립촉구 결의안을 제출한 전직 상원의원] 5명으로 구성됐죠. 5명은 한마디로 독립외교운동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8월에 포고문을 발표했죠.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가 반드시 상정될 테니 모든 한국인은 있는 힘을 다해 도와달라고 호소했죠. 덕분에 활동자금 75천 달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현재 가치로 14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었죠. 이승만이 모금에 앞장섰습니다. 독립외교론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까지 1만 원을 냈죠. 지금 1억 원 정도입니다. 그만큼 워싱턴회의에 거는 기대가 컸다고 볼 수 있죠.

김동성은 이승만의 사택도 묘사합니다. 사택이 있는 16번가 [스콧서클] 은 워싱턴에서도 제일 화려하고 깨끗한 상류사회 주택단지라고 했죠. 4층짜리 사택의 내부시설은 조선 궁전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으리으리했고요. 일류 정객이나 각국 위원들이 고문 돌프와 미리 약속을 잡아 이 사택에서 이승만과 만난다고 했죠. 이승만 외교활동의 한 단면입니다. 김동성은 구미위원부의 활동도 취재했지만 부득이 보도하지 못한다고 했죠. 일제 검열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뛰어난 인재와 든든한 자금으로 독립외교운동에 나섰는데도 성과는 없었습니다. 정작 대표단은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죠. 냉대도 이만저만한 냉대가 아니었습니다. 한 미국 기자가 한국대표단은 회의장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고 묘사할 정도였죠. 회의에서는 주요 열강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다시 확인했을 뿐입니다.”

워싱턴 군축회의는 일본의 팽창을 제지하는 몇 가지 합의를 했다. 태평양의 해군 군사력을 미, , 일 세 나라가 5:5:3 비율로 유지하고, 영일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미···4개국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이 질서를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까지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독립 의제는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파리강화회의 푸대접,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무시에 이어 또다시 외교를 통한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승전 강대국들에 의해 완전히 패싱당했다. 서재필은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그만두고 의사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활동을 축소하고 19229월 조용히 하와이로 돌아갔다. 상해 임시정부는 내각이 무너지는 혼란을 겪으며 결국 (19253) 이승만을 탄핵하는 길로 들어섰다.

다른 한편 워싱턴 군축회의 폐막 무렵인 19221월 모스크바에서는 극동민족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의에 참가한 9개 나라 민족대표 144명 중 한국인이 52명이나 되었다 (오정환, 2022, p. 232). 고려공산당 소련파(이르쿠츠크파)는 물론이고 이동휘의 상해파와 김규식, 여운형, 현순 등 이승만 반대파가 대거 가담했다.

김규식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만세를 외쳤고, 현순은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을 호소했다. 모두 이승만을 돕던 인물들이었다. 바야흐로 독립운동의 방향이 사회주의 물결에 올라타는 흐름으로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이승만이 공산당의 당부당” (當不當, 옳고 그름) 이란 글을 태평양잡지19233월호에 쓴 이유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좌절한 이승만의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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